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무엇을 했니

낮에는 강 가에 있는 도서관으로 가서 ‘서양미술사’를 읽으며 하루가 조용히 저물어가는 것을 기다렸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눈과 마음’을 읽는다.

내 몸은 하나의 자아다. 그러나 사유가 그렇듯 투명성을 통해서 자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유는 무엇을 사유하든 사유로 흡수하고 사유로 구성하고 사유로 변형한다. (눈과 마음 39쪽)

침묵 속에서 매일을 보낸다. 말(語) 비대증으로 배설을 못하더니 결국 퇴화나 퇴행을 맞이한 것 같다. 말(言)은 이제 입이 필요치 않다. 단지 글이나 읽는 기형적인 기능이 되었다. 발성기관은 자취 만 남고, 입을 벌려 소리를 내는 것인 언어는, 보고 듣는 언어로 세상에 고착되었다. 그 뿌리에 물을 준다면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를 수나 있을까?

음악은 미술에 비하면 새롭다. 공간예술인 그림과 조각은 시간 속에 자취를 남기는 반면, 시간예술인 음악의 오래된 곡조는 불러주는 이가 없으면 그만 사라져 버린 탓이다. 중국 중세 시(詩)의 한 형태인 사(詞)를 읽으면 늘 사라진 곡조는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곡조가 사라진 노랫말을 읽는다는 허전함도 詞의 맛이다.

詞를 지을 宋나라 때만 하여도 만강홍(滿江紅), 류초청(柳梢靑), 갱루자(更漏子) 등의 곡자(曲子: 곡조)가 있었다. 카이펑(開封)이나 항저우(杭州)의 기루에서 분칠한 창기들이 비파소리에 맞춰 높은 음자리로 불렀던 곡자사(曲子詞 : 노래=곡조+가사)는 그쳤다. 이제 메마른 가사 만 남았다. 백석도인 강기(姜夔)는 시(詩)는 법도를 지키는 것이고, 곡(曲)이라는 것은 곡진하게 情을 다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제 메마른 가사 만 남았다. 하지만 곡진했던 情이 마른 얼룩은 가슴에 아리다.

  옥으로 만든 화로엔 향불이 타고 玉爐香
  붉은 초는 눈물 흘리며 紅蠟淚
  그림같은 방 안의 쓸쓸한 사람 만 비추네 偏照畵堂秋思
  검은 눈썹은 지워졌고 尾翠薄
  아름다운 머리는 헝크러졌는데 鬢雲殘
  긴긴 밤의 이부자리는 차갑기만 하네 夜長衾枕寒
     
  오동나무에 떨어지는 梧桐樹
  깊은 밤의 빗방울은 三更雨
  이별의 괴로움은 아랑곳 않고 不道離情正苦
  잎새마다 一葉葉
  똑똑 一聲聲
  텅빈 계단을 적시네 날이 샐 때까지 空階滴倒明

                                                                 [ 更漏子란 곡에 맞추어… 溫廷筠 지음 ]

아트지에 어리는 빛의 얼룩에 눈쌀을 찌푸리면서 ‘서양미술사’ 안의 글과 그림을 하루종일 들여다 보면 눈이 아프다. 책을 읽으면서 미술에 대한 교착되고 엉성한 나의 지식에 놀랄 수 밖에 없다.

티에폴로(Giambattista Tiepolo)의 ‘레조니코와 사보르난의 결혼의 알레고리‘는 지붕이란 하늘을 가로막아 내밀의 공간으로 우묵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공간을 확장하고 상상으로 채워넣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더듬게 되는데, 이는 로마의 일 제수 교회의 천장에 그려진 가울리(Giovanni Battista Gaulli)의 ‘그리스도의 승천‘의 경우와 같다.

호베마(Hobbema)의 ‘미들하니스의 오솔길‘에서 보는 것은 원근법이 아니라, 플랑드르 지방에 떠도는 청량한 공기일 뿐이다. 이런 아득한 풍경을 보면 심호흡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오르지오네(Giorgione)의 ‘잠자는 비너스‘와 제자인 티치아노(Vecello Tiziano)가 그린 ‘우로비스의 비너스‘는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잠자는 비너스’가 훨씬 관능적이다.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그림을 바라보는 이를 마주 쳐다보면서 보는 이의 시선을 그녀의 알몸으로 유도”(서양미술사 210쪽)하고 있다면, 지오르지오네의 비너스의 경우 보지 말아야 할 것을 훔쳐본다는 야릇한 죄책감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엘 그레코(El Greco)의 그림에 종종 출몰하는 ‘그녀‘는 실존했던 여자이지만 실존했다고 믿을 수 없다. 그녀는 성모로 나타났고 어떤 그림에서는 마돈나, 성 마르티나, 성 아그네스 세 여자로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8 thoughts on “어제는 무엇을 했니

  1. 저도 사람과 직접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주고받는 말보다는
    책, 음악, 가상공간 같은 곳에서 더 많은 말을 하고 듣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인간의 또다른 진화 과정인지, 아니면 퇴화 과정인지는 모르겠지만요…~.~

    1. 대화라는 것처럼 힘든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저 말이나 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화의 측면에서 보자면 퇴화이고 말에서 표현으로 넘어간다는 측면에서는 진화라기보다는 발전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2. 언변이 변변치 않은데다 익숙치 않은 한국 직장의 언어까지 배워야 하는 요즘의 저로써는 ‘말’이 좀 무섭습니다.
    강가의 도서관에서 읽는 미술사라… 시간이 절로 갈것 같습니다. ^^

    1. 언어의 문제보다 직장이라는 문화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미술사를 읽다보니 문화사를 다시금 정리하는 계기가 되더군요. 다른 미술사 책을 한 권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3. 저도 말이 그 기능을 잃어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제 문득 카페에 홀로 두 시간을 앉아 있으니, 아직 그렇지는 않은 것 같더라구요. ^-^

    1. 댓글이 달리지 않는 모양이네요. 휴지통에 들어가 있어서 댓글로 다시 올렸습니다.

      그런데 카페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프렌저님은 동구여행을 가거나 하면 간혹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을 것 깉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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