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쥐스킨트)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라는 책을 읽었을 때, 독일의 문학의 깊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것은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에서 불란서인 주인공의 집에 하숙을 살던 독일군 젊은 장교가 하숙집 서재의 책을 보며, 독일하면 음악은 있지만 변변한 문학은 없노라고 하던 기억이 난다. 불란서 작가의 양국 문화비평이긴 하지만, 나도 그에 동의한다. 독일어의 견고한 문법 때문인지는 몰라도, <깊이에의 강요>에서의 느낌은 문체가 정교하지만, 가볍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한 느낌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에 이르기까지 소설을 넘어선 사색의 여백이 늘 좁았다는 느낌이었다. 이번의 <향수>라는 책 또한 정교하지만, 독자의 생각이 확대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냄새를 주제로 한 김훈의 <개>와 이 글을 비교한다면, <개>의 냄새는 바람결에 왔다가 가는 냄새이다. 그래서 <개>의 냄새는 아득하며 부드럽다. 쥐스킨트의 <향수>에서 냄새는 바람 속에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다. 도시에 깔려있는 악취와 날아가 사라져버리는 향기를 알코올이나 유지에 침적시켜 유리병 속에 가둬두는 편집증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냄새는 집요하고 무겁다.

쥐스킨트의 소설을 읽으면서, 향수(Perfume)란 바람결에 날아왔다 사라지는 냄새의 문화 속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가장 좋은 냄새란 장미나 치자의 향기처럼 뚜렷한 것보다 바다와 같은 냄새, 솔숲의 내음, 낙엽이 진 뜨락에 내리는 가을비 냄새와 같이 미미하여 심호흡을 하게 하는 것들이다.

향수란 결코 전원 생활에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악취와 도시의 산물이다. 농촌의 청결한 생활 속에는 늘 향기가 있는 만큼, 향수가 필요치 않다. 18세기의 유럽, 불란서의 도시를 둘러싼 불결함과 악취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특히 중세와 대항해시대를 거쳐 도시화가 이루어지던 서구에 있어서 불결함은 항상 넘쳐나고 있었다. 그들은 육식을 했으며, 여자들도 식사를 하기 위하여 포크와 나이프가 아닌 단도를 휴대했다. 먹다 남은 고기와 피는 썩고, 뼈는 거리에 뒹굴었다. 사람들의 손은 고기의 기름으로 반질거렸고, 대서양을 건너는 선원에게 목욕이란 꿈조차 꿀 수 없다. 이러한 위생상태 속에서 페스트와 매독과 티푸스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였다.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되던 18세기에 들어서는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분뇨와 오물들이 넘쳐났다. 파리의 길거리에 넘쳐나는 오물들이 옷자락에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이힐(굽이 높은 신발)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러한 불결함 속에서 향수란 악취에 대한 대립항에 불과하다. 결국 그것도 냄새일 뿐이다. 숨쉬기가 답답하기는 악취와 매 한가지다.

여기에서 쥐스킨트의 <향수>는 시작한다.

쥐스킨트의 소설의 견고함은 향수제조에 대한 박물학적인 지식에도 있겠지만, 아주 문법적이라는 점이다.

주인공 그루누이는 비린내와 썩어가는 냄새로 등청인 어물전 좌판 밑에서 태어났고, 버려졌지만, 그의 몸에는 아무런 체취가 없다. 자신의 체취가 없는 그는 누구보다 냄새를 맡는데 탁월하며, 사람들이 소리의 차이를 분별해냄으로써 단어를 인지하듯이, 그는 세상의 모든 냄새의 차이를 변별해낼 수 있었다. 그는 악취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는 피혁가공공장에서 처음으로 일하고, 그 다음은 향수제조업자 밑에서 일한다. 그에게 있어 특정 향수를 제조하는 것이란 각각의 향기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문장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그 후 그는 여행을 하던 중, 어느 산에서 냄새가 없는 장소를 만나 오랫동안 머물며, 그동안 자신이 맡았던 냄새를 정리하고, 자신에 대하여 깨달아간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향수를 만들기 보다, 향수의 근원이 되는 냄새를 잡는 일에 열중한다.

쥐스킨트는 세상의 온갖 악취가 사람들로부터 비롯한다고 말하면서도, 지고의 향기는 아름다운 처녀의 속살에 담겨있다고 말한다.

