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책의 원본,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은 2001년 9.11 사태가 있은 다음 해인 2002년에 쓰여졌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고 말한다. 실재의 사막을 그린 매트릭스는 1999.05.15일 개봉되었다. 모피어스(Morpheus) 즉 모르페우스는 꿈의 신들(오네이로이) 중 하나를 가리킨다. 현실(Reality)로 네오를 초대한 자가 ‘꿈의 신’의 이름을 가졌다니… 하지만 매트릭스에서 The Real(실재)이란 꿈보다 더한 악몽이며, 비록 네오가  꿈(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이라는 가위에 눌리지만, 꿈을 꿈으로 인식하는 대오(大悟)의 끝에 네오는 초절정 무공의 고수로 거듭난다. 하지만 꿈 속에서 아무리 배가 터지게 먹었다고 해도 깨어나면 허기가 지는 것이 진짜 리얼이다. 불구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네오 일당이 끊임없이 꿈 속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싯점인 1999년, 가상 속에 내포된 현실을 매트릭스가 보여주었다면, 21세기가 시작하는 2001년 9월 11일, 08:46분과 09:03분(KST로는 21:46과 10:03) 꺼먼 점과 같은 비행기 두 대가 각각 세계무역센터 빌딩의 북쪽 건물과 남쪽 건물을 들이받았고, 한시간이 조금 지나자 110층에 달하는 건물은 폭삭 주저앉았다.

지젝은 ‘실재의 사막…’라는 책에서, 이 사건 이후 미국의 주도로 자행된 ‘테러와의 전쟁’의 실체에 대해서 난해한(변증법적이라서 그럴지 모르겠지만) 해부를 해나가지만, 나에게 이 장면은 110층 높이로부터 그라운드 제로로 추락한 근대이성, 코기토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비행기 내부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테러리스트들의 칼에 난자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죽을 것이 뻔한데도 그를 무릎쓰고 세계무역센터 빌딩으로 승객들과 함께 가미가제식으로 돌진, 쾅! 한다는, 이성의 합리성에 입각한다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사건이 한번도 아닌 두번, 그리고 부록으로 워싱턴의 펜타곤까지 추돌하는 사태를 내 눈으로 목도한 후, 이성이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승객들과 조종사, 그리고 비행기와 승객의 안전은 물론 지상의 안전까지 책임져야 하는 기장의 이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면도칼 하나에도 이성을 잃을 수 밖에 없는 나약한 나의 이성에 대한 목도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충격은 세계의 주축국인 미국의 권위가 핵도 총도 아니고 사소한 면도칼 하나에 바닥으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바늘 한 개로도 어마어마한 덩치의 코끼리가 죽을 수 있다는 논리의 냉엄함을 9.11은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실재의 사막,,,’은 내 생각이 그친 그 지점에서 조금 더 나아간다. 즉 미국이 바닥에 떨어진 자신들의 권위를 재구축하기 위해 벌인 것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이고, 그 실체를 찾아가는 지젝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발라먹을 살이 십년이 지난 이 싯점에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나의 감상이다.

