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기봉이

좋은 영화이고 재미있으면서도 흥행에 실패한 영화는 이런 영화다. 이 영화의 실패에 대하여 블로거들의 평은 다양하다. 코믹 설정에 치우쳐 연기자들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다 보니 영화의 응집력이 떨어진다, 말아톤의 흥행에 무임승차하려다 실패했다, 신현준이 실제인물인 엄기봉씨에 비하여 덩치가 너무 크고 탁재훈이나 주변인물들의 연기가 코믹일변으로 치우치다 보니 유치했다 등등이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다. 영화사 속에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 중 다른 영화보다 구성이나 연기, 내용이 알차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얼마나 될까? 왕의 남자가 이런 면들을 골고루 갖추어서 성공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분위기에 편승한 탓도 있고, 이조에 나타난 게이와 천민과 왕의 만남이라는 설정들이 관객들을 혹하게 한 면도 있다고 본다.

이 영화가 엄기봉이라는 사람의 실제모습을 그리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엄기봉씨는 영화에 좋은 소재를 주었고, 그 소재는 뜀박질이 아니라, 마을과 효(孝)이다.

우리는 <웰컴투 동막골>에서 이상향의 산골마을(화전민촌)을 본 후, <맨발의 기봉이>에서 2천년대의 섬마을을 본다. 새마을 운동 이후 산업화, 도시화와 함께 예전의 마을은 기억에서 조차 희미해졌다. 이제는 촌에 가도 순박함이란 찾아볼 수 없고, 각박하기란 서울 못지않다.

<웰컴투 동막골>에서 여일(강혜정분)이 마을에 하나씩 있던 <미친 년>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기봉이는 <바보>를 보여준다. 마을의 아이들은 미친 년과 바보에게 돌을 던지거나 해꼬지를 하지만, 어르신들은 이 모자란 것들이 집에 오면 먹을 것을 주거나 얼굴을 씻기고 깨끗하게 세탁한 헌옷을 갈아입혀 보내곤 했다. 아이들이 <기봉이 기봉이> 하면 <네 놈들 친구냐? 기봉이 삼촌이라고 해야 한다>라고 하곤 했다. 험한 세월을 보내신 어르신들은 미친 년과 바보가 인간의 눈에는 모자르고 어그러졌을지 몰라도, 하늘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신다.

이른바 가방끈 길이가 좀 길고, 나름대로 영특한 사람들은 자신의 작은 그릇을 채우고 빛을 반짝반짝낸다. 바보란 너무 커서 텅 빈 그릇이다. 세상이 와서 채우지를 못한다. 지식도 그릇을 채우지 못하고 기억도 그릇을 채우지 못하며, 온갖 조롱과 멸시마저 감당할 수 있다. 영리한 사람의 작은 그릇에서 새어나오는 미움과 분노, 자만심이란 도시 찾아볼 수 없다. 아이들이 욕해도 돌팔매질에 맞아 피를 흘려도 그들은 금방 까먹고 아이들이 노는 곳에 나타나며, 마을 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바보는 그 마을의 중심에 있게 되고, 아이들이 크면서 그 바보야말로 마을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며, 아껴주어야 할 사람임을 자각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간다. 그리고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벌이면 “빨랑 가서 기봉이 아제더러 빈 냄비들고 오라고 해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봉이가 냄비 가득히 맛난 것을 채우고 얼굴 가득히 떠올리는 웃음을 바라보며 흐믓해 한다. 이 영화에서는 잃어버린 마을과 바보를 말하는 것 같다.

노자는 육친이 불화하니까 효도다 자애다 하는 것이 생겨났다(六親不和 有孝慈)고 한다. 이 글에서 효도와 자애는 마음이 동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고향집도 내려가 봐야 하고 용돈도 집어드려야 하는 것이며, 웬수같은 자식이라도 쥐어박을 수는 없고 그래도 최소한은 먹이고 입혀야 할 것 아니냐는 강박관념이다. 그러나 <맨발의 기봉이>에서의 기봉이와 그 늙은 엄마는 너무 친하여 효도도 필요없고 자애는 뭐 말라비틀어진 것이냐는 천진함으로 가득하다. 냄비에 먹을 것을 얻어다 따뜻한 음식을 먹을 우리 엄니를 생각하면 기봉은 마냥 즐겁고, 모자란 자식이 애틋하기가 “기봉아 너는 세상이 그렇게 즐겁냐?”라는 무뚝뚝한 어머니의 말 속에서 뚝뚝 떨어진다.

