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와 왕국(까뮈)

접어논 적지와 왕국

그러니까 매일 지나가던 길의 어느 담장에 균열이 간 것을 무심코 보다가 균열이 번져나간 맨 끝, 거기에 참으로 우연히 장미가 한송이 시들어 고달프게 매달려 있음을 보게 될 때, 자신이 한번도 그 동네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이 스쳐지나온 골목을 본다. 그러다가 그 사나이는 아침 햇빛에 사로잡혀 그 날 회사를 출근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늘 저녁 일곱시에 퇴근하려던 직원들을 잡아붙들고 소주 두병 이상 시키는 놈은 손가락을 자르기로 하자고 한 후, 술집으로 갔다. 물론 다섯명이 먹기에 소주 두병은 두사람의 넋두리도 받아줄 양은 못되었고 아무도 손가락을 자르지 못한 채 각자 딱 한병씩 먹고 나왔다. 내일이 추석연휴 전날이라 한잔 더하자는 직원은 없다. 시간은 아홉시. 직원 한명과 지하철에 올랐다. 나이가 많아지면 왜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지, 아무런 연관없는 이야기를 주절거리다 보니 직원이 내린다. 나는 왜 술을 먹자고 했을까? 잘 모르겠다.

늘 부족한 수면과 소주 한병 탓에 가물거리는 눈으로 <적지와 왕국>을 펼쳐들었다. 이미 <간부>, <배교자>는 읽었고 내려야 할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는 <말없는 사람들>을 마치고 잠시 <익사와 수영>이라는 해설을 펼치게 되었다.

거기에 <전락>이 <적지와 왕국>의 단편으로 처음에는 구상되었다가 전락의 주인공 클레망소의 말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장편소설이 되어버렸고, <적지와 왕국>의 마지막 편을 장식하려던 <전락>이 <적지와 왕국>보다 일년 먼저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제일 좋아했던 두권의 책은 결국 까뮈의 탯속에서는 한 몸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하찮은 사실이 불현듯 나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물론 나는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에 내렸다. 그리고 돌뿌리에 걸리거나 그러지 않고 오늘따라 기다리는 일없이 버스가 딱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소주 한 병은 불행인지 행운인지 몰라도 아가씨들이 좀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오! 베이베~

그렇다고 내가 그녀들에게 말을 걸었다기 보다는 가령 계단을 올라가는 아가씨의 치맛자락이 흔들리거나 또각거리며 절도있게 울리는 구두소리를 들으면 간절하게 아가씨의 얼굴이 보고 싶다거나, 아니면 예쁜 아가씨의 얼굴을 술 한잔을 빌어 정직한 표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덮었을 때, 책은 늘 더 잘 읽히는 법이다. 나는 흔들리는 버스의 손잡이에 매달려, 지금의 나이의 절반도 채 안되었던 그 때, 이 책에 왜 그토록 매료되었던 것일까를 생각했다. 아마 그때 여자친구가 왜 좋았냐고 물었다면 나는 아마 “그냥.”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뚜렷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웅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약간은 술에 취한 걸음걸이로 어둔 골목을 걸어오르면서 나도 언젠가는 <비록 짧기는 하지만, 가장 초라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권좌에 있는 그 어떤 자들보다 가장 위대한 순간을 맞이하기를>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