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풍경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 김수영의 <풀> 중 일부 -
勅勒川 陰山下
天似穹廬籠蓋四野
天蒼蒼 野茫茫
風吹草低見牛羊

칙륵천은 음산 아래로 흐르고
하늘은 천막의 천장처럼 온 벌판을 덮었네
하늘은 푸르디 푸르고 벌판은 아득한데
바람이 불고 풀이 눕자 소와 양떼가 보인다

- 樂府의 <勅勒歌> -

시인 김수영이 바라본 풍경에는 다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말을 넘어선 아픔이자 울음이다. 그래서 그의 슬픔이 이는 곳에 풀이 눕고 다시 일어난다. 그래서 낮은 눈으로 풀이 눕는 모습을 보면 슬픔을 지나 광활한 세상이 보이는 법이다.

하루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을 바라보았다. 오후가 되자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들 위로는 구름의 그림자와 햇빛이 교차하며 시간을 짜 나갔다. 바람에 누운 풀과 꽃 사이로 나비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비의 행로를 나는 추적할 수 없었다. 나비는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순간이동처럼 사라졌다가 15센티 쯤 떨어진 곳에 반짝하고 나타나는 식으로 나비는 옮겨다녔다. 나비의 궤적을 추적하다보면 금새 피곤해지고 졸음에 빠져들게 된다. 공중에 하루살이들이 많은 지 머리 위로 수백마리의 잠자리들이 바람을 밟고 떠 있었다. 또 그 위로는 알 수 없는 새들이 잠자리들 사이로 날았다.

들의 끝나는 곳에 있는 미루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루나무의 가지가 어떤 형태로 자라나고 그 껍질의 질감이나 잎의 모습을 전혀 기억할 수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들이나 길이 소실되는 지점에서, 풍경을 수직으로 나누며 우뚝서서, 바람을 기록하는 잎과 가지가 그림자와 함께 뒤섞여 있는 모습 뿐이다.

해(日)는 남쪽에서 서쪽으로 서서히 방향을 기울이며 지쳐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자 풍경이 흔들렸다. 그것을 바람의 행로라고 단순히 말하려고 할 때, 춤추는 풍경 위로 한줄기의 햇빛이 들 위를 걷듯 가로로 지났다. 그런 것을 영혼이나 황홀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들 위의 풀과 생명들이 무엇인가 자신의 생명 사이로 스쳐지나는 것을 예감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들 위로 삼엄한 적요가 지나갔으니까.

그리고 숨을 죽였던 바람이 다시 불었다. 들 위의 나무와 풀들이 흔들렸지만, 건너편 미루나무는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나무보다 더 흔들릴 것만 같은 미루나무는 오후의 햇빛이 기분이 좋은 듯 고개만 갸우뚱했다.

그래서 바람이 불고, 바람에 미루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바람이 불면 미루나무는 숨을 들이쉬듯 가지들을 펼쳤다. 그리고 숨을 토해내듯 가지를 모으며 바람을 흘려보냈다. 바람이 드새면 깊은 숨을 들이쉬듯 미루나무는 가지를 더욱 펼쳐 바람을 잔뜩 받은 후, 길게 바람을 토해내며 자신의 몸의 흔들림을 가라앉히곤 했다.

그러니까 미루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숨쉬는 것이었다.

개울가 버드나무가 바람에 실성한 듯 하고, 다른 나무들은 주책없이 흔들리지만, 움직임이 잔잔한 탓에 들 위의 미루나무는 고독해보이고 사색적이다.

나는 그래서 오후 종일 서쪽으로 가는 해를 마주하고, 서쪽에서 오는 구름을 맞이하며 “바람아 불어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허무하게도 진리나 진실이라는 것이 나에게 없다는 것을, 진리나 진실이란 늘 저들이나 세상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간신히 알았던 것 같다.

만약에… 말이다. 눅눅한 인생이라는 것을 이 바람이 부는 들 위에 널어놓고 오후의 햇살 아래 뽀송하게 말린 뒤 탈탈 털어낸다면 그 날 밤에는 아주 깊은 잠을 잘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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