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기행(곽재구)

지상의 양식을 읽고 그와 같은 책을 쓰고 싶었다. 문장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지드가 여행을 갔고 풍광과 하찮은 것들에 대하여 혹은 우정이나 열정 등에 대하여 썼다는 것, 그 자체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지상의 양식이 이름다웠다고 오랫동안 기억했다.

대학시절 아무 목적없이 그저 떠나간다는 것, 가슴 속 사랑의 애틋함과 보고 싶음마저 유보하고 표류한다는 것에 흡족해 했다.
늘상 속쓰림에 시달려 왔기에 탈시드를 주머니 속에 넣고, 속알이를 두려워하면서도 어디론가 갔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났다. 풍경만 있고 사람이 없는 여행. 또한 나에게는 부를 친구 메날크마저 없었다.

곽재구는 사평역을 지은 시인이란다.
전남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는 기차역이 없다.(인근에 남평역은 있다고 함)
상상의 간이역을 지은 시인은 마음 속에 늘 떠나감을 간직한 채, 늦게 오는 막차를 늘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시인이란 애당초 사람들이 만들어 논 세상을 혐오하면서도, 결국 사람과 자연에 깃들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다. 게다가 이기적일 정도로 자신의 감정에 매몰된다. 그래서 늘 생활력이 박약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시가 자연과 인간의 가슴 속을 천착한다면, 산문은 결국 사회와 문명과 문화라는 인위를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시가 몽환적이라면 산문에는 생활이 보인다.
포구기행을 쓴 사람이라 그런지 남해의 미조포구에서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진도의 씻김굿으로 마감한다.

시인의 언어의 섬세함과 남도마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상상 속에 떠오르는 풍광 속으로 함몰하면서 가보고 싶은 곳으로 만든다. 그리고 시인과 학자, 음악가들의 흔적이 화선지에 먹여지는 연분홍빛 먹감처럼 선연히 떠오른다.

그의 글은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다소나마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다는 그의 이야기. 역마살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행복이라면, 질펀한 행운을 그는 누리고 있는 것이다.

관광과 여행이 틀리다는 그의 의견에 동감하면서, 그가 그린 섬진강의 이야기를 듣는다. 압록진수가 악양강이 되었다가 섬진강이 되어 광양으로 흘러간다는 이야기를 들을 즈음이면, 지리산에서 위천으로 함양을 지나다가 산청 즈음에서 경호강이 되어 진주의 남강으로 스며들고 삼량진의 갈대 숲에서 낙동에 합류되는 고향의 개울을 생각해 본다.
강에게 흘러감의 자유 밖에 없다면, 흐름에 따라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흥겨운 일이다.

곽재구의 여행은 나와 비슷한 시기, 즉 대학시절부터이다.
그럼에도 나의 여행은 평면적이고, 시간을 보내며, 고독스러운 것을 찾는 아마추어라면, 그의 여행은 프로페셔널리즘에 입각한 무엇인가가 있다.

유흥준 교수(나는 항상 윤흥준인지 유흥준인지 윤홍준인지 햇갈린다. 교수께서 용서해주시길…)의 답사기가 문장 면에서 멋들어진다 해도(특히 한문해석의 독보성 때문에 : 분수령=산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류의 해석) 답사라는 목적이 가진 정보제공 측면이 강한 반면, 곽재구의 기행은 문학적이요, 감정의 비약이 지닌 정서적인 유려함이 있다.
반면, 신영복교수의 기행에서는 사람과 풍광보다는 자유를 향한 혁명의 울림만 느낄 수 있다.(신교수는 인격적으로 학자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 존경을 금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 길을 떠난 자의 길 위에는 사람의 애환과 갈매기, 꽃, 바람의 흐름으로 자유가 현전하는 데, 신교수의 기행에는 세상에는 질곡 뿐이라는 예언이 담겨져 있는 지……

나는 그의 아름다운 표현을 느끼고 잠재의식 속에 밀어 넣은 뒤,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
길이 지나감의 미덕을 지닌다면, 멋진 문장을 잊어버린다는 것 또한 자유이다.
정처없다는 것이 자유이고, 인간이 어떠한 형태로든 속박되어 있지만 여행이 자유롭다는 것은 길에 얽매이지 않고 시간을 날려보낸다는 데 있다.

사평역에서…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 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참고> 곽재구의 예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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