지젝은 “어째서 세계무역센터의 재난이, 이를테면 1994년 르완다에서 벌어진 투트시족의 후투족 대량학살 사건보다 조금이라도 더 특별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191)고 반문한다. 이들이 무시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르완다의 투트시족이나. 후투족은 원조나 국제기구 혹은 미국이 개입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호모 사케르(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나 마음대로 죽일 수 있지만 대신에 신전에 제물로 바칠 수 조차 없는 가치없는 존재)에 속한다. 굶어죽으나 학살당하여 죽으나 매한가지인 값어치 없는 종족이라는 인식 탓인지도 모른다. 110층에 달하는 세계무역센터의 희생자들은 말끔한 슈트에 넥타이를 매고 근무를 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선봉, 후투족과는 달리 가족들과 함께 미국의 풍요와 행복,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만끽하며 살아있어야 마땅한 ‘호모 아메리카노’였던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과거의 냉전과 같은 “주권 국가들끼리의 규제된 분쟁이라는 옛날 의미의 전쟁은 이제 없다”고 한다. 하나는 르완다나 발칸반도에서 보듯 “호모 사케르 그룹들 간의 투쟁으로, 이는 보편 인권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며, 진정한 전쟁으로 간주되지 않고 서구 세력의 ‘인도적이고 평화주의적인’ 개입이 요구”되거나, “미국이나 새로운 세계질서를 대표하는 다른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이 경우 역시 진정한 전쟁이 아닌, ‘비합법적 전투원’들이 보편적 질서의 세력에 범죄적으로 저항하는 것으로 간주”(134)된다. 여기서 ‘비합법적인 전투원’이란 합법적이 아니기에 ‘관타나모에 수용된 테러용의자들에 대한 미군의 잔혹 행위들’에서 보았듯 ‘제네바 협정에 따른 포로의 대우’를 해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지젝은 “힘을 내어, 도처에서 악을 지각하는 결백한 시선 그 자체에도 (역시) 惡이 존재한다는 헤겔의 유명한 격언을 이런 시선에 적용시켜야 한다.”(81)고 촉구한다. 미국의 대테러 군사작전의 첫 번째 암호명 ‘무한한 정의’는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지원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가차없이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정확히 헤겔의 ‘惡 무한’에 해당하기에 그 정의상 결코 끝날 수 없고. 임무는 결코 완수될 수 없으며, 언제나 다른 테러의 위협이 존재할 것이다”(82)고 예단한다. 책이 쓰여진 지 십년 이상 흐르고, 빈 라덴이 사살되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처형 당하고, 탈레반이 근거를 잃고,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지금도 ‘무한한 정의’는 유효하며 광란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냉전시대에 적의 형상이 되어주었던 공산국가들이 붕괴한 이후 “9.11 사태가 일어나고 나서야 이 상상력은 이슬람 근본주의자 그 자체인 오사마 빈 라덴의 이미지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조직망 알카에다의 이미지를 구축해냄으로써 그 힘을 되찾게 되었다”(154)고 하며, “敵은 더 이상 ‘惡의 제국’, 즉 영토를 점유한 또 다른 실체(국가나 국가들의 연합)가 아니라, … 전 세계적 조직망”이라고 하며 “국가간의 관계를 조정해왔던 국제법이 종말을 맞이”(155)했다고 한다.

지젝은 20세기가 스너프 포르노 등으로 대변될 정도로 ‘사물 그 자체’를 전달하는 것, 갈망하던 목표를 직접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서도 “궁극적인 실재라는 괴물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외관이다. 이 ‘실재라는 괴물’은 그 존재를 통해 우리의 상징적 세계의 일관성을 보장하며, 따라서 그 구성요소인 비일관성(‘적대’)과의 대면을 회피하게 해주는 환영적 유령일 뿐”(49)이라고 한다. 늘 실패한 정권이 자신들의 존립 수단, 혹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공산주의’, ‘테러리스트’,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궁극적인 실재를 내세웠지만, 그 껍질을 벗겨보면 거기에는 뿔도, 날카로운 잇빨도, 빨갛게 피칠갑을 한 외양도 없었다. 공산주의니 빨갱이니 하는 성마른 목소리 그 자체야말로 가공스런 폭력이었고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힘이었던 것이다.

지젝은 또 “진정으로 어떤 사건을 잊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내어 그것을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는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유념해야 할 것은 존재existence의 반대가 비존재nonexistence가 아니라 존속insistence이라는 점이다”(38)고 한다.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했을 경우, 우리의 과거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역사 속의 한장으로 기록되고 우리의 뇌리에선 사라진다.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경우, 청산하지 못했다는 비존재nonexistence가 끊임없이 뇌리에 남아(insistence)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덮어버린 과거의 호명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장준하 선생 사건처럼 날조된 채 썩고 있는 과거사의 진상들을 소상히 밝혀내야만, 우리는 왜곡된 망령들을 불러내 진정한 진혼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제주 4.3사건’에서 ‘용산4구역 남일당 화재 사건’에 이르기까지 낱낱히 말이다.

