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의 초상

jennie

예술과 영혼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지만 예술은 구체성을 띄고 다가오는 것이지만, 영혼이라는 것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 영혼이라는 것은 유한한 삶을 놓고 이 삶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에 대한 막연한 의문에 대하여 나의 삶은 과거세와 현세와 내세에 자기동일성을 지닌 어떤 것 즉 영혼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모호한 가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영혼이란 아주 나이브한 물활론적인 사고에서 출발한다. 아침 안개를 토해내는 호수, 숲길 사이로 내리비치는 햇살이 그늘과 뒤섞이면서 바람에 반짝이는 화음과 같은 것, 그리고 물결 위를 거니는 달빛, 아스팔트 위를 서성이는 어스름한 등불과 같은 속에 충만한 정신이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정신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 속에 꽉들어차 있으며 굽이치고 뒤섞이는 영혼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생명 속에도 그 굽이침은 흘러들고 또 빠져나가며 세상과 호흡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예술과 영혼 사이에는 일정의 상관관계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반면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당도한 우리는 영혼과의 문제를 떠나 예술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서 다시 혼미를 거듭할 수 밖에 없다. 이 시기는 모든 것이 예술이 되고 쓰레기가 될 수 있다.

제니의 초상 줄거리…

1948년작인 <제니의 초상>은 어떤 미국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소재나 줄거리는 참신한 것이 못된다. 가난한 화가가 십년 전에 죽은 소녀, 제니를 만나고, 고갈난 예술적 열정을 되찾아 불후의 명작 <제니의 초상>을 그리게 되었다는 그저 그런 서프라이즈류의 유령이야기다.

총천연색(Technicolor)가 정착된 시기임에도 마지막 등대에 해일이 몰아닥치는 장면 5분 정도가 녹색의 단색조로 나오고 박물관에 걸린 <제니의 초상화>가 몇십초 정도 풀 컬러로 나오지만, 86분간의 런닝 타임 대부분은 흑백이다.

흑백영화는 세상의 다채로운 색조를 빛과 그림자로 추상해낸다. 추상된 흑백영화를 볼 때는 빛과 그림자로 구성된 화면을 우리가 맞이하는 일상의 풍경으로 채색하고 재인식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흑백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집요해지지만, 빛과 그림자를 세상의 풍경으로 환원하기에는 언제나 은밀한 부분이 남게 마련이다.

그래서 흑백은 총천연색 영화보다 늘 몽환적이고 현실감이 떨어진다.

그런 빛과 그림자로 충만된 뉴욕의 겨울, 이반 아담스는 먹을 것과 방세를 얻기 위하여 그림을 들고 화랑을 전전한다. 거리는 앙상한 가지와 건물에 부딪는 오후의 햇빛 등으로 공허하고, 몇군데의 화랑을 전전했지만 아무도 그의 그림에 관심이 없다. 그것보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열정이 그에게는 고갈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들린 화상의 여사장은 그림보다 가난한 예술가의 재능을 사겠다며 그의 그림을 산 후, 풍경화보다 인물화를 그려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센트럴 파크에서 작고 귀여운 소녀를 만난다. 소녀의 이름은 제니 애플린. 그녀는 자신의 부모가 줄을 타는 사람이라는 말을 남기고 노래를 부르며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진다.

이반 아담스는 겨울부터 다음해 가을까지 시시때때로 소녀를 만난다. 저쪽 세상의 지나간 시간이 구겨지는 지점에서 소녀는 나타났기에 언제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 전혀 기약할 수 없다. 그가 제니를 만나는 시간은 불과 한달 또는 몇주의 시간 밖에 차이가 없었지만, 그때마다 제니는 몇년이라는 세월을 건너 뛰어 소녀에서 청소년 또 성숙한 여인으로 나타난다.

이반 아담스는 어린 소녀 제인에 대한 기억들을 스케치북에 그려 화랑으로 간다.

