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눈

저는 일찍 일어납니다.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도 아침이면, 몸 속에 아직 피로가 촘촘히 박혀있다는 것을 뚜렷히 알지만 뭔가에 이끌리듯 침대에서 일어나 날이 밝지 않은 거실의 불을 켜고, 서성이며 날이 밝기를 기다립니다. 그 시간동안 제가 왜 그리 세상에 대해서 그토록 초조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TV를 켜거나, 때론 음악을 듣고, 간혹 딴 짓도 합니다. 아침이 밝아와도 또 날이 가고 저녁이 다가와도, 서쪽 창이 낮은 빛으로 감싸이고, 건너편 창들에 점점이 불이 들어와, 더 이상 기다릴 하루가 허락되지 않는 그 순간까지, 이 세상이 늘 초조합니다. 이 세상은 제게 다가오지 못하고, 저는 이 세상에 섞이지 못합니다.

아침에 서서히 밝아오는 빛 속에서 창 밖 언덕 위 나무둥치들과 가지들이 조용히 떠오르는 모습을 그리운 듯 바라봅니다. 때때로 저의 가슴 속 먼지에 뒤덮혀 있던 것들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차마 저는 그 이름이나, 너덜거리는 자취들을 뚜렷하게 거머쥘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열망이 제겐 더 이상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조용히 묵혀두었던 이름을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아득하고 더 이상 실체가 없기에 허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게는 고난과 비탄만 가득하리라는 서글픔이 들어차곤 합니다.

그래도 아침이면 빙점의 어둠에 깡깡 얼은 유리창에 눈을 기댄 채, 바람소리나 외로운 겨울새가 울고 가는 소리를 기다립니다. 아니면 도로 위로 타이어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자동차의 소리마저도…

그러면 육신의 온기와, 아침의 태양과, 하루종일 허락된 시간과,  TV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과, 담배연기. 공복으로 삭아내리는 위장들이 뒤섞이며, 구태의연한 냄새가 됩니다. 저는 그 무연의 시간 속에서 이 세상과 나의 정신이 어떠한 혈연으로 구질구질하게 얽혀있는지를 차마 알 수 없습니다.

겨울의 거리와 잎이 져 버린 겨울의 언덕들은 갈색으로 황폐하지만, 또 다시 생명이 움터오리라는 집요한 신념이 자라고, 하늘은 안개와 먼지와 구름으로 뒤섞이긴 하지만, 천공의 푸르름으로 뚜렷한 까닭에, 우울만으로 아우를 수 없는 빛과 그늘로 가득한 찬란함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도 새벽에 깨어났습니다. 거실에 불을 켜고, TV를 켭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 그리고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리라는 것을, TV 브라운관의 화면을 멍청히 쳐다보며 불현듯 알게 됩니다. 아내와 아들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논어를 좀더 읽어야 되고, 끝내지 못한 글들을 더 써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그냥 그렇게 시간을 죽이기로 합니다.

이제 아침이 됩니다. 날이 흐리지만 간혹 햇빛이 나기도 합니다. 겨울의 햇빛은 어쩐지 날카롭고 하얀 김을 토해내며 창을 두드리고 거실 먼지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아직 커피가 다 식지는 않았는지, 노란 햇빛 위로 낮은 김이 납니다.

그래도 저에게 할 일은 없고, 내일은 구정입니다. 음악이 듣고 싶지만, TV를 끄고 오디오의 다이얼을 맞추고 하는 일들이 귀찮습니다.

이제 9시의 태양이 구름 사이에서 나옵니다. 그 빛은 차라리 슬플 정도로 찬란합니다.

담배를 피워 문 저는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엽니다.

창문에서 대각선으로 있는 성당의 가파른 지붕 위에 눈이 하얗게 쌓였고, 맞은 편 언덕과 언덕을 지나 낮게 이어지는 구릉들도 간 밤의 눈으로 하얗습니다. 아파트 단지의 바닥도 경비실도 눈 속에 감싸여 있습니다.

그때 공기가 마구 흔들리며 술렁이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세상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인가 싶어 베란다에서 보이는 길 저쪽 부터 이쪽까지 훑어봅니다. 타이어 자국에 드러난 아스팔트의 검은 줄 외에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뭔일일까? 왜 대기가 이토록 흔들리고 있을까 하고 하늘을 보니, 가는 눈(雪)들이 내립니다. 너무 가늘어서 보이지도 않는 눈들이 그렇게 내립니다.

내리는 눈을 따라 눈길을 아래로 줍니다.

그때 텅빈 허공 중에 빛들이 와글거리는 것이 보입니다. 너무 미세해서 보지 못했던 빛이, 재잘대며 내리는 눈의 등을 밟고 허공 속에 뒤섞이며, 아침을 채웁니다.

담배 한개피가 다 타들어가도록 빛들이 허공 중에 술렁이는 모습을 보며, 이 세상에는 예기치 않는 기적으로 가득하다는 것에 가슴을 여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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