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글…

 

사랑에 대한… 라는 나의 글은 불온하다. 불온한 이유는 이해하지도 못하는 자크 라캉(J.Lacan)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엄밀하게 언어적이라고 하지만, 무의식의 바다는 공허하다. 상상의 바다에는 id와 타자와 남근, 그리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결코 기의에 다가갈 수 없는 기표의 뼈가 에쓰이엑쓰로 발광하며 떠다닐 뿐이다.

그러니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은, 상상의 바다에서 건져올려 상징의 뭍의 날카로운 언어로 다시 해부되어 피부와 창자와 뼈와 피와 고름으로 낱낱이 갈라지고, 드디어 사랑이란 요따위 것일 수 밖에 없노라고 선언되는 것이다.

나는 살아있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사랑을 이야기할 뿐이다. 사랑이란… 하고 쭉쭉 이야기를 한 후에 한모금의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사랑이란 단지 아랫도리의 문제일 뿐이죠.”라고 씨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라캉과 프로이드의 id와 타자와 남근이라는 단어에 다른 아름다운 단어로 대치한다면 어떠할까? 라캉에 의하면 기표는 기의와 결합하지 못한 채 끝없이 다른 기표로 표류하는 만큼, id와 타자, 남근이 확고한 의미를 갖고 제 자리에 깃들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나의 글은 불온하며, 무의식처럼 무의미할 뿐이다.

사랑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03

상상의 세계로의 귀환

심리학은 대단한 학문입니다. 아니 항문, 똥구멍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프로이드 등의 싸이코가 만든 항문이지요. 어떻게 리비도의 충동 하나로 온갖 세상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의 책들을 읽고 있으면, 우주에 가득한 모나드들이 함장한 것은 오직 하나, 에쓰이엑쓰로 귀결됩니다. 섹쓰!

이들이 말하는 것은, 변태적이거나 근친상간과 같은 오물들로 가득합니다. 정신분석학 책을 많이 읽다보면, 인간에 대한 이해는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닌 性性說에 빠져들게 됩니다. 해석하자면, 인간은 본래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단지 색골이다. 이 말씀이죠.

이들은 인간의 정의를 이성에 집중시켰던 고전시대에 종언을 고하며, 아랫도리(하부구조)가 대가리(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씨부린 마르크스와 어깨동무하고 20세기로 뛰어듭니다. 한때는 자명했다고 생각되었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외곽에서 포위 섬멸해가면서 밥그릇(나는 쳐 먹는다, 고로 존재한다.)에 기반을 둔 휴머니즘을 이끌어 내거나, 인간은 성적 억압 속에서 분절되어 나온 “타인의 언어 속에서,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나를 빌어 말한다“고 씨부립니다.

나의 머리 속의 생각이 타인의 입벌림에 불과하다니…? 프로이드나 라캉(J.Lacan)이나 이런 작자들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싸이코 임에 틀림없습니다.

인간이 색골이라는 이 위대한 선언은 마침내 섹시를 낳고, 이성 중심의 얼굴에서 마침내 골반과 배꼽 즉 아랫도리로 시선을 돌려놓는데 성공하고 말았습니다. 배꼽 중심 시대에 저같이 배 나온 사람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막가는 놈으로 취급됩니다.

저와 같은 막가파가 자기애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이 가당치는 않지만, 자아도취니 자기애로 해석되는 나르시즘은 지금 제가 씨부리고 있는 사랑을 설명하기에 유용한 도구임은 틀림없습니다.

따분하시겠지만 좀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죠.

나르시즘에 들어가기 이전에 상징계, 상상계라는 유식이 풀풀 나는 것에 대하여 먼저 말하기로 하죠. 왜 이런 아리송한 단어가 라캉(J.Lacan)에 의해서 제출되었냐면, 인간의 좁아터진 머리로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고, 순간 순간에 폭발적으로 다가오는 경험들을 의식 속에 담아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폭죽처럼 명멸하는 경험들을 언어라는 상징으로 추상화(단순화 : 압축)하여 우리의 의식 속에 저장한다고 합니다.