화랑의 여주인은 예지에 가득한 눈으로 그림을 보고, 소녀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습작을 이반 아담스가 생각한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구입한다.

겨울에서 여름을 지나는 동안 어린 소녀 제니는 부모를 잃었고, 수녀원 산하의 기숙학교를 졸업하면서 성인이 된다.

아담스의 생활이 도시의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예술 노동자의 무기력한 외로움이지만, 제니를 만나는 동안 그의 예술적 영감은 점차 되살아나고 생활도 점차 나아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니의 등장은 늘 가슴 아프다. 그녀는 아담스를 만나기 위하여 몇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했을 뿐 아니라, 부모의 상실 등으로 외로움 속에 깃들어 있었으리라는 나의 짐작 때문일 것이다.

아담스는 수녀원의 기숙학교를 졸업한 제니를 자신의 화실로 데리고 가서 그녀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림을 마칠 즈음, 제니의 모습은 빛 속에 반투명으로 떠올라 금방이라도 햇빛에 용해되고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그림을 마친 후 제니는 이모님이 아파서 더 이상 만나러 올 수 없다며, 여름동안 등대가 있는 어느 해변 마을에 머물 것이라고 한다.

아담스는 제니의 과거를 살피다가 십년 전 그 등대에서 폭풍을 만나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완성된 제니의 초상을 화랑의 여주인에게 맡기고 제니가 머무는 해변마을로 간다.

그가 배를 빌려 등대로 갔을 때, 십년 전과 같은 폭풍우가 몰아치고 그는 간신히 제니를 만나고 등대로 피신하자고 하지만 제니는 아담스에게 사랑한다고 하며 높은 파도 속에 사라지고 만다.

결국 제니는 죽음 속으로 사라지고 아담스는 살아남지만, 더 이상 아담스에 대한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는다.

단지 죽은 영혼과 한 가난한 화가가 만나 남긴 <제니의 초상>만이 박물관에 걸리고 영화는 끝난다.

배암의 뒷다리…

제니퍼 존스는 신비한 눈을 가진 배우다. 은막의 스타 가운데 눈이 번쩍 띌만큼의 미모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영화를 보면 늘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는데, 그녀의 자태와 몸짓, 눈동자를 보다보면 가슴이 설레게 된다.

이 영화를 찍을 때 그녀의 나이는 29살이었다. 어린 소녀 역을 하기에는 나이가 들었고 눈 가에 주름이 잡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늘 설레게 하는 매력의 정체를 찾기 위하여 1953년작 <종착역>을 보았다. 20세기에 가장 우울한 배우라는 몽고메리 클리프트 열연을 벌인 이 영화에서 그녀는 젊은 이탈리아노를 사랑하게 된 중년의 유부녀로 나온다. 로마역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남겨두고 남편과 딸아이에게 돌아가야만 하는 유부녀의 심리를 열연한다.

이 영화에서 제니퍼 존스야말로 20세기 은막의 스타 가운데 가장 뛰어난 내슝과 교태를 가진 스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릴린 먼로의 교태가 뭇남자들에게 향하여 열려있는 것이라면, 제니퍼 존스의 교태는 오직 한사람을 향하여 닫혀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매력적이다.

이 영화 이후 <모정>, <무기야 잘 있거라> 등의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내슝연기는 더욱 더 빛을 발하며 그녀의 자태가 보여주는 정숙성 너머, 여인이 지닌 관능성 속에 그만 빠져들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야릇한 눈빛과 교태가 빛을 발한다.

참고> Portrait Of Jennie

모정이라는 영화

나는 고향이 부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급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시작될 뿐이다. 나의 기억은 서울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 도시에 살면서 때로 황사와 기름가루들로 들뜬 봄바람을 맞으면, 유년의 기억으로 하염없이 내려갈 때가 있다.

