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시절 -08

허참! 비러머글… 놈은 연애편지를 써 달라고 했다.

머리가 한 개 반이 빠지고, 거시기가 한창 여무는 시기에 나이가 지보다 두 살이나 아래고, 지 말대로 라면 젖비린내가 진동하는 놈에게, 남녀를 구분하는 척도가 갈라진 아랫도리를 입느냐, 터진 아랫도리를 입느냐 정도 밖에 안 되는 놈에게, 연애편지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하지만 놈은 집요했다. 어머님 전상서 혹은 친구에게 보내는 정도의 편지로 생각하고 승낙한 것에 대해서, 나는 처절하게 후회했다.

더 이상 버텼다가는 놈은 갈비뼈라도 부러뜨릴 기세였다. 또 잘 생각해보니 남의 연애편지를 못 쓸 것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쓴다고 해도, 놈이 어쩌지는 못할 것이고, 놈 같은 꼴통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썼다는 것을 분명 모를 일이었다.

놈이 또라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괜찮지만, 편지를 쓰자면, 편지를 받을 여자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어떤 애냐고 물었다.

놈은 다짜고짜 “그년은…”이라고 했다.

자신이 “그년을 재수 때 만났고,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다 보니 공부를 잡쳤다”고 했다. 자신은 재수에 실패하고 그년이 먼저 고등학교를 들어가다 보니 한마디로 걷어차였다는 무지하게 서글픈 이야기를 했다.

“사랑했냐?”

“지랄하고 자빠졌네!”라고 놈은 말했다.

“예뻤냐?”, “너를 사랑했냐?”, “착했냐?” 기타 등등을 물었지만, 놈의 대답을 종합해보면 한마디로 <개 같은 년>이었다.

그렇게 개 같다면 왜 편지를 쓰냐고 물었다.

놈은 비장하게 말했다. “복수!”

미친 놈에게 여자에 대하여 물었다는 것은 분명 불찰이었다. 어떻게 개 같은 여자에게, 그것도 남의 여자에게 연애편지를 쓴단 말인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놈에게 들은 이야기를 깡그리 무시하고, 대신할 순자니 말자 등을 찾아야 했다. 당시 뻬아트리체나, 샤를 롯테 등의 이름도 몰랐기에 과자 선전에 나오던 정윤희(실명을 거론해서 죄송~)를 대상으로 하여 편지를 쓰기로 했다.

열심히 편지를 썼다. 어찌되었던 간에 생애 처음으로 쓰는 연애편지 아니던가. 수업은 아예 제쳐놓고 내가 기억하는 좋은 구절이나, 내가 생각하는 여자에 대한 이미지 등을 반죽하고, 유식해 보이는 단어를 공책에 리스트하고, 사전까지 빌려다 한자를 섞어가며 썼다. 한마디로 그것은 잡탕에 비빔밥이었다.

놈의 애인인지 개 같은 뭐시기 인지에 대해서 모르는 만큼, 편지는 모호했다. 이러한 모호함이야 말로 뭔가 그럴 듯한 분위기를 줄 것 같았다. 다소 사색적인 것 같기도 하고, 인생의 허무감도 있고, 그 속에 보일 듯 말 듯 자기에 대한 연모의 감정도 있는 듯한 편지. 한마디로 놈의 여자가 똑똑하다면 쓰레기통으로 직행이지만, 놈의 말대로 개 같다면 뿅! 가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세시간여에 걸쳐 완성한 두 장짜리 대작 편지를, 놈에게 주었다.

놈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싸가지라곤 쥐뿔도 없는 놈이란 것만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놈은 편지는 볼 생각도 않고, 가방 속을 뒤지더니 파란 물이 든 편지지를 꺼내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위에다 깨끗하게 베껴 써! 글자 틀리지 말고…”

하마터면 놈에게 주먹을 날릴 뻔 했다. 그러나 놈에게 맞아 입원해야 할 불행한 사태를 생각하고, 막강한 인내력으로 참아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약자의 설움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는 욕을 놈에게 늘어놓는 것이았다.

그 보상으로 “거기 뒤에 너, 조그만 놈 나와!”소리를 들었고, 교단으로 끌려가 선생에게 (내가 관리하던) 출석부가 걸레가 되도록 맞았다.