상징계란 우리가 진정한 세계를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언어로 조작된 세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의미죠. 이 찬란한 세상이 단지 언어만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칩시다.

언어란 본래 실체가 없으며, 어떤 미친 놈이 꽃이라고 했기 때문에 꽃이지, 꽃이 반드시 꽃이어야 할 이유란 없습니다. 이미 <꽃>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것을 <개>라고 부르면, 세상은 정말 ‘개’같이 됩니다.

꽃이 개라면, 이름을 상실한 개는 <달>로 불려질 수도 있으며, 달은 <똥>이 되어야 하는 등 세상의 모든 사물과 개념들은 무한소급에 가까운 이름의 변화를 겪어야 하는 등 아비규환 상태에 빠져들게 되고, <꽃같이 어여쁜 당신이여! 저 밝은 달을 보아요.>은 <개같이 어여쁜 당신이여! 자 밝은 똥을 보아요.>가 됩니다. 핵폭탄이 아니라도, 꽃이 개라는 사소한 음운변화 하나만으로도 찬란한 인류문명을 붕괴시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의적이고 나약한 언어를 지키기 위하여 사회는 강력한 율법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개들에게는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사람에게는 살인보다 더 큰 죄가 되는 <근친상간>을 예로 들어봅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을 했을 때, 어머니는 아내이며, 아버지는 아내의 전남편, 딸은 배다른 누이, 딸이 낳은 아들은 배가 다른 지 같은 지 모르는 헛갈린 동생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이디푸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지, 그의 어머니와 딸, 사위 그리고 손자까지 확대하여 이들의 관계를 따진다면 아마 해골이 빠개질 것입니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하늘이시여>에서 자경이 시어머니가 친엄마 임을 알았을 때, 실어증에 빠졌던 것도 이와 같은 언어의 꼬임, 남편과 오빠와 같이 <다른 것>이 <같은 것>이 되는 바벨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상징계에 들어선다는 것은 이렇게 나약한 언어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언어에는 꽃이 꽃이어야 할 아무런 인과성도 필연성도 없습니다. 우리는 언어의 세계에 진입함으로써 타인의 입벌림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욕망 속에 구속되어 살아갑니다.

나는 나로서 사고하고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 동생의 형, 회사의 직원, 저기 걸어가는 멍청한 놈, 아내의 남편, 자식들의 아버지, 여인이라는 익명으로 재미없는 글이나 올리는 이상한 사람,… 기타 등등으로 살아갑니다.

이 껍질들을 하나하나 벗겨나가면 <나>란 공허할 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나가센 비구는 메난드로스 왕의 앞에서 “왕이시여! 당신 앞의 이 나가센은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언어가 형성되기 이전에는 어떠했겠느냐는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때의 세상을 상상계라고 합니다.

 이 상상계가 어떤 상태인지 추상해낼 수 없습니다. 단지 언어가 없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특징은 분절이며, 이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변별입니다.

<님>과 <놈>을 변별해 내지 못한다면, 당장 내일 부로 회사에서 쫓겨납니다. 퇴직금 정도는 주겠죠.

언어가 없는 상상계에서 아기는 경험할 수는 있어도 사물들의 차이를 변별해 낼 수 없다고 칩시다. 아기에게 비친 세상은 혼돈인 동시에 하나입니다. 그 상태는 몽롱하며 꿈과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모든 경험이 흘러드는 하나의 지점이 있습니다.

기거나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들은 자기 몸이 조각나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그가 본 것은 부분적인 자기 팔이나 다리, 몸통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해체된 자신의 몸에 대한 공포는 후에 인형을 찢어 조각내는 등의 폭력성과 일정의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합니다. 아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몹시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조각나 있는 줄 알고 있던 자신의 몸이 통합된 하나라는, 기적같은 사실과 조우했기 때문입니다.

