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어서 읽기

책을 읽을 때 한권만 읽는 것이 아니라 여러 책을 섞어서 야금야금 읽는다. 그러다가 실증나면 한권 쯤은 읽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때로는 도시락 만 빼고 고등학생의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처럼 잡다한 책들로 가방이 무겁기도 하다.

간혹 철학책을 읽는 때가 있는 데, 나의 이해력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원전을 독파해날 수 없는 관계 상 늘 해설서에 머무르게 되고, 해설서조차 감당이 안되어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게다가 그 책들을 읽고 나면 마지막 장을 덮은 지 오분이 지나면 모든 내용이 하얗게 포맷이 되면서 잠재의식(막연한 기대감으로 망각 대신 잠재의식이라고 하자)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다.

이런 책을 읽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거기에는 약간의 경멸도 섞여 있다)을 짖는 데, 나 역시 왜 이따위 책을 읽고 있는 지 당췌 이해가 안되며 여러가지 의문에 휩쌓이게 된다.

누가 이 책을 사서 읽는가? 그들은 과연 이 책을 읽고 요해가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인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얻어들일 수 있는 이익은 무엇인가? 과연 이 해설서를 쓴 사람은 원전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씨부리고 있는 것인가? 등.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늘 <이렇게 어렵게 써야만 하는 이유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가>이다.

그러나 소설을 한편 읽어도 어렵기는 매 한가지이다. 20페이지 정도만 넘어가면 을순이 엄마의 남편이 병삼이 인지 아니면 기철이 인지 아득해지고,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그 놈의 햇빛 때문에 총을 쏘았다는 타당성에 대하여 도출해낼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며, 아홉켤레의 구두에 光을 냄으로써 삶의 의의를 찾아가는 아무개씨를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설 속을 관통하는 삶과 역사의 맥락과 주인공의 의식을 간헐적으로 나마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 내가 경험한 한에서는 어느 소설을 읽고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를 물었을 때, 몇몇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똑같은 출판사의 <해제>를 읽고서 그 내용을 씨부렸다는 말 밖에 안된다. 한 골목에서 삼십년간 산 K씨에 대한 한 이웃들의 이야기가 중구난방, 천차만별인 것처럼, 인도양에 몸을 던진 이명준의 죽음에 대해서는 작가인 최인훈씨 조차 왜 죽었는가에 대한 석명서를 <광장>의 한쪽 귀퉁이에 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조차도 주인공을 창조했을 망정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창조주로서 그를 죽음으로 몰 수는 있을지라도…

그러니까 쓰는 자의 의도와 읽는 자의 받아들임은 딱 맞아 떨어질 수는 없다.

질 뒬뤼즈에 대한 해설서는 왜 난해한 철학서적을 읽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하여, 오래간만에 그래도 간혹은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질 뒬뤼즈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해설자인 클레어 콜브룩의 시야가 어느 정도 질 뒬뤼즈의 핵심을 관통했는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해설 속에는 자신의 경험과 그 구조 속에서 상식적으로 살아가면서도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은 근대철학적 도구에 볼모잡혀 있던 우리들에게 들뤼즈는 차이와 생성을 주장하며 개념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들뤼즈가 터치하는 주제는 광범위하며, 상당히 영리하게 현상학과 구조주의가 가진 난점들을 극복해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이 수도원에서 묵상과 수행을 통하여 이데아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수적 세계와 자연철학, 그리고 소크라테스적인 진리와 덕성의 절묘한 결합지점으로 이데아를 제작한 것이라면, 서구의 철학은 명상적이고 수행적이기 보다 오히려 영리하며 절묘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철학은 머리 좋은 사람들이 공부해야 할 일이지, 나같은 놈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닌 것만 같다. 그러나 한 시대의 사고를 철학이 창도하거나 해석한다는 측면에서 주류 철학이 좀더 쉽게 일반인에게 스밀 수 있도록 학자들은 철학자들의 책을 잘근잘근 씹어 일반인이 소화할 수 있는 교양으로서의 철학을 던져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