이런 억울하고 비참한 일이…

어찌되었든 편지를 써 줄 수 밖에 없었다. 놈은 다 쓴 편지를 들고 찬찬히 읽어보았다.

“글씨 좋고, 문체도 좋은 데…. 요약하면 무슨 뜻이냐?”

“요오야악? 뭣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나도 몰라.”

하긴 나도 무슨 소리를 썼는지 모르니까.

“아무튼 고맙다. 부탁이 하나 더 있는 데…”, 놈은 염치도 없었다. 완전히 날로 먹겠다고 “봉투도 써 주라.” 하고 말했다.

그 후 놈이 편지를 보냈는 지, 말았는 지, 아무 말도 없었다. 대신 놈은 미술에 점점 미쳐갔다. 점심시간에도 틈이 나면 교실 옆의 미술실에 들어가 데생을 하곤 했다.

그러더니 수업시간에도 책을 들여다 보거나, 공책에 필기까지도 했다.

놈에게 “너 약(쥐약) 먹었지?”하고 물어보았다.

놈은 아니라며, 오히려 미술선생이 자기보고 그림을 잘 그린다고 했다고 자랑을 했다. 놈은 약간 씩 변해갔다. 나는 그것이 좀 불안했다. 우울증이거나 정신분열의 초기증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놈에게 대한 신경을 톡 끊고 도를 닦는 데 매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도를 닦는 일에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진도대로 나간다면 날아가는 계획을 단축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느 날이었다. 삼 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놈이 나를 힐끗 쳐다봤다.

나는 이 또라이가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 하나 했다. 놈은 나를 쳐다보면서 천천히 손을 책상 밑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자신의 샌드위치를 꺼내 내 책상 위에 놓았다.

내 책상 위의 샌드위치를 보는 순간, 드디어 놈이 완전히 맛이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감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책상을 빼서 앞 줄로 가야 할 때가 되었는지도 몰랐다. 놈이 온전한 정신이라면 자신의 자존심과 같은 샌드위치를 자발적으로 내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멍하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샌드위치를 보고 있으려니, 놈이 닭살이 돋아날 정도로 다정한 소리로 말했다.

“먹어! 그거 다 먹어!”

놈은 샌드위치를 둘러싼 비닐을 천천히 뜯어, 내 손에 쥐어줬다.

샌드위치를 받아 들고 놈을 쳐다보았다. 그때 아름다운 미소를 보았다. 놈의 얼굴에는 만족감과 천진함으로 범벅이 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미소를 바라보며 놈이 수업시간 중에 먹던 것처럼 나도 샌드위치를 씹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산골아이 09.05.14. 22:33
    ㅎㅎㅎ 재미와 감동과 웃음.. 이끌려가는 중독성… 다음편은 언제 올려요.
    ┗ 旅인 09.05.15. 11:18
    조만간 올리겠습니다.

    다리우스 09.05.15. 00:42
    컥 샌드위치를,,,ㅜ 아 감동의 눈물 한바가지,,, 해벌어지는 미소와 함께 짠한~흑 맛은요? 샌드위치 맛!
    ┗ 旅인 09.05.15. 11:21
    맛 없었습니다. 또라이가 어떻게 나갈 지 몰라 긴장하며 먹다보니 목이 말라서 제 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후로 놈의 샌드위치를 빼앗아 먹을 수는 있었지만… 그다지 맛있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본래 햄버거, 샌드위치 그런 것 안 좋아합니다.^^

