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도서관

이 글은 계속 쓰여지는 글이다. 하염없이 부풀어 오르고 혼미하여 사악함과 정의에 대한 애매모호함 속에서 나는 방황하고 있다. 방황하는 지점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알 수 없다.

이 무너진 도서관은 소설이 아니다. 사실은 바벨의 도서관일지도 모른다. 이 글에 달린 하이퍼링크는 꿈과 허위와 또 다른 사실들과 버려진 믿음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질 것이다.

무너진 도서관

– 어느 벙어리의 독백에서 –

———— 前說 ———–

예수가 죽고 사도의 시기가 도래한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아는 예수를 가슴에 품고서 산과 광야를 건너 제국의 열방으로 흩어졌다. 요한이 환상에 취하고 도마가 예수의 상채기를 손으로 만져보아야 한다는 지식을 구하는 그노시스(영지)의 사람이라면, 어부인 베드로는 아는 것은 없어도 가슴으로 살아가는 피스티스(믿음)의 사람이었으며, 바울은 예수를 알 지 못한 자였다. 사막과 광야에 둘러싸인 소아시아에는 오시리스의 무당과 비학의 제의, 플로티누스의 철학과 바빌론의 수비학과 사제의 말씀이 혼효되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엮어서 신에게로 가고자 했다. 광야에 흩어져 때론 사악한 주문을 외우거나 진리에 다다르기 위하여 묵상과 고행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진리 또는 마법에 취하여 은둔의 길을 택하였다. 이것이 그노시스의 길이었다. 진리를 위해서 어떠한 도그마도 권위도 인정할 수가 없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깨달은 것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의 말씀과 비학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섞어 무수한 자료들을 만들어 냈다. 반면 베드로는 서쪽, 제국의 심장부로 갔다. 그에게는 강렬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믿음은 세월을 헤쳐나가고 신도들에게 펼쳐지기에 너무나 나약하였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교리의 체계를 세우고 강력한 도그마를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생겼다. 교회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으나 세월이 지나자 믿음도 진리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교회를 통한 세속의 권위가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강력한 조직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광야에서 진리를 안다는 자들이 와서 미묘한 언어로 침 뱉고 자신들의 권위를 훼멸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날 공의회를 소집하고서 신은 알 수 없노라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 신에 다가갈 수 없으며 다만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럼으로써 자신들마저 세속의 인간이 되었다. 사제들에게는 세속적인 권위 외에 추구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죄, 음욕, 지옥, 배신, 저주 등등 온갖 사악한 단어를 섞어 복음서와 경전을 만들고 이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소아시아를 떠돌던 영지주의의 망령이 거짓말처럼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문서마저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로마제국이 사라지고 교회의 권위마저 사라지고 제삼제국이 사라졌다. 그리고 전설 속에 떠돌던 영지주의의 봉인이 열렸다. 바로 나그 함마디(Nag Hammadi) 문고이다.

In Hoc Signo Vinces

우란테골, 광야는 서북쪽으로 지평선을 그리다가 비아스몬 산맥에 부딪혀 탄식한다. 불모의 땅 위에는 오로지 빛과 바람의 울부짖음만이 스쳐 지난다. 외지인들은 이카텐 반도의 남쪽 이 곳에 와서 절망한다. 황야가 끝나는 곳, 야트막한 언덕 위의 마을을 보면 더 이상 나갈 길도 지친 삶의 이유도 찾지 못하는 이 곳에서 사람들은 창을 북쪽으로 내고 살아간다. 창에서 내려다 보는 광야는 항상 절망보다 강렬한 빛의 광휘와 바람의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휩쌓여 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광야를 내려다 보며 하루하루를 이어간다.

마을 사람들의 입을 빌자면 우리는 침묵의 수도사들이다. 우리의 침묵과 운명은 이미 천수백년 전 호교론자들이 믿음(피스티스)의 이름 아래 광야에 흩어져 있던 사악한 지식의 자식(그노시스)들을 피의 바다로 몰아넣고 거짓된 자료들을 불길 속으로 던져넣을 때 결정되었다. 젊은 마키비온티는 스승의 명에 따라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자료들을 수집, 광야가 끝나는 곳인 이 곳에 보관했다. 여기가 세계의 끝이었고 그에게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는 지 모른다. 그는 이곳을 봉인하고 친구이자 진리를 이끌 이욜테를 찾아갔으나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마키비온티는 진리가 끝난 것을 탄식했다. 신은 이욜테를 죽임으로써 드디어 예언의 시대를 종지부 찍고 사람 스스로 신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을 차단했던 것이다. 또한 잉태한 아내와 현자였던 스승의 죽음에 절망했다. 그는 지친 몸과 분노에 들뜬 영혼을 끌고 이 곳 광야에 돌아와 신을 저주했다. 허기와 밤의 찬 이슬 속에 차라리 광인이 되고자 하였다. 그는 눈을 뜨고서도 꿈을 꾸었으며 잠을 자면서도 분노하였다. 그는 봉인된 서고의 주위와 광야, 비아스몬 산을 방황하던 어느 날 허기와 피로에 지쳐 쓰러졌다. 그리고 그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는 명료한 의식으로 모든 황무지와 연봉들과 광막한 공간이 현재 속으로 함몰되고 각 세월의 시점들이 여기에 응축되는 것을 보았다. 그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더 이상 꿈꾼 자도 깨어난 자도 없었다. 그는 그렇게 깨우침을 얻음으로써 죽은 이욜테의 영혼이 되었고 이미 사랑과 죽음, 분노와 절망,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지금 여기 속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봉인을 풀고 교단을 세웠다.