나르시즘이란 거울을 통하여 해체되어 있던 자신을 조립하는 과정으로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아기는 아직 객관세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아기를 밀쳐놓고 그 아기가 넘어지면 자기가 넘어졌다고 웁니다. 차이를 변별할 수 없는 아기는 주체는 있되, 객체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세계가 자기이며 자기가 세계입니다. 아기는 상상(꿈) 속에 빠져있을 뿐 입니다. 그리고 아기는 자신을 엄마와 동일시하며, 자신이 엄마에게는 없는 팔루스(Pallus: 남근)라고 상상합니다. 남근이 됨으로써 엄마에게서 사랑을 받는다고 꿈꾸며, 엄마와 자신의 대립없는 이자적 관계 속에서 삽니다.

이때 “나야말로 엄마의 진정한 남근이다. 네가 엄마의 남근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네 고추를 잘라버리겠다.” 소리치며 아버지가 나타나며, 거세의 공포 속에서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삼자 관계)이라는 권위 아래 굴복(오이디푸스 콤플렉스)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이름이란 금지의 율법과 사회라는 객관세계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 상징세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아기는 엄마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과 자신이 남근이 아니며, 하나의 사람이라는 것과 세상은 하나가 아니며, 다양한 명칭들로 조각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 아기는 갖은 변태의 곡절을 지나야만 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변태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는 심리학이 지닌 신화적 표현에 대하여 가타부타 하는 논의를 초월해야 합니다.

철학은 견고한 개념과 논리를 통하여 학적 토대를 형성합니다. 반면 심리학은 개념이나 논리로 도달할 수 없는 감정이나 심리상태, 잠재의식으로 내려가려는 노력입니다. 거기에는 사실 상 언어가 지닌 개념은 무력합니다. 그래서 꿈이나 실수 등에서 나타나는 상징이나 비비꼬임을 가지고 억압(물론 성적억압이 되겠지요)이나 원억압을 찾아가는 항해입니다. 이것은 연금술과 같습니다. 온갖 잡된 것을 제거하거나 순화시키면 진금이 나타난다는 그 연금술 말입니다. 그래서 칼 구스타프 융과 같은 심리학자는 서양의 연금술 뿐 아니라 여동빈의 태을금화종지와 같은 도교의 내단학에 대하여도 엄청나게 연구를 했습니다.

이 나르시스적 이자관계에 대한 상상(꿈)은 지워지지 않고 자기정체성의 성립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춘기나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거울을 보며, 멋진 배우의 얼굴을 흉내내거나, 갖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해체하고 다시 재조립해나가면서 커갑니다.

이 과정은 늙어죽을 때까지 계속되는데,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주병, 왕자병과 같은 거죠. 저 같은 친구도 왕자병 증세는 조금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엄마의 팔루스이기를 금지당한 남자들은 그 누군가의 남근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근을 결여한 여자들은 팔루스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모성성으로 대변되는지 몰라도, 자신의 아기든 아버지의 이름이든 남편이든 남자친구이든 뭐든 말입니다.

신화에서 나르시스가 연못에서 본 영상은 자신의 영상이 아니라, 자신이 될 수 없는 영원한 타자의 꿈일 뿐 입니다.

사랑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쳐 언어라는 상징세계에 진입한 사람들이 아버지의 이름(절대 타자)으로 금지되었던 팔루스로 귀환이며, 그 팔루스의 받아들임입니다. 이를 통하여 사랑하는 남녀는 다시 엄마와 아기의 이자관계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본질적으로 황량한 상징의 세계와 사랑받고 있다는 상상의 꿈이 충돌하는 지점이자, 아버지의 이름(외간남자를 포함한 기타 등등)이라는 절대 타자를 배제하고, 그녀의 팔루스가 되거나, 결여된 팔루스와 하나가 되려는, 상상의 세계로 회귀하려는 부단한 노력입니다.

무지하게 어렵죠? 항상 학문(항문?)은 어려운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