    샤 론 09.05.15. 08:48
    약자의 설움 ! 난 여자라서 맞을 일이 없었지만 맞고 있는 남자애들을 보면서 내가 만약 힘이 있었다면 이유없이 펀치를 날리는 흉악한 애들을 패주었을 텐데..그런 아쉬움이 참 많았었던…ㅎㅎㅎ..사랑해서만이 연애편지를 쓰는게 아니었네요..복수..리벤쥐..ㅎㅎ. 여자들이 구분을 잘해야 할텐데…ㅎㅎ
    ┗ 旅인 09.05.15. 11:23
    저는 학교 다닐 때, 폭력에서 자유로왔습니다.
    ┗ 샤 론 09.05.15. 15:18
    그럴 줄 알았어요..ㅎㅎㅎ폭력 당하는 친구들은 거의 공부를 못했죠..그러니 얼마나 그들이 약자이겠습니까?..공부도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친구에게 매도 맞고…항상 울분에 차 있었죠..그런 모습들에.
    ┗ 旅인 09.05.15. 16:20
    아니 그것보다 당시 절 건드리면 친구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전 놈들의 마스코트, 자존심이었으니까요.
    ┗ 샤 론 09.05.15. 18:15
    드러나지 않는 두목이셨나봐요..ㅎㅎㅎ…두목 머리속에 거하는 또 다른 정신적 두목..
    ┗ 旅인 09.05.15. 18:36
    아뇨 마스코트라니까요.
    ┗ 샤 론 09.05.16. 22:18
    고집도 있으시군요 여인님!! ㅎㅎ소설방 마스코트는 어떠세요?..
    ┗ 旅인 09.05.16. 22:27
    이젠 남은 글도 없고 생짜배기로 써서 올려야 할 판인데… 겁나서 그런 것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슬 09.05.15. 10:14
    연애의 종말을 알리는 복수의 편지를 대필로 써주시고 댓가로 받은 샌드위치..ㅎㅎㅎ 오늘 저도 학교에서(스승의 날 때문에..) 일일 교사로 가야한다는 친한 동생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대신 글좀 써달라고 해서 A4 용지 한장의 글을 써서 전해 주었답니다. 댓가로 전 샌드위치가 아닌 맛난 밥을 얻어 먹게 생겼네요.ㅎㅎㅎ
    ┗ 旅인 09.05.15. 11:24
    저는 두장 써주고, 편지지에 베껴적어주고 봉투도 써주었는데… 샌드위치 한조각? 이런 억울할 데가…? 좌우지간 맛있는 곳에서 비싼 것 드십시요.
    ┗ 이슬 09.05.15. 12:14
    여인님 몫까지 제가 배불리 먹고 올게요~~ ㅎㅎ 지금 전화 왔네요. 끝났다고 밥 먹으러 가자고~~ 전 갑니다~ 룰루랄라~~^^
    ┗ 旅인 09.05.15. 16:18
    맛있는 것 드셨는지 잘 모르겠네…?
    ┗ 이슬 09.05.15. 19:08
    밥만 먹었어야 했는데…ㅎㅎㅎ
    ┗ 旅인 09.05.15. 19:24
    쫌 과식??
    ┗ 이슬 09.05.16. 00:19
    오늘이 친정아빠 음력 생신이라 동생과 점심 먹은 후 친정에서 또 밥 먹고 아빠가 주시는 술 다 받아 마셔서..ㅎㅎ 친정아빠가 뇌경색으로 아프신지 일년반이 지났네요. 아프시고 난 후에는 자꾸 술을 권하시고 주시는 술 안 받아 마시면 서운해 하셔서 오늘은 생신이라 주시는 맥주 소주 다 받아 마셨더니 과식 + 과(酒 ).^^
    ┗ 旅인 09.05.16. 21:48
    아무튼 아버님께서 즐거우셨겠네요. 과식 과주한들 어떠리오? 아버님께서 강건하시길 빕니다.
    ┗ 이슬 09.05.17. 16:20
    고 맙 습 니 다. ^^

    라비에벨 09.05.18. 15:17
    의미있는 샌드위치네요^^아주 천천히…아껴읽고 싶습니다…^^
    ┗ 旅인 09.05.18. 21:09
    예~

    유리알 유희 09.05.19. 22:22
    ㅎㅎㅎㅎ. 개. 뭐시기 때문에 무지무지 좋습니다. 발바닥 통증이 날아가도록… 음! 드디어 변화의 물결이.. 샌드위치. 그때는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도 몰랐거늘.. 즐감입니다. 여인님! 위로 후다닥 뛰어 갑니다.
    ┗ 旅인 09.05.20. 10:53
    통증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니 다행입니다. 샌드위치, 돈까스보다 더 드물었습니다. 놈의 샌드위치를 보면서 왜 저 놈 집에선 도시락을 싸주질 않을까 했거든요. 남들 책상에 머리를 쳐박고 도시락 먹는데, 혼자 칠판 쳐다보며 샌드위치를 씹어먹는 꼬라지를 보면 좀 처량해보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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