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시절 -07

뒷줄에 대한 감상에 젖어있을 때, 새로 짝이 된 놈은 환영은 고사하고 젖비린내가 난다고 앞줄로 돌아 가라고 했다.

놈은 우리반 공인 삼수생이었다. 뒷줄에 앉아 있는 재수파들 중에서도 몇 녀석은 놈에게 형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생긴 것은 멀쩡한데도 공부는 무지하게 못했다. 놈이 수업시간에 연필을 꺼내놓고 무얼 쓰는 것을 본 적이 없고, 교과서를 펼쳐놓고서도 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놈은 쉬는 시간에도 애들과 놀지 않았다. 뒷줄에서는 은밀하게 성인잡지와 빨간 책이 떠돌면서 수업시간에 키득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놈은 그런 것에도 도통 관심이 없었다.

놈은 도시락 대신 항상 2~3인분에 해당하는 샌드위치를 싸 왔다. 수업시간 중 책상 밑에 쑤셔 박아 놓고 조용히 한 입씩 씹어먹는 것을 즐겼다. 놈은 누구와도 나누어 먹지 않았고, 남들이 탐하는 내 도시락의 반찬에도 도통 관심이 없었다.

놈은 한마디로 이상한 놈이었다. 가끔은 내가 옆에 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고 “니 젖비린내가 몸에 배면 애인이 달아난다”고 푸념을 늘어놓거나, “뭘 먹었기에 요렇게 조그맣냐?”고 시비를 붙었다.

작았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놈이 시비 붙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 키 갖고 왈가왈부하기에는 샌드위치 한 조각 적선한 적도 없는 짜식이 말이다.

내가 실물보다 더 조그맣게 보였던 것은 다 어머니 때문이다.

입학식이 얼마남지 않아 교복을 사러 가겠다는 자식 놈을 어머니는 한사코 따라 나섰다. 몸에 맞는 교복을 고르자 어머니는 한 치수가 더 큰 것, 한 치수 더…를 외우기 시작했다. 결국 교복이 아닌 외투를 사 들고 집에 왔다.

어머니는 바늘을 들고 베개에 시침질하듯 바지 단을 접어가면서 “이제 네 나이가 훌쩍 크는 때인 만큼, 이렇게 단을 올리고 하면 한 삼 년 입겠지…”라고 말씀했다.

바늘을 들고 단을 시침질하시는 그 모습에서 어머니의 살벌한 고집을 보았고, 그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닐 생각을 하니 정말 개떡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여간 그 교복은 목의 칼라가 내 머리 사이즈와 같았고, 맨 아래 단추는 사타구니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였다. 우장 같이 커서 교복단추가 채워진 채 홀랑 입을 수 있는 빌어먹을 그 교복은, 그나마 작은 나를 절반으로 축소시켜, 놈들의 뇌리에 각인시켜 버렸던 것이다.

나는 교복을 저주했고, 입학 이삼 개월인가 지난 후, 형이 낡았다고 버린 교련복을 주어 입고 남은 일학년을 버텼다.

어느 날인가 미술시간에 놈은 또 하얀 도화지만 펴놓고 우둑허니 앉아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더니 “너 그림 잘 그린다. 짜식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하고 말하더니 “너 편지도 잘 쓰냐?”하고 물었다.

그 말에 오래 전에 편지를 썼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국민학교 오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국군장병에게 위문편지를 쓰라고 했다. 그 위문편지는 몇 개월동안 이어졌고, 휴가가 되어 국군장병 아저씨가 학교를 방문하여 나를 찾았다. 수업시간에 불려나가 애들이 창 너머로 나를 보고 있는 가운데, 아무 할 말이 없어 교정의 벤치에 앉아 그와 삼십분 쯤 먼 하늘만 보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 후 다시는 편지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그것은 까만 옛날 이야기였다.

그래서 편지를 쓸 줄 안다고 했다.

놈은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나는 좋다고 했고, 대신 그렇게 앉아만 있으면 미술선생에게 맞아 뒈질지 모르니까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놈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날 때 즈음, 미술선생이 놈의 도화지를 빼앗아 갔다. 놈은 멀뚱히 ‘미술선생 왜 저래?’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미술 선생은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놈의 그림을 들고 말했다.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거다. 너! 이거 그린 놈! 그래 너! 방과 후에 미술실로…”하고 선생은 수업을 끝냈다.

놈은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다가, “그림이 괜찮티?”하고 물었다.

