길이라는 것

1.

길이라는 것은 무한하다고 한다. 끝없이 갈라지는 두갈래 길, 아니면 어느 골목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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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봄의 끝자락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를 찾아가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사이'(間)다. 겨울과 봄의 사이, 그 기나긴 시간은 늘 불현듯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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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아직 하염없이 이어지는데, 내 발길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멈춰서는 지점이 있다. 거기에서 아주 사소한 절망이 우리의 나날들을 무의미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곤 한다.

철조망을 뛰어넘거나, 플래폼 아래의 철로 위로 한발자국 만 내딛는다면, 그 날의 한발자국이 자신의 일생에 있어 어떤 것이었는가를 아주 먼 훗날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어제는 처남의 사무실 개업식에 갔다. 고사를 도와주러온 보살이라는 분이 나의 띠를 물어보고, 모든 것이 좋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여지껏 점쟁이들이나 저런 사람들의 말이 맞은 적이 없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 눈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보라고! 이만하면 우리는 행복한 것이야.” 아내가 말했다.

그때 나는 점심 후의 식곤증에 시달리며 88올림픽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3.

엘비라 마디간을 다시 한번 보아야겠다.

This Post Has 10 Comments

  1. 마가진

    “이만하면 우리는 행복한 것이야”…

    “이만하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모님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진 분이라 생각됩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더 이상의 발전을 가질 수 없네 뭐네하고 할 지 떠들어대지만
    이미 모든 것을 가지신 분께 “더 이상”이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1. 旅인

      사람의 불행은 자기가 있는 지금 여기를 부인하고 앞으로… 저기… 를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영원과 절대라는 것에 자신을 붙들어매려고 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지도 모르지요.

  2. lamp; 은

    저도 힘든 일이 있을때마다
    (지금은 비록 힘들다하더라도)이만하면 괜찮아.. 이만하길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러다가 어떤 땐 와르르 무너져서 짜증도 내고 화도 내고
    한숨쉬고 울면서 신세한탄도 해보았지만 그 중 제일은
    이만하면 괜찮아라는 생각이 가장 저에게 힘을 주곤 해요. ^^

    이만하면 다행인거죠? ^^;

    1. 旅인

      그렇게 사는 것인가 보죠?

      그냥 힘들고 어려운 일을 그냥 간직하고 살 수만은 없으니…

      ****

      모든 것은 지나간다.
      일출의 장엄함이 아침 내내 계속되진 않으며
      비가 영원히 내리지도 않는다.
      일몰의 아름다움이 한 밤중까지 이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땅과 하늘과 천둥,
      바람과 불,
      호수와 산과 물
      이런 것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만일 그것들마저 사라진다면
      인간의 꿈이 계속될 수 있을까.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당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받아 들이라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린다.

      <세일 프란시스 알렉산더>

  3. 위소보루

    가장 빠른 것이 사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불현듯 찾아왔다가 멀어져버리는 그 시간은 느끼는 듯 하다가고 느낄 새 없이 지나간다는 느낌이랄까요 쩝

    1. 旅인

      젊음도 사랑도 그리고 인생도 어느 사이에 사라져버리지요.

      ******

      기억해라 진정한 속도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치 바람이 일어나는 것처럼
      해가 지고 달이 기우는 것처럼
      그것은 마치 네가 언제 나뭇잎이 누렇게 변하는 지
      모르는 것과 같다
      아이가 언제 처음 이가 나서
      자라는 지
      그것은 마치 언제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는 지
      네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진정 그 순간을 바라볼 수 있다면 무극이 양의를 생하는 그 천변만화를 손 안에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첸 카이거 감독의 무극 중>

  4. 善水

    사람 사이도 어쩌면 그토록 빠른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로스트의 두갈래 길을 가끔 생각하는데.. 언제나 우리에게 그런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 보다는 가끔 그 두갈래 길의 끝은 결국 같을 거란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면 지금이 눈앞에 보이는것 같기도 하고..
    멋진 아줌마! (사모님? 저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ㅜㅠ_)

    아.. 모차르트 처음으로 반한 곡이었습니다..

    1. 旅인

      마눌님, 어부인, 아줌마 다 어울리는데, 사모님은 어째 닭살^^입니다.

      머리가 나쁜지 모차르트는 다 싫습니다. 엘비라 마디간 말고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베토벤도 브라암스도 썩 좋은 것은 아니고 낭만파 이후나 19세기의 음악부터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 사이란 참 빠르기도 하고 참 느리기도 하지요?

  5. 슈풍크

    아주 사소한 절망이, 우리의 나날을 무의미하게 한다는 것..
    그리 낯설지 않은 말인데도 새삼 마음에 와닿는 것 같습니다.
    먼길을 가려면 사소한 것에 깊어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늘 걸려넘어지고요.
    정말 먼훗날에는 이해할 수 있게 될까요?

    저도 어젯밤에 엘비라 마디간을 다시 보았습니다 🙂

    1. 旅인

      저는 지금 보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본 때가 벌써 35년 전이군요. 그때 그토록 찬란해 보였던 마디간은 이제는 세월 탓인지 조금 촌스러워보이고, 그때는 거의 중년으로 보였던 스파레 백작은 이제는 아주 젊어보인다는 점이 세월의 시선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든다는 생각에 빠지게 합니다.

      먼 훗날에는 절망에 좀더 익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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