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습이야기

改梵爲秦 先其藻蔚 雖得大意 殊隔文體
有以嚼飯與人 非徒失味 乃令嘔穢

鳩摩羅什 『爲僧叡論四方辭體』 (全晉文)

구마라습(Kumarajiva : 344~413년)은 경국지재였다.

그는 인도 아버지(kumarayana)와 쿠차국의 왕의 누이동생을 어머니(Jiva)로 쿠차에서 태어났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秦王 부견은 나습의 학문을 흠모하여 어떻게 하면 그를 중국으로 데려올까하고 어전회의를 열었다. 한 대신이 쿠차국을 멸하면 나습이 머물 곳이 없으리오리다 하자 여광을 시켜 쿠차를 멸(383년)한다. 결국 나습은 여광을 따라 양주로 간다. 그러나 후진이 양주를 공략하여 후진왕 요흥의 환대 하에 장안(401년)으로 간다.

그리고 남은 12년의 생애 속에 경률 74부 380여권을 번역해낸다. 특히 삼론, 중관의 불교에 심혈을 기울여 삼론종의 조사로 추앙될 뿐 아니라, 제자가 삼천에 이르고 도생, 승조, 도융, 승예 등은 습문 4철이라 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으로 하여 고국이 중국에 병탄되었음에도 중국인들을 위하여 불경번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위의 내용을 나름대로 번역해 본다면, 범어(산스크리트어 혹은 팔리어)를 한어(秦)로 번역함에 있어 먼저 그 맛과 멋을 살린다. 비록 대의를 얻었다 하더라도 문장이 서로 사맞지 아니하면 비록 사람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면서도 맛이 중국 것과 다르다하면 토해내는 것과 같이 했다.라고 실토할 정도로 인도 아리안의 언어를 漢藏語族(Sino-Tibetan languages)의 중국어로 번역하는 데 열성을 기울였다.

그가 중국에 도래하기 이전인 전도시대의 불교번역은 소승 대승이 혼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고도의 사변적인 불교용어를 토착화시키기에 애로가 있어 노장(도가)의 술어를 빌어다 쓰는 격의불교의 형태를 취하다보니 불교의 독자성이 도가와 혼효되고 있었다.

그가 역경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경전 뿐 아니라 대승반야부의 기틀이 되는 공관론의 각종 논서가 정리되어 중국 삼론종의 개창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번역한 경전을 바탕으로 중국불교의 독자적인 연구성과가 쌓이고 추가적인 번역사업이 이루어져 당 현장의 역경사업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그의 역경의 작업물들은 초기 작업임에도 TEXT면에서 중요도가 높아 불경연구에 있어 당 현장역과 함께 권위면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불교가 전래된 지 물경 천칠팔백년에 달하고 있는데, 시노 티베탄어를 우랄 알타이어계인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이루어진 지는 불과 몇십년에 불과하다. 특히 범어원전으로부터 한국어로 직역은 아예 꿈조차 꾸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장 해인사의 대장경 역경 사업에 있어서도 어떤 체계와 권위 속에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 모르겠다.

또한 팔만대장경이라고 할만큼 텍스트의 방대성은 일반신자가 어떤 경전을 바탕으로 불교에 접근할 것인가하는 점에서도 어렵게 한다. 신자나 일반인들이 나름대로 불경에 접근하고는 있지만 번역서라는 것들의 해석의 권위면에서는 현토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기독교 신자들은 한국이 여호와의 은총을 받은 땅이라고들 하지만, 한국에 기독교도의 단기급증은 토착화(한글로 경전화)된 유, 불, 도가 없는 나라에 한글 성경을 만들어 무상배포하고 서구적인 합리주의에 입각한 근대교육을 한 산물이라는 것에 대한 그들의 반성적인 겸허함은 결여되어 있다.

불교가 무지막지하게 어렵다면 번역은 더욱 쉬워야 함에도 아직 불교는 산문의 농지거리 수준이며, 땡초들의 무지가 선문의 법어로 횡행하고 있음은 과거 카톨릭이 라틴어 성경을 고집하다가 신교에 신도들을 빼앗긴 것 마냥 토착불교 신도들을 기독교에 빼앗긴 것이다.

경전없는 종교와 신도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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