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선란도(부작난도)

nancho/picture

제발이 없는 불이선란도

nancho-2/picture

완성된 불이선란도

친구의 글씨는 악필이라기 보다는 개판이었다. 글씨의 옹색하기는 물론 글씨의 높낮이가 한 옥타브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모양새를 떠나 글씨를 커뮤니케이션의 한 수단이라고 놓고 볼 때 조차 상당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녀석은 자신의 서체가 추사의 글씨를 닮아있다고 주장했고, 망상은 자유라고 우리는 토를 달곤 했다.

어느 날, 녀석은 나에게 엽서를 보냈다. 지금 녀석이 엽서에 무엇을 끄적거려 보냈는 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전혀 안 난다. 그런데 엽서의 겉면에는 추사가 그린 것이 분명한 “지푸라기” 그림이 있었다. 녀석은 “자 봐라 내 글씨가 추사의 고졸한 글씨와 아취와 품격이 같지 아니한 가?”하고 엽서를 보냈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 그림이 가진 상쾌감에 흠뻑 젖었을 뿐이다. 분명 엽서의 뒷면에는 김정희의 무슨 그림이라고 쓰여있었을 것임에도 엽서를 잃어버리고 그러한 그림이 있음도 까맣게 잊었다.

후일에 추사에 대해서 알고자 하였으나, 그의 학문 등에 대하여 번역된 자료가 적어 접근이 어려웠다. 나의 공부 또한 번잡한 탓도 있겠으나, 실로 퇴율(성리학)을 모르는 데, 실학이니 그 종점인 추사에 대하여 과문할 수 밖에 없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서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책은 완당평전이 있으나, 윤흥준 교수의 유려한 문장에도 불구하고 상하 각 권 2만5천원, 도합 5만원이 무리였고, 내용 또한 윤교수가 전개할 수 있는 범위에 한정이 있었기에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후일 완당평전을 사서 보았으나, 추사가 금석학 외에 무슨 학문적 업적이 있는지에 대해 찾아볼 수 없었다.)

완당은 학자, 문인, 서예가, 화가 등의 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다. 나의 관심은 오히려 금석학이라든가 청대 고증학 대가인 옹방강과 완원을 통하여 수입한 학문적 방편 및 그가 인식한 세계 정세 등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완당평전을 남상한 결과, 그에 미치지 못함을 알았다. 하여 간송미술관의 연구원들의 소논문을 모은 “추사와 그의 시대”를 샀다. 그러나 그 책 또한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미흡했다.

그러던 중 가을님과 코스모스58님의 제주답사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 즈음에 나도 식구와 함께 제주에 있었으며, 추사의 적거지를 스쳐 지났다. 식구들에게 추사가 귀양 특히 위리안치된 장소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하고 스쳐 지났으나 아쉬움이 남았던 것은 사실이다.

조선의 역사 속에서 귀양살이를 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정송강, 윤고산, 정다산, 김추사와 같은 유배당한 죄인들이 역사 상 인물들로 복권되었다. 그러다 보니 유배지가 유적이 되고 유배 가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나쁜 놈들이란 공식이 통하게 되는 불행한 역사를 만나게 되었다.

추사가 정치적으로 훌륭한 자품을 지닌 사람이라는 근거는 나는 찾지 못하였다. 또한 가계가 영정조의 성세에서 순,헌,철의 말기로 이끈 노론의 영수 격이란 것에 회의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다만 그의 필획의 굳건함과 경학에서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초의 선사와 선문답을 벌이는 다양성 속에서 추사의 인품의 고절함을 느낄 뿐이다.

코스모스58님께서는 제주 적거지의 세한도를 말씀하셨는 데, 나는 추사의 지푸라기 그림 “불이선란도” 혹은 “부작란도”에 대하여 감상을 부치고자 한다.

불이선란도 혹은 부작란도의 이름은 본시 이 그림에 “세한도”와 같이 화제를 달지 않았기에 보는 사람들이 저마다 흥에 겨워 화제를 붙인 것이 불이선란도 혹은 부작란도라는 이명으로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난을 치는 법은 역시 예서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을 치는 법은 화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한 붓질이라도 화법이 있다면, 그리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한 것처럼 그는 난을 치지 않았는 지도 모른다.

세한도가 간난신고의 때에 그려진 그림이라 쓸쓸 고절의 뜻을 볼 수 있다면, 불이선란도는 초춘의 따스한 햇살을 보는 듯하기도 하고, 여름 아침의 이슬을 대하는 듯 하기도 하다.

불이선란도는 제작 년대가 미상이나, 추사의 만년인 1853년경에 그려진 것이라는 평이 중론이다. 그리고 부작란도를 작난(作亂)하 듯 그렸다. 부작란이나 불이선란이 첫 번 발문에 써진 내용 속에 들어 있다. 본 화제는 그림의 위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써나가는 것이 아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내려가는 식으로 쓰여져 있다.

