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터어키로 가다

미뤄둔 일들이 많다. 그것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질곡으로 남는다. 그 일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더욱 더 해결이 어려워질 것이다.

그리고 하늘을 보니 영락없이 늦은 가을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나뭇잎이 수북히 떨어지고 나무가지 사이로 하늘이 차갑게 보인다. 도로에는 어제의 빗물을 떨어내지 못한 낙엽들이 바람에 바들거리고, 사람들은 더욱 더 무심한 얼굴로 거리를 황황히 지난다.

등줄기를 스쳐지나는 냉기 속에서 담배를 빨며, ‘최후의 자유란 죽음이다’라고 유치하게 중얼거리다가 ‘왜’하고 자문한다. 엉성한 나의 중얼거림과 반문에 온당한 논리나 진리란 없다.

쓸데없는 생각을 자주하는 편이라서 철커덩거리는 퇴근길 지하철 속에서 밀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와 같은 답을 찾았는 지도 모른다.

선과 악, 쾌락과 고통, 미와 추, 영혼과 육신 같은 이원론은 사람이 無에서 有化하는 과정에서 사물과 관념이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분화되면서 불가피하게 생겨난 듀얼리즘이라고 아주 쉽게 단정했다. 인간은 결단코 악과 고통, 추함과 육신의 갈증을 추구하지 않고 그 반대를 지향하지만 선과 쾌락, 아름다움과 영혼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 반대편은 짙은 냄새를 풍기며 더욱 뚜렷해질 뿐이다. 궁극적인 일원론으로 들어갈 때, 대립적인 양자는 소멸되고 평화와 자유로 수렴될 것이며, 일원론은 결국 有의 無化, 죽음이라는 아주 장엄하고도 유치한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스무살 언저리에서 생각해볼 만한 것이었다.

지하철을 벗어나 버스를 기다릴 때,
갑자기 터어키로 가고 싶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청도에서 황도로 가기 위하여 승차한 채 도항선에 올랐을 때, 함께 간 직원이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때론 독실한 교인의 이야기를 듣기를 즐기기도 한다. 나는 중국어가 능통한 그에게 중문 성경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재미있는 게 있는 데 한 학자가 한자로 성경을 풀었어요. 배선(船)자가 노아의 방주(舟)에 생존했던 여덟명(八)의 사람(口)이라고 하는 등 여러 한자를 성경과 빗대었더군요.”

그 때 배가 파도에 흔들렸고, 어젯 밤의 과음과 피로 속에 멀미를 느꼈다.

“그런데 이거 알아? 인간이 신보다 위대한 점이 하나 있다는 것?”

그는 기독교에 대한 나의 배교적 성향을 아는 듯
약간 우려하는 표정으로 “뭐죠?’하고 물었다.

“신은 단 한번도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거야. 그런데 인간들은 죽음을 경험하지. 그래서 예수가 태어나고 죽은 것은 단순히 인류의 구원일 뿐 아니라, 신에게도 하나의 구원이라는 점이지.”

비록 친구는 놀라는 듯한 표정을 떠올리기는 했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나는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피로에 찌들어 너무 시니컬해져 있던 탓일까?

그래 오래 전부터 터어키로 가고 싶었다.

그것은 예전에 손창민과 강수연이 나오던 ‘지금 우리는 제네바로 간다’라는 제목처럼 무의미한 것이다. 의미를 찾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본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즉흥적이며 그럴듯하다 외에 어떠한 함의도 없다.

그래서 그 영화를 본 연인들은 제목의 의미를 이야기하며 여관방에서 날을 밝힐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의 궁극적인 탈출은 그토록 가보고 싶은 두려움의 대지, 인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역사와 공상 밖에 아무 의미도 없는 그 땅 아나톨리야 반도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은 내가 생각하기에 지구의 마지막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유 역시 하나의 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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