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토요일의 식은 단상

<本來面目에 대한 에세이>

그러나 성찰이나 수행이 따르지 않는 지식 지푸라기 같은 것을 얻기 위한 독서란 얼마나 무가치한가? 이러할 때 이와 같은 명상록은 한갓 동화책이 될 뿐이다. 그리고 전번에 찾아낸 일기책을 펼쳐보았다.

거기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넌 완벽한 사람이야. 나로써는 네 곁에 있기가 너무 힘들었어. 한번도 나는 너를 이해해 본 적이 없었어. 그러나 SH는 너무 어리고 불쌍해.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서 있고 싶어.”

그리고 몇 장 뒤에 그녀는 SH에게 친구가 되자고 말했으나, (그에게) 거절당했으며 나를 저버렸음에도 (그 후) 다시 나를 만났다 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훨씬 전에 벌어졌을 사건의 한 단면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신호등 앞에서 우리가 헤어짐 없이 영원히 좋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YJ가 말했을 때, 무수한 기쁨이 몰아쳐 와 세상의 빛 속에서 따뜻함을 느꼈지만, 그때 나의 비겁함과 (내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략(술수)들이 나를 (그 따스함 속에) 가만히 놔둘 것인가 하는 서글픈 두려움에 젖어 들었다.

사실 일기 책에 쓰여있는 이 글들은 사건들이 벌어진 한참 후에 기억을 더듬어 기록된 것이긴 하나 과연 이런 일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일기 속의 기록은 마치 죽음을 앞 둔 사람이 과거를 추억하듯 쓰여 있다.

그리고 여기 적힌 글들이 과연 그들이 한 말 그대로 인지, 아니면 자신을 미화하기 위하여, 자기만족을 위하여, 기억의 밑바닥, 엉뚱한 곳에서 발췌한 것인지 이제 더 이상 확인할 다른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적은 글의 바로 앞의 글들의 그 유치로 찬란한 그 글들에서…

어린 내가 이 말들을 들었을 때, 얼마나 찢어지게 가슴이 아팠을 까 하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는 교만과 질투로 들뜬 어린아이의 행위가 얼마나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결과들을 가져다 주는 지, 그리고 충만한 감정으로 이들의 말을 수용할 수 없도록 하는 작용을 했는 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교만과 질투, 시기심이 없이 내가 내적인 겸손 속에서 살아올 수 있었다면……
나의 초라한 일기에는 어떠한 기록이 남아있었을까?

죄가 없다면 세상에 우리가 심심파적으로 말하는 역사라는 것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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