그는 새로운 진리가 없는 만큼 자신의 말을 세상에 더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단지 수호자를 두어 정법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한편, 역사와 진실을 위하여 파수꾼을 두었다.

나는 파수꾼이다. 밖의 세계는 뜨겁게 불타고 있는 데 나의 세계는 지극히 단순하고 차갑다. 나에게 부과된 임무는 침묵. 지난 삼십년 간 침묵해 왔다. 나이 스물다섯에 나는 교단에 들어왔다. 침묵은 참으로 힘든 시련이었다. 첫 하루, 침묵의 고통은 그 후 일주일 침묵의 무게였고 일주일은 한달과 일년의 무게. 말하지 못하는 혀는 끊임없는 두통으로 이어지더니 일년이 지나자 머리는 공허해졌다. 머리 속을 괴롭히던 무수한 말들이 고독과 침묵의 대양, 심연 속으로 흘러내려 갔다. 간혹 그 심연의 바닥에서 기억들이 근육을 드러내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 기억 속에는 분노와 젊은이의 열정과 욕구, 때론 밀도 깊은 정액 내음 같은 것이 나타나 뇌수 속에 비린내가 넘치도록 했다. 간헐적인 기억의 표류 속에서 혼절하거나 몸살을 알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드디어 수호자가 와서 내게 명했다, 이제 말을 하라고. 그러나 말을 할 수 없었다. 나의 혀는 마비되었고 두개골 속 언어를 통제하는 신경들은 이미 고사해버렸던 것이다.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나는 멈춰버린 혀를 느끼면서 절망했다. 그러나 혀가 멈추어버리자 인생은 단순해졌다. 침묵의 벽이 나를 보호하고, 세속의 욕망이 지난 세월의 고통과 혼절의 길 속에서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수호자는 진실의 봉인을 풀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봉인을 풀고 자료를 보았다. 그러나 오년동안의 침묵은 글조차 읽지 못하게 했다. 혀의 움직임이 없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침묵 속에서 백치가 되었던 것이다. 리듬이 없이 널부러져 있는 글자들. 글자들이 눈 앞에서 죽은 채 있었다. 글자들을 부활시켜야 했다. 오년동안의 칩거를 풀고 마을 뒷산에 올라 하염없이 세상을 보았다. 시장 골목에서 사람들이 수다를 떨거나 서로 미친 듯이 싸우는 모습,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연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텅 빈 머리로 모든 것을 보고자 했다. 때론 머리 속에 아무 상념도 떠오르지 않는 데 눈에서는 눈물이 났다. 가슴은 가냘픈 꽃잎처럼 가벼운 미풍에 흐느낀다. 저녁 짓는 냄새에도 눈물이 났고 손등 위에 떨어지는 눈송이에 환희로 떨고 있었다. 머리가 멈추자 가슴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떨리면 몸이 따라 춤췄다. 나는 벙어리요, 백치이자 광인이었다. 슬픔과 행복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제 말할 필요도 욕망도 없었고 세상을 그 자리에서 보고만 있었다.

무위의 세월이 지나자 수호자가 말했다. 당신은 파수꾼이요. 이제 당신의 자리로 돌아갈 때가 됐습니다. 나는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이미 전임 파수꾼은 늙어 자리를 내게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 또한 벙어리였으나 그의 얼굴에는 진리의 한쪽 구석을 아는 듯한 미소가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자료를 보거나 뭔가를 쓰거나 했다. 나는 점차 읽는 기능을 회복하였는 데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기 시작했다. 가슴은 진리와 허위를 명료하게 분간해 냈다. 경전을 읽을 때 진리는 뚜렷한 에너지를 가지고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고 열광과 환희 또는 절망과 비탄으로 몰고 갔다. 분명 이성의 작용에 의하여 읽고 판단하지만 마음은 허위와 진실의 에너지량을 측정해냈다.