그루누이에게 냄새는 곧 세상을 이해하는 언어이자, 율법이다. 그에게 냄새는 개별적이고 뚜렷하게 존재하며, 추하거나 아름답다. 그래서 위선적이고 타락한 인간들에 비하여, 더 존중받아야 하며, 보존되어야 하는 생명체이다. 그래서 그는 지고의 향기가 더럽혀지거나 사라지기 전에, 그 향기를 잡아 사멸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꽃봉오리가 열리려는 젊은 처녀 스무몇명을 연쇄적으로 살해하고, 그녀들의 알몸 곳곳에서 향기를 채집하여 병 속에 보존한다.

마지막 연쇄살인을 끝낸 후, 그는 붙잡히지만, 처형장에서 사랑의 향기를 퍼트림으로써 그는 모든 사람의 그에 대한 애정 속에서 처형장에서 풀려난다. 쥐스킨트는 냄새의 율법이 사람의 율법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풀려난 그루누이는 도주하던 중 자신의 몸에 특이한 향수를 뿌리고 사람들에게 잡아먹힌다.

스스로 카니발리즘의 희생자가 된 것은, 그는 이미 지고의 향기를 채집하였다. 또 냄새의 율법을 지배한 만큼 더 이상 악취와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란 없었다. 당연히 죽어야 했다. 그러나 죽음이란 육신의 부패와 악취로 둘러싸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냄새가 없는 죽음을 택한 것인지 모른다.

지고의 향기는 결국 아무 냄새도 없는 <무>, 세상의 모든 냄새가 멈춘 그 자리인 것이다.

참고> 향수

깊이에의 강요

며칠동안 쓸데없는 짓거리에 몰두해 있다. 이웃집 Q를 보며 저 사람은 왜 저 모양 저 꼬라지로 살면서 매일 저 짓거리를 하고 있는 지 도무지 이해 못하는 것처럼, 나는 빙의에 걸린 듯 그 일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대만공항에서 잔돈푼으로 남은 NT$를 소진하기 위해서 비행기가 출발하기 직전, 허겁지겁 집어든 책 중에 끼어있던 <주역만화>를 읽으면서, 그 내용의 방대함과 체계와 주역 해석에 대한 탁견에 감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치 그 일을 끝내버리면 더 이상 아무런 할 일이 없을 것이고 일상이 그만 바람이 빠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그 일이란 사진조각이다. 사진 하나를 발견하고 조각내어 나름대로 형상해 나가면서 쓸데없이 시간을 소진하는 이 일을 보며 아내는 무엇을 하냐고 묻는다. 조각을 하려고 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아내는 이제 그만 사진을 들여다보고 조각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사진을 잘라내고 사진의 표면에 거칠게 남아있던 부분과 불필요한 덩어리를 덜어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아내는 모른다. 나는 사진을 가지고 이미 조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이 귀성을 위하여 부모님들께 드릴 선물꾸러미를 들고 퇴근하던 섣달 그믐에 나는 문화상품권을 한장 달랑들고 책방으로 들어가 무료한 삼일을 보낼 책을 산다.

동네 책방은 참고서를 팔기 위한 서점이다. 신간코너에 놓여 있는 책들 중 일부는 이년이 넘도록 방치되어 있다. 바뀌는 책이라곤 요가책, 파페포포, 때론 다빈치 코드같은 것이 올라오는 수도 있다. 책방 주인은 신문도 보지 않는 지 신문에 광고되는 책이 진열되는 경우란 거의 없다. 그래서 신간코너의 책들은 조금씩 색이 바래어 근사한 구간서적이 되고 있다.

책방 주인은 저 재수없는 친구 또 왔네?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오늘은 책이라도 한권 사려나? 이번에도 안사면 다시는 우리 책방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뭐라고 해주어야지.라고 말하고 싶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그래서 신간코너가 아닌 아무도 들여다 보지 않는 구석의 서가에서 책을 하나 뽑아든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


!  ?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책의 첫머리, 열두번째 줄에 그렇게 쓰여 있다.

젊고 미모의 여류화가에게 어느 평론가가 찬사의 끝에 ‘그러나’라는 역접으로 던져지는 깊이가 없다 라는 이 말은 끔찍한 저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이나 인간의 깊이에 대하여 누가 잴 수 있단 말인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소묘) 앞에 불쑥 나선 그녀는 아이들을 인솔한 미술교사에게 “실례지만, 이 그림에 깊이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녀는 미술교사로 부터 비웃음만 샀을 뿐이며, 더 이상 깊이가 없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전도가 양양하던 그녀는 깊이를 찾지 못하여, 결국 높이 139미터의 방송탑으로 올라가 뛰어내린다. 마침내 침몰하지 못하고 추락한 것이다.

그녀의 부음을 접한 그 빌어먹을 평론가는 이렇게 쓴다.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 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그러나 나는 나의 생과 쥐스킨트의 이 글을 읽으며, 그 깊이를 찾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