난을 치지 않은 지 20년, 우연히 본성의 참 모습을 그렸네 문을 닫고 찾으며 또 찾은 곳, 이것이 유마의 불이선일쎄.
만약 어떤 사람이 억지로 요구하며 설명을 바란다면 또한 마땅히 비야이성의 유마거사의 말없음으로 사양하리라. 1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 無言謝之

만향 씀.(추사)낙관 2(曼香)

이 화제를 보고 어떤 이들은 추사의 오만이 글에서 번져 나온다고 하나, 나는 무위의 지극한 경지를 얻었다고 본다. 추사는 경화거족의 집에서 태어나 당대의 지성으로 커나가 海東第一通儒라고 자처할 만큼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와 북청의 유배를 경험했을 뿐 아니라, 가문의 영락을 맞이했다. 이 그림은 늙은 노구를 보살펴 주는 쑥대머리의 청년 달준을 위하여 그렸다. 평상심으로 “예전에는 내가 난을 치는 데 한가닥했었지”하고 수전증이 걸린 노인의 손으로 그렸다. 결국 그는 자신이 주장했던 대로 화법을 초탈할 수 있었고, 무위의 심득이 있었던 듯하다. 그 후 이 그림을 몇 번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고, 추사가 보기에 그 심득이 여일하되 이 그림을 속진에서 이해하랴 하고 자만심에 흥겨워 다시 발문를 또 썼다.

두번째 발문은 그림의 왼편 가운데에 있으되.

초서, 예서, 기이한 글자를 쓰는 법으로 썼으니 세상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하랴? 구경이 다시 화제를 쓰다. 3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知也 謳竟 又題

낙관을 당호인 (고연재)로 붙임. 4(古硯齋)

그 후 세번째 발문을 쓰되, 두번째의 발문에서 보인 자신의 교오함을 뒤집듯 이 그림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듯이 우하단에 쓴다.

애초 달준을 위하여 아무렇게나 그렸으니, 단지 한번만 있을 수 있고 두번은 있을 수 없다. 선객노인 씀. 5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낙관(낙문천하사) (김정희인)을 찍음. 6(樂文天下士) (金正喜印)

마지막으로 발문을 낙서하듯 세번째 발문의 옆에 쓰지만, 끝에는 낙관마저 없다.

오규일(소산)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우습구나! 7吳小山見而豪奪 可笑

이 마지막 발문에서 첫 발문에 있는 유마거사의 침묵의 무게를 떨어버리고, 두번째 발문의 속진에 대한 경멸 또한 없애버리더니, 제자 소산의 행위를 너털웃음으로 날려버리고 마는 인생에 대한 심득이 가득한 노대가의 입전수수의 경지를 엿볼 수 있다.

세한도의 발문에서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늦게 시듬을 아노라”고 자신이 알았던 지인들에 대한 은원의 감정을 내비치던 그가 “우습구나!” 한마디로 세상은 다 그러하다는 달관의 경지에 오른 점. 같은 그림에 네번이나 제발을 달아 그림을 애지중지한 점 등이 불이선란도가 그의 최후의 걸작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발문과 낙관 속에 고연재라는 당호 외에 추사, 만향, 구경, 선객노인, 낙문천하사 등의 많은 그의 호가 들어있고, 기타 지인, 후인들의 낙관들이 들어있어 일견 번쇄함을 느낄지라도 난초인지 지푸라기인지 모를 잡초 하나가 뜻 모를 향기를 간직한 채 조용히 봄 날을 즐기고 있다.

2003.03.19일에 내다봐 씀(2004.05.22일 첫 포스트라고 기록됨)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旅인 09.01.22. 12:49
    위의 내다봐는 제 첫 닉이었습니다.

    truth 09.01.22. 13:22
    .쩜찍고 간단식사후^^ 관념과 사실, 법도와 일탈, 유·불, 시서화, 서법과 화법,…혼융의 미덕의 재발견 아마도 여인님역시 이러한 표현을 실행중이신듯..^^ 감사히 잘 대하였습니다.
    ┗ 旅인 09.01.22. 14:54
    이 글은 ‘추사와 그의 시대’ 속에서 제발이 4번이나 붙었다는 글을 보고 쓴 글입니다. 제발은 보통 감상자가 붙이는 것이 원칙인데, 본인이 직접 제발을 4번이나 달았다는 것도 특이한 일이지요?
    ┗ truth 09.01.22. 18:16
    네 낙관이 여러개..그때마다의 감상이 스스로도 다르게 담겨진듯해요..어쩌면 세월이 흐를수록 거부할수없는 생에대한 애정 집착 그런것의 표명이였을까란생각도 들구요..

    다리우스 09.01.22. 13:09
    헉 ‘내다봐’ , 닉이 멋집니다.
    ┗ 旅인 09.01.22. 14:55
    아마 3년정도 썼을 것입니다.

    유리알 유희 09.01.23. 10:12
    세상에나. 감상평까지? 사람 맞자요/ 내다봐도 싸늘한 바람 뿐 암 것도 없구먼요.
    ┗ 旅인 09.01.23. 15:36
    그래도 간혹은 창 밖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좋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