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과 김용옥

강산무진이라는 소설집 속의 <뼈>라는 단편에서 김훈은, 화자의 입을 빌어 밥 때가 되자 밥을 먹고, 밥을 다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더러워진 발을 씻는 일은 현묘하지도 장엄하지도 않다. 그것은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 도올 김용옥은 『금강경강해』(통나무, 1999)에서 이 대목을 해설하면서 금강경이 부처와 그 무리들의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하루의 일과 속에서 말하여지고 알아들어졌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었다. 나는 도올의 글을 읽으면서 그처럼 상례적인 일상의 구체성에 감격하는 그의 놀라운 놀라움이 놀라웠다.(강산무진 132쪽) 라고 쓰고 있다.

김훈의 이러한 표현은 도올의 감수성에 대한 경탄인지, 쇼맨-쉽에 대한 힐난인지 알 수가 없다.

김훈과 김용옥은 같은 1948년생이며, 함께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다. 김용옥의 직업은 철학자이고 김훈의 직업은 문학가라고 한다. 그런데 이 직업은 뭔지 모르게 낯설다. 그리고 틀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철학가라면 사주나 관상 봐요 라는 느낌이 들고, 김용옥을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또 김훈에게 문필가라는 직업은 어울리는데, 문학가라는 것은 뭔지 몰라도 무겁다.

학자와 작가 대신, 철학자와 문학가라는 명칭의 무게감은, 두 사람의 구체적인 삶을 추상화시키고, 오히려 조소가 깃든 가벼운 것으로 만든다. 철학자 김용옥, 문학가 김훈 하면 그 앞에 <위대한>라는 형용이 거세된 느낌이 든다. 또 이 시대에 무슨 말라비틀어진 철학자요, 문학가란 말인가?

김용옥과 김훈은 서로 사맞지 않는 동창이다. 남다른 歷程으로 이 둘이 남긴 자취는 대단한 것이기도 하다.

김훈은 독립운동을 했다는 명분 외에 아무 것도 집에 가져다주는 것이 없이, 싸구려 무협소설이나 번역하여 신문사에 연재하는 아버지 밑에서 장남으로 힘겹게 힘겹게 자랐고, 김용옥은 천안에서 병원을 하는 부유한 집의 막내로 태어나 일본, 대만, 미국의 유수대학에 유학했다. 김훈이 영문학을 전공하고 최류탄 가스를 맡으며 취재할 때, 도올은 생물학, 신학, 철학을 전전하다가 고려대의 교수가 되었고, 양심선언이라는 것을 하고 상아탑을 박차고 나와 백수가 되었다.

철학자라는 것을 그에게 버거울 지는 몰라도, 이른바 상아탑에 갇혀 있던 인문학이라는 것을 민간에 퍼트리고 보편화시킨 공로는, 도올에 대한 소소한 비난에 비하여 큰 것이다. 학문이 아닌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문화 코드로 받아들일 때, 인문이 되고, 우리의 삶에 습합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일부에서는 학문을 포기하고 포퓰리즘에 영합했다고 하여도, 대중화가 바로 그의 공인 것이다.

김훈은 기자였다. 기자에게 글이란 전혀 문학적이 아니라, 정보의 수집과 전달, 즉 커뮤니케이션의 수단과 기능으로 밖에 쓰이지 않는다. 그는 유신과 5공 등 보도관제 시절에 현장기자를 했다. 그 시절에는 기자가 쓸 수 있는 기사에는 한계가 있었고, 정보는 마디마디 잘라지고, 때론 쓰레기통에 들어갔으며, 육하원칙은 실종되고 신문 위에 문학적 수사가 꽃피곤 했다.

그 시절의 기자들이란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민주화가 만개한 이 시점의 기자와 편집국에 있는 놈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짜증나게 아무 것도 아닌 놈들인 것이다.

김훈이 군부독재의 시절, 무슨 기사를 썼는지 나는 모른다. 그가 독재정권에 부역을 했는지,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의 김훈은 육하원칙을 떠나서 수필과 소설을 쓴다. 그는 어제의 현장에서 잡아낸 사건이라는 활어를 꿈틀꿈틀 오늘 아침으로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라, 無라는 질료를 언어로 깎고 닦아서 有를 형상화한다. 그의 형상화 과정에서 보여준 우리말이 이루어내는 결(무늬)과 빛깔에 나는 그저 취하고 마는 것이다.