요즘 사람들 영화보는 안목이 너무 이지적이라서, 나는 좋게 본 이 영화를 두고 뭐라 뭐라 하니, 내 눈이 삐었나하는 생각이 들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신현준의 바보 연기가 실감나고, 어찌나 예쁜지 모르겠다. 또 김수미의 엄마 역할은 또 얼마나 따습든지…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기봉이를 하프마라톤에 내보내려던 백이장이 기봉에게 혈육 이상의 애정을 느끼며, 목깐통에 데리고 가서 때밀어주는 그 훈훈한 인정이 너무도 좋았다.

이 영화가 명화는 아닐지라도 나는 이런 착한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 중 일부는 싸가지없고 껄렁대기는 하지만,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철이 덜 들었을 뿐 모두 착하다.

아마 우리는 보리고개를 울며불며 넘느라고 이런 착한 마을과 착한 사람들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보와 미친년을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비추어 볼 거울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각박한 도시에서 각박하고 나보다 훨씬 잘나 보이는 사람들을 마주 대한다. 그래서 나보다 못난 사람을 용납할 가슴을 지니지 못한다. 그리고 미움과 분노와 자기비하와 자만심 등을 걸머지고 산다.

남들이 뭐라 해도 <맨발의 기봉이>는 볼만한 행복한 영화다.

참고> 맨발의 기봉이

This Post Has 3 Comments

  1. 善水

    너무 친하여 효도도 필요없고 자애는 뭐 말라비틀어진것이냐는 천진함으로… 마음에 와닿는 바가 큽니다.
    비슷하게 예전에 말씀하셨던 情또한 이미 하나인데 정은 무슨놈의 정… 이란 생각이 스치기도 합니다.
    정말 멋진 리뷰세요
    이거 꼭 오늘의 저한테 반성의 밥, 용기와 격려를 반찬삼아 듬뿍먹고 으쌰으쌰 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ㅋ

    1. 旅인

      요즘 한국영화가 너무 좋아요.
      어렸을 땐 방화(邦畵)라고 하면서 낮춰보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극장 가본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습니다.

  2. 旅인

    목련
    영화 보다 여인님의 영화 평론이 진국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여인님게서는 보리 고개를 넘으셨습니까???
    보리고개란 못살고 가난한 먹을것 없었던 시절인가요.
    음 저는 밀고개 를 넘었네요..~ㅋㅋ(농담이에요.)
    우리는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비추어 볼 거울을 잃어버렸다.
    (정말 그런게 아닐까싶어요.)
    맑고 투명한 거울을 다시 찾고 싶은 날입니다. 줄거운시간 보내세요..~아..또 감동입니다.
    └ 여인
    도시에 살면서 보리고개를 경험했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호남에 큰 흉년이 내리 삼년이나 들었고, 호남에서는 밥술이나 덜자고 웬만큼 큰 딸이나 아들을 기차표 하나 딸랑 쥐어줘 서울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일할 사람은 넘쳐나고 집에는 일하는 언니로 그들을 데려다 쓰곤 했지요.

    piper
    주5일제 실시와 함께 여가활용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그 영화를 통해 감정이입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곤 하는데요. 저역시 말씀하셨듯 착한.. 행복한 영화를 좋아합니다. 이를테면 해피엔딩인 것들을 참 좋아하는데, 가타부타 말이 많아도 나에게 좋은 영화가 가장 좋은 영화죠…^^
    └ 여인
    님의 영화에 대한 감상이 늘 흥미롭습니다. 편하게 영화를 즐기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최근에 본 영화 중 제일 좋았던 영화는 <웰컴투 동막골>입니다. 착한 영화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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