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죽음에 대한 관대함

아침에 택시를 타니 연세가 꽤 되신 기사분께서 “좋은 하루되십시요!”라고 한다. 연세가 드신 기사분이 모는 택시를 탈 경우 대충 기분이 좋고, 아침 인사까지 하시니 금상첨화, 그 인사가 과분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노충국>씨의 군병원 군의관이 암이라는 사실을 알렸는 지 안 알렸는지 하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그때, “군인 한사람 죽은 것 가지고 뭘 저렇게 떠드는 지? 전쟁이 터졌는 데 암 걸렸다고 전쟁을 안 할건가? 군대는 전체가 생명인 데, 한 두사람의 개인 사정을 다 봐줄 수 없는 것 아니겠우?”하며 나의 동의를 기다렸다.

그 말을 들을 때 나는 “아 이 양반아! 당신의 아들이나 나이 자실 만큼 자신 당신이 군대에 있었는 데 속이 더부룩하다고 군의관에게 갔더니 내시경으로 뱃 속을 들여다 보고 난 후, 그 속에 종양덩어리가 떡 하고 들어있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훼스탈이나 먹으라고 했다면, 군대가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관 속으로 기어들어가던지 아니면 자식을 당신의 가슴에 묻겠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타인의 죽음에 이렇게 관대하니, 자신의 삶을 보전하기 위하여 또한 얼마나 치열할 것인가?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져 오면서 우리는 얼마나 타인의 죽음에 관대할 수 밖에 없었는가? 일본놈들이 남양군도, 버마전선으로 반도인을 징병할 때 우리는 속수무책이었으며, 동란 시 얼마나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자기 자식들을 전선에서 빼돌리며 대신에 타인의 자식을 사지로 몰았던가? 그리고 명백히 정부의 폭압 하에 스러져 갔다고 확신이 가는 의문사들에 대하여 눈 감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할 수 없었던 세월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뻔뻔스럽게도 관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강다리가 버스가 달리는 중 무너지고, 자식새끼 옷을 고르던 중 백화점이 무너지는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타인 만 죽었지, 살아남은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이야말로 늘 살아남기 때문에 타인의 죽음을 무시한 채, 나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정언적 명법이 우리의 사회를 늘 지배해왔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식의 생각이 넘쳐난다면 타인의 타인으로서의 나의 삶은 개만도 못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요즘은 잡견들 뱃 속에 종기가 생겨도 개복을 하고 혹을 절개한 후 방사선 치료, 약물 치료 어쩌고 저쩌고 할 판에, 대한의 젊은 건아의 뱃 속에 암이 자라나고 있는 데 소화제라는 약물요법에 의존했다는 군의관의 실력은 노충국씨가 죽지만 않았어도 전세계 최강의 의료실력으로 회자될 만하다. 그러나 빌어먹게도 노충국씨의 죽음은 정말로 개만도 못한 죽음이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운전기사는 군대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쌍팔년도식의 논리를 꺼내는 것이다.

군대는 특수조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만큼 군인의 생명은, 살아가는 환경 속에 처해 있는 민간인에 비하여 항상 날카롭게 갈고 조여져야 하며, 죽음에 처했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건강과 영양, 위생이 관리되고 훈련이 수반되어야 한다. <돌격 앞으로!> 소리를 지르기 이전까지 군과 지휘관은 늘 부하의 삶을 보호하고 총알이 빗발치는 사선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하는 것이다.

전투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것은 용서될 수 없으며, 쫄따구가 배식에 실패하면 그 날로 끝장이라는 것이 군대의 속설이다. 군이란 남을 죽이기 이전에 자신이 살아남는 것을 우선으로 하며, 죽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군은 늘 패배하기 마련이다. 병(병졸)을 아껴야 군은 승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군이 아무리 특수하다 하여도 한 인간의 생명과 건강에 대해서는 더욱 엄밀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을 자신들의 생명으로 막아내야만 승리하는 것이 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충국 씨의 죽음이 개만도 못한 죽음에서, 가치있는 죽음으로 환원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타인의 죽음에 가슴을 떨고 분노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타인의 타인인 나의 삶 또한 존엄과 안전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자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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