지젝은 자유당 시절부터 박정희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는 논리를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테러와의 전쟁에 처해 전 세계적 위기상태라는 것이 오늘날의 수사법이며, 이는 법적인 권리와 다른 권리에 대한 중단을 점점 더 합법화하고 있지 않은가?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의 자유를 우리를 겨누는 무기로 사용한다”는 존 애쉬크로포트의 주장에서 불길한 부분은 물론 그 말의 명백한 암시적 결론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방어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결론 말이다.”(150) 바로 이것이 위기의 정체이며 유신으로 넘어가는 빌미이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한민국 호(號)의 승객들을 구해냈다”는 전두환의 논리가 아니었던가?

미국이 은밀하게 고문을 하면서도 핵 테러에서 수백만명의 목숨를 살리기 위해서 불가피하다며 “고문을 합법적인 논쟁거리로 만드는 일은, 고문을 옹호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전제와 선택의 배경을 뒤바꿔놓는다”(146)고 하며, 합법화될 경우 고문의 범위는 대 테러나 국가보위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이혼한 배우자에게서 아이를 납치한 부모를 고문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며, 대부분의 고문 목적은 절체절명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적을 정신적으로 무너뜨리거나 처벌하기 위해서 혹은 주민들에게 겁을 주어 복종시키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잘못을 무마하기 위한 거짓진술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며, 이것이 바로 ‘남영동’이 5공 때 존재해야만 했던 진정한 이유다.

“법의 층위에서 우리는 시민이자 법적 주체로 취급받지만, 법의 외설적인 초자아적 보충물의 층위, 이 텅 빈 무조건적 법의 층위에서 우리는 호모 사케르로 취급받는다”고 지젝은 말하면서 “명백한 이데올로기적 규칙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그 밑에 깔린 외설적인 불문율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해 볼 수 있는 것이다”(50)고 하지만 어려울 것 같다. 외설적인 측면이 오히려 더 보강되고 심화되는 것만 같다. 해방 이후, 제주 4.3사건에서 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 그 현장에 있었던 국민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유명을 달리한 전직 대통령의 사례를 보면, 법의 외설적 측면들이 어떻게 강화되고 있는가를 우리는 충분히 목도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수결이나 민주적 절차가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지젝은 준엄하게 말한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한 이후 드골은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는데, 드골의 이런 제스처에는 ‘민주적 정당화’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민주적 정당화’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드골의 편이었고, 그는 실제로 프랑스를 대표하여, 프랑스 국민 ‘그 자체’를 대표하여 말하고 있었다. 이 사례 또한 우리가 궁극적인 민주주의적 비난에 대해 대답할 수 있도록 해준다… 1940년 프랑스의 사례가 (특히 잘) 보여주듯, 민주주의 그 자체는 그러한 보증을 제공해줄 수 없다. 과잉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212)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뽑힌 대통령이라고 해서 그의 행동과 결정이 반드시 국민 ‘그 자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드골의 예에서 보듯이, 진리와 정의야 말로 국민 ‘그 자체’를 대표한다.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뽑혔다고, 자신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국민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 때, 대통령의 뜻과 달리하는 국민들이야말로 모두 ‘호모 사케르’라고 하는 선언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지젝의 글을 읽으며…

요즘 슬라보예 지젝을 읽고 있다. 지젝은 재미있지만 형편없는 번역 때문에 어렵다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때때로 지젝이 글 또한 어렵다.

법의 외설적 보충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빌려왔겠지만 ‘초자아에 의한 법의 외설적 보충’이라는 말이 나온다. 책을 읽다 말고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고 검색을 해보니 바로 영화 ‘부러진 화살’의 해설인 셈이다.

우선 ‘법의 외설적 보충’이란 우리는 법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며 우리를 보호해주며 정의롭다고 생각하며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그런데 어느 날 법원이나 검찰에서 소환을 당하면, 그 순간 법에 대하여 갖고 있던 통념은 그 순간 와장창 깨지고 법이 결코 정의롭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추잡하고 더러운(즉 외설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법원이나 검찰에 혹시 아는 사람 없느냐고 학연, 혈연, 지연을 총동원할 뿐 아니라 촌지와 선물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다음의 ‘초자아’란 팔루스, 즉 아버지, 신 등등이 되겠지만, 여기서는 판사들이 형성하는 것인 만큼 바로 ‘사법부’이다, 직장인에게는 ‘회사’ 조폭에게는 ‘조직’이 되듯.