어린 나의 동네에서 큰 길로 나가면, 플라터너스가 잎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 경복궁의 서편 도로 였다. 큰 길이라고 하여도 늘 짚차가 도로 이쪽에서 저쪽까지 몇대 달리고, 한참을 기다려야 도라무깡을 두드려 만들었다는 시발 택시가 달콤한 개솔린 냄새를 뿜어내며 시발시발 소리를 내며 우리 앞에 서곤 했다. 건물은 낮아 봄이면 아지랭이가 도로 끝에 늘 보였고, 아지랭이를 가르며 전차가 댕댕거리며 우회전하여 그 길로 들어서곤 했다.

그 봄, 어머니가 정성껏 풀먹여 다려준 인조견 셔츠 속으로 스며들고, 반바지를 입어 허벅지를 간지르던 그 봄바람이 얼마나 부드럽고 깔끔했던가를 기억할 수 있다.

그때 서울의 인구는 삼백만이 채 안되었다.

나에게 <모정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이라는 영화는 과거로 회귀시키는 힘이 있는 영화다. 영화는 그 자체로 현실이며, 하나의 시간의 압축기제이기 때문이다. 조각난 사진들이 1/24초로 시간을 결합하여 새로운 현실과 추억과 몽환으로 이끈다. 챠르륵거리며 보여주는 이야기만 아니라, 현재와 추억의 교량 역할마저 한다. 모정(慕情)은 오랜 시간의 여울 속으로 되돌아간 느낌마저 들도록 해주는 그런 영화이기도 하다.

며칠 전 리뷰로그에 모정이라는 영화를 올리며 보고 싶다고 썼더니, 이웃분 달구님께서 어디에 가면 구할 수 있다고 하여 후닥닥 가서 다운을 받아 놓았다가 밤잠을 줄여가며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이 영화에 나오는 제니퍼 존스를 좋아했다. 그녀의 모습이 동양적이며, <제니의 초상>에서 보여주던 아련한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했다. 나는 <무기여 잘 있거라>, <세계를 그대 품 안에> 등을 보면서 그녀가 예쁘다는 느낌을 갖지는 못했다. 반면 이 영화에서 기자로 나오는 윌리엄 홀든이 남자로서는 참으로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정이라는 영화에 대해서도 그다지 좋았던 기억은 없었다.

홍콩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던 내게 아버지는 모정에 나오던 리펄스 베이를 가 보라고 하셨다. 식구들이 오기 전 홀로 그곳의 백사장에 홀로 앉아 모정을 기억하려고 하여도 해변을 둘러싼 높다란 아파트며, 건물들로 도저히 예전에 보았던 조용한 해변을 떠올릴 수 없었다

서울로 귀임 발령이 나서 되돌아 오기 얼마 전, TV에서 8시에 모정을 한다고 하여 그 시간에 TV를 켰더니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 8시란 시간이 일본의 TV 프로그램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미 영화의 한 시간이 시차 때문에 날라가 버렸고 나는 단 두 컷의 홍콩의 풍광을 볼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본 모정에서는 홍콩의 중심가를 저공으로 활공하는 화면에서 부터 시작한다. 무대는 중국의 공산화와 함께 중국난민이 몰려드는 1949년이지만, 촬영한 시점은 1955년이다. 빅토리아 하버의 서편에서 상환을 지나 쎈트럴과 깜종을 지나는 화면에는 지금의 마천루는 없고 좁아터진 길과 이삼층의 야트막한 창고와 집들로 가득하다. 그리하여 홍콩의 풍광은 옷을 벗은 듯 자연스럽고, 현재의 빅토리아 하버보다 홍콩 구룡 사이가 넓어보였다. 그러니까 약 50년전의 모습인 셈이다.