놈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에 좀 짜증이 났다. 놈의 색감이 좋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 잘 그렸어.” 퉁명스럽게 내뱉고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서 돌아와 보니 놈은 꼼짝도 않고 칠판 만 보고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어도 책도 올려 놀 생각도 않고 놈은 그러고 있었다. 놈이 선생에게 야단맞을까 책과 공책을 펼쳐주고 “왜 그러냐?”고 물었다.

놈은 대답을 않고 그대로 있다가 쉬는 시간이 되자 “정말 내 그림이 괜찮았어?”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놈은 “정말?”하고 다시 물었다. “그래, 임마!”하고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놈의 얼굴 위로 웃음이 스쳐 지나갔고, “편지 쓰는 것 잊지 마.”하고 미술실로 가 봐야겠다고 했다.

이것이 놈과 나의 첫 대화였던 셈이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다리우스 09.05.14. 15:21
    하하하, 미술선생이 놈의 도화지를 빼앗아 갔다, 미술실로! 재밌게 잘 봅니다. 우연히 자신의 소질을 찾아냈군요.^^ 거칠게 싹트는 우정, 인물들의 변화가 주의를 끕니다, 아, 여기서도 또 홀리겠네, 감정이입, 정신 바짝 차리자! ㅎㅎ
    ┗ 旅인 09.05.14. 17:53
    이 미술선생이 중학교 때부터 절 좋아했는데 절보고 한번도 “미술실로!”라고 말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짜식 그림 한번 보고 “미술실로!”하니 짜증이 나지 않겠습니까? 서울대 서양화과로 들어갔다가 돈이 없어서 동양화과로 전과한 분인데… 국전에도 몇번 입상하신 분입니다.

    샤 론 09.05.14. 19:09
    미술 선생님 얘기가 나오는군요..항상 쓰신 글을 보고 있노라면 저의 학생시절과 비교하게 됩니다..저도 중학시절 3년내내 미술반이었거든요…이야기를 한번에 다 읽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궁금해서요..ㅎㅎ
    ┗ 旅인 09.05.14. 21:14
    샤론님 그럼 언제 그림한번 올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왕년의 실력을 한번…
    ┗ 샤 론 09.05.15. 08:59
    전 주로 동양화..국화 ..난초..이런 것을 섬세하게 그렸었는데 작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그저 향수만이 있을 뿐입니다..지금은 그 이후로 한 번도 그려 본 적이 없습니다..ㅎㅎ

    산골아이 09.05.14. 19:34
    ㅎㅎㅎ 여인님의 글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개성 만점… 그래서 더 리얼하고 구미가 자꾸 땡깁니다. 미술선생님의 안목이 없었다면 짝궁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합니다. 짝꿍이었던 화가와는 만나보셨는지요. 여자들을 토막살인한 그 누구냐…. 그자도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미술선생이란 작자가 가난한 학생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상처를 받았다나 뭐라나. 암튼 그 살인자도 여인님의 미술선생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학벌도 재산도 없기에 오직 미모 하나 담보로 노래방도우미로 꽃다운 청춘이 아작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야기가 빗나갔지만 다음 이야기 기다리겠습니다.
    ┗ 旅인 09.05.14. 21:13
    뒤에 이야기가 나오지만 놈과 헤어졌습니다.

    유리알 유희 09.05.15. 11:44
    미술을 하게 되는 친구와의 만남이 드디어 이루어지는군요. 어머니가 교복을 고르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자금도 교복을 사러 오면 아이와 어머니가 싸우기 일수죠. 하지만 요즈음은 애들이 승리하던걸요. 착한 여인님! 입담이 구수해서 즐거워라. ㅎㅎ
    ┗ 旅인 09.05.15. 16:17
    어머니는 저한테 좀 야박했습니다. 맨날 형의 옷 불하받아 입던 둘째 교복이라도 한번 번듯한 것 해주시지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그래도 여름교복은 맞는 것을 사 입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라비에벨 09.05.18. 15:07
    대마지에서 엘리트로 바꿔입고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스마트란 교복도 있었고…샌드위치를 싸올 정도면 집안은 좀 부유했나봅니다.^^
    ┗ 旅인 09.05.18. 21:12
    요즘은 폴리에스터인가 아크릴 기지인 교복보다는 대마인지 면 기지인 교복이 더 비쌀텐데요. 놈의 행동거지나 갖고 다니는 것을 보면 좀 사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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