도올은 인문을 대중화하고, 김훈은 문화의 그릇인 우리말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쌓이고 쌓이면, 지금 한류라는 작게 시작된 개울은 大河가 되고,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물결이 될 것이다.

This Post Has 4 Comments

  1. 위소보루

    제가 학교 다닐때는 이미 도올 김용옥 선생이 교수를 이미 그만둔 시절이었지만 간혹 고학번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가 한창 강의하시느라 유명해져서 더 이슈화되었던 것일수도 있구요 ^^

    김용옥 선생이 교수를 그만둔 이후로 고대에 체벌이 사라졌다라던지, 고대에서 이제껏 통틀어 4년동안 학점 4.5만점을 받은 사람이 2명 있는데 그 중 한명이 김용옥 선생이라는 것이 유명한 일화였었습니다.

    김훈 선생에 대해서는 단지 소설가로서만 알고 있었는데 새로운 정보를 또 배워 갑니다 ^^

    1. 여인

      그렇다면 당시에 인촌의 동상을 뒤집어 엎고 그런 때였겠네요. 도올의 선생이신 김충렬 교수가 바로 옆의 강의실에서 시인지 문학인지 모를 동양철학을 강의하던 때…?

      도올이 3학년 때 학부도 졸업하지 못한 놈의 논문을 학술지에 실을 수 없어 은사의 이름을 빌어 학회지에 논문발표를 한 적이 있는데, 아마 그 분이 김충렬 교수가 아닌가 합니다.

      특히 김충렬교수가 대만대학의 方東美교수 밑에서 사사받고 박사학위를 받는데, 도올 또한 방교수의 슬하에서 동양철학을 추가로 사사받는데… 두 사람 다 방교수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습니다.

      김훈 씨는 복학 후 월사금도 없고, 아버지도 돌아가셔서 집안을 꾸려야겠다고 영문학 3학년 중퇴로 신문사에 입사했다고 합니다.

    2. 위소보루

      아 그랬군요 그런 히스토리가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김충렬 교수님이라..대학에서 철학 관련 교양 수업을 두어개 정도 밖에 듣지 않아서 이런 분이 계셨는 것도 몰랐네요. 쩝

      인촌 동상을 철거하려고 하던 때는 기억이 납니다. 05년도가 아니었나 싶은데 군대 휴가를 나갔더니 그러고 있었더랬습니다.

      미디에어 비치는 김용옥 선생의 홀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많이 봐서 독학했겠거니라고 어림짐작했었는데 방교수라는 분의 영향을 받았군요.

      여인님을 통해 이런 사실을 하나하나 알게 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3. 여인

      85~89년도에 재단에서 핫바지로 이준범이란 야바위꾼 같은 총장을 시켰습니다. 그 전임은 장준하 선생과 함께 광복군을 했던 김준엽 총장으로, 이 분은 날강도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재벌들을 만나 학교키우게 돈내놔라 뭐해라 하면서 고려대를 키웠습니다. 하나 이분이 퇴임하신 후 이준범이란 이 작자는 김총장의 뒷감당할 능력이 없자 자금마련을 위하여 부정입학이라는 것으로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재단 측에 대학의 돈줄이 되는 고대병원의 소유권을 이전시킵니다. 그렇게 재단에 빌붙어 지내는 과정에서 부정입학에 대한 소문이 돌고, 한 학생이 교실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합니다. 이 자살 사건이 비화되면서 이준범의 비리가 까발겨지고, 인촌 김성수 일가가 일제에 부역한 대표적인 친일파임을 학생들이 자각하면서 재단은 물러가라! 친일 김성수의 동상을 교정에서 뽑아가라 하며 데모를 벌였고 학생들에 의해서 동상이 끌어내려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 인촌과 동아일보 김씨 일가의 친일경력(만주국 총영사 역임? 등)이 낱낱이 까발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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