홍콩은 오묘하여 화려한 마천루가 보이는 그 지점을 떠나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적하며, 때론 50년을 소급해 들어간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아마 그런 풍광들이 영화의 장면 속에 끼어들면서 시간의 여울목을 만들고 과거로 소급해 들어가도록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거친 개혁보다, 과거의 모나드를 함장한 부드러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은, 수십년간 떠나있었던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넓다란 아스팔트가 끝나는 지점 어디엔가에 오래된 당나무나 그늘이 넓은 떡갈나무가 있음으로써, 그 밑에서 잣치기를 했거나 비석치기를 하며 놀았었다는 것과 장에 가신 어머니를 나무그늘 밑에서 달빛이 교교할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을 추억할 수 있음으로써, 고향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으며, 스무발자국을 가면 순심이네 집이며, 해소기침을 내뱉었던 봉구네 아빠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제니퍼 존스는 중국과 영국인 혼혈 여의사인 닥터 한수인으로 나온다. 그녀는 미망인이며, 영국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중국 국적을 가지고 영국의 식민지인 홍콩의 종합병원에서 외과의사로 활동하지만, 중국의 전통을 따르고 숙명에 대한 강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젊은 의학도이면서도 점을 치러 가거나, 미신을 믿는다.

그녀는 병원이사의 집에서 열린 만찬에서 특파원인 마크 엘리어트(윌리엄 홀든분)을 만나게 된다. 마크 엘리어트는 유부남이지만, 한수인은 그와 리펄스 베이로 수영을 가게 된다. 리펄스 베이에 있는 한수인의 친구의 집에서 보이는 홍콩 동편의 풍경은 바다와 섬들이 그려내는 남지나해의 고요함이 담겨져 있다.

그 고요한 정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전에 자신이 미망인이며, 혼혈아이기 때문에 자신을 좋아하면 안된다고 했던 한수인은, 친구의 집을 벗어나 해변에서 자신이 엘리어트를 사랑하며, 모든 것을 그의 뜻에 따르겠다고 한다.

이러한 복종이 굴종처럼 느껴질 지는 몰라도, 영화에 나오는 한수인의 모든 모습에는 깊이를 잴 수 없는 품위가 있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우리가 헐값에 팔아버려 이제는 도저히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동양적 덕목과 자존심을 갈무리하고 있어서 인지도 모른다.

나는 제니퍼 존스의 눈 속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그 아름다움이 뭔가를 이제 간신히 찾아낸 것 같다. 그녀의 눈은 세상에 대한 신비가 가득한 채, 약간의 두려움도 있으며, 행복으로 범벅된 눈빛을 떠올릴 수 있는 여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등을 똑바로 펴고 섬세한 손길로 사랑을 감지해 낼 수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구현해내는 데 탁월한 배우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지도 않으면서도 허리우드의 은막의 찬란함 속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배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수인이 중경으로 올라가 집안의 어른으로 부터 엘리어트와의 혼인을 허락받았지만, 엘리어트는 본처와의 이혼에 실패한 채, 그만 한국동란에 종군기자로 떠난 후, 전장에서 죽고 만다.

병원 뒷산, 그들이 늘 만나고 헤어졌던 나무(아래 사진 참고)에 올라가 그녀는 엘리어트의 영혼이 날아온 듯한 나비를 보고 “우린 무엇 하나 놓지지 않았오. 진실로 아름다운 사랑을 누렸오”라는 그의 마지막 그의 편지를 기억할 때,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의 노래가 나온다.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
It’s the April rose
That only grows in the early Spring
Love is natures way of giving,
A reason to be living,
The golden crown that makes a man, a king
Once on a high and windy hill,
In the morning mist, two lovers kissed
And the world stood still
Then your fingers touched my silent heart
And taught it how to sing
Yes, true love’s a many splendored thing

4월의 장미처럼 초봄에 피어 난, 사랑은 아름다워라. 사랑은 삶에 의미를 주는 자연의 섭리, 범부를 왕으로 만드는 황금의 왕관. 바람부는 높은 언덕에서, 아침 안개 속에 연인이 입맞추네. 세상도 숨을 멈추네. 그대 손이 와닿아, 내 고요한 가슴 노래하네. 진실한 사랑은 아름다워라.

참고>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