김교수의 박판사에 대한 석궁 테러는 박판사가 석궁으로 피습되었든 안되었든 사법부에 대한 테러라고 본 신판사나 이판사에게는 법의 정의나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김교수가 옳은 탓에, 사법부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김교수는 유죄가 되어야 하며, 유죄인 탓에 김교수는 잘못이고 사법부는 옳은 것이 된다. 즉 초자아의 과잉에 의한 외설, 유죄로 끝나게 되어있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김교수는 수학적 질서에 입각하여 이러한 법의 외설적인 측면에 대하여 보충할 생각은 않고, 사법부에 대하여 법대로 하자고 고집을 피운다. 그런 탓에 김교수는 적진에서도 판사들을 코너에 몰아놓고 훅과 어퍼컷 등을 화려하게 쏘아붙지만 결론은 적들이 판사이기 때문에 판정패로 진다.

다시 한번 부러진 화살을 보아야겠다.

insist

“존재의 반대가 비존재가 아니라 존속이라는 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계속해서 존속하며, 존재하기 위해 노력한다.”(실제의 사막… 37~38쪽)는 지젝의 말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을 경우(존재) 그 사랑은 흘러가버린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경우(비존재) 그 말을 하지 못했다는 후회로 존속한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한 사랑은 흘러가버리지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사랑은 멈춰서서 결국 추억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우리는 진정으로 어떤 사건을 잊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내어 그것을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는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지젝 실제의 사막… 37쪽)는 말은 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

우리가 과거사(일제와 대한민국사)의 더러운 진상을 제대로 파헤쳐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잊혀지지 않은 채, 트라우마로 우리나라를 좀 먹고 있다는 것은 물론, 이른바 추억이라고 하는 것들이란 사실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어름하게 받아들인 상상의 현실에 불과했기 때문에 말소시키지 못한 기억일 뿐이라는 것을 설명해준다.

“악한 자가 증오하는 것은 善이 아니다”라는 노발리스의 진술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즉 악한 자가 증오하는 것 또한 惡이라는 점이며, 문제는 惡이 어떻게 정의되느냐이며, 그 惡에 대응하는 형식에 따라 악한 자와 선한 자가 갈라진다는 점이다. 즉 나는 절대로 내가 늘 생각하는 선한 존재, 온당한 편에 입각해 있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인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늘 정의와 온당한 편에 서 있기 위하여 고민하고 반성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Homo Sacer

호모 사케르, 이는 ‘벌거벗은 생명’을 가리킨다. 여기서 벌거벗었다는 의미는 주민등록증이 말소되어 살아있되, 국가의 기록 상으로는 부재하는 상태 혹은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을 가리킨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있은 이후, 관타나모 기지에 포로들이 수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각종 고문과 린치 등으로 인권 문제가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이에 대하여 2004년 중반 NBC에서 다른 관타나모 포로의 운명에 대한 대담에서 ‘그들은 폭격이 놓친 사람들’로 의당 죽어야 했지만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들의 처리 문제를 비난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즉 이들은 폭격으로 이미 죽었어야 하는 생명들로 생존권을 박탈당한 자, 즉 호모 사케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미 인권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고 미국의 이들에 대한 대우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주민등록증이 말소된 자(존재하지 않는 자)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법원은 어떻게 선고를 할 것이냐는 것이다. 이 경우 다시 주민등록증을 살리고 난 후 법적 절차를 밟던지 아니면 유보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용산참사에서 불타 ‘죽은 자들’은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일까? 그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호모 사케르’로 구분되지 않는 생존권을 지닌 자라면, 이들을 죽인 공권력은 법적으로 면책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들이 ‘호모 사케르’로 공권력에 의해 함부로 처분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호모 사케르’는 즉 ‘안 죽은 사람’은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