우리는 함께 정원을 거닐거나 산보를 했다. 둘 다 벙어리기에 한마디도 나누지는 못했으나 우리의 우정은 깊어 갔다. 내가 웃으면 그도 웃었고 내가 아프면 그도 아파했다. 우리는 서로의 가슴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따뜻한 미소, 그리고 차분한 발걸음, 그의 웃음, 얼굴의 주름들. 이런 것들은 조화와 평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나 또한 그와 함께 침묵의 심연을 고요히 흐르는 하모니에 도취하였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단의 권고사항대로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교단은 엄청난 자료를 보관하고 있었으며 그 문헌은 최근에 공개된 쿰란(Qumran)이나 나그 함마디(Nag Hammadi)의 문고보다 방대했다. 케린투스(Cerinthus), 마르키온(Marcion), 오파이트파(Ophites), 카인종파(Cainians) 등 영지주의 문서 뿐만 아니라 아리우스(Arius)의 편지, 마니교 문서, 사라져버린 플로티누스의 문헌들, 아리스토텔레스의 회교문서, 초기교회의 무수한 부본들. 아베스타와 조로아스터 문서, 멀리 인도에서 들여온 경전들, 부패해가는 문서의 필사본, 사라진 문고, 사멸한 복음서들, 단편들, 바오로와 베드로의 서한 이본들, 콘스탄틴의 증여와 같은 날조된 문서들, 예수의 가계보, 총독의 밀서, 그리고 전승에 대한 문헌들, 공의회의 녹취록과 주교 간의 동맹결의서 등등. 이 살아남은 문서들을 읽고 관리하기에 5명의 교단으로는 불가능함에도 천수백년 동안 교단은 이를 관리하고 또 존재해왔다.

저주처럼 살아남은 문서를 읽어나갔다. 역사가 허구 속에 허무하고도 장중한 걸음을 걷고 있음을 보았다. 침묵 속에 깃들지 않았더라면 진실의 광기 속에서 실신하거나 허무 속에서 좌표를 잃었으리라.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진리의 신이 아니었다. 영원을 채울 진실이 권력의 욕구 아래 가녀린 새처럼 처참하게 죽어감을 목도하였다. 지친 영혼을 일깨우기 위하여 때론 다락으로 올라가 하늘과 비아스몬 산맥을 보았다. 그러면 대지는 진실을 몰라도 빛으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늙은 파수꾼은 낡고 육중한 장부를 가져왔다. 장부를 열었다. 그리고 천수백년 동안의 침묵의 흔적을 보았다. 선배들은 자기가 읽은 것과 안 것에 대해서조차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아무런 문서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한 문서의 문장을 다른 문서의 문장과 결부 짖는 일, 그것만을 했다. 연결된 교차색인, 그것은 진실의 나침반이었던 것이다. 날조된 진리는 몇 번 연결이 되다 그 후 진실의 연결고리에 접목되고서는 허구로 사라져 버린다. 연결과정이 지속될수록 진실은 정화되고 강력한 실체로 자리잡는다. 선배들은 침묵한 채로 무수한 자료 속에서 이렇게 진실을 여과해 냈던 것이다.

나는 교차색인을 따라 진실의 미로를 여행하였다. 그것은 명상이었다. 여행은 한 시대의 공시적인 공간 속에서 방황하다가 때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때론 내려오곤 했다. 자료를 보다가 좌표를 잃고 영원히 진실의 그물에 갇혀버린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진실에 관한 한 훌륭한 고전보다 기사모험담 혹은 값싼 책, 혹은 싸구려 잡지 속에 순도 높은 진실이 함유되어 있음을 보았다. 교단이 관리해 온 비밀조직의 계보 속에서 정치권력의 함수관계, 신흥종교 운동과 기사단의 역할, 그리고 비밀결사들의 역사 속에서의 변용과정과 자기 핵분열을 하면서 생존하고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권력을 위하여 자신의 이형동체를 잡아먹고 그 자양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끝없는 진실의 미로를 방황하면서 존재하였던 모든 역사적인 사실들이 언어 속에 불멸의 포로가 되어버린 것을 알았다. 그리고 우주의 이법도 진실도 언어의 현전에 불과하지 더 이상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언어가 얼마나 나약한가와 집요한가를 보았다. 모든 언어는 나의 관념이다. 그러나 내가 죽어도 언어는 타인의 관념에 기생한다. 그래서 어떠한 진실도 타인의 관념의 끊임없는 변화일 뿐, 실체를 지니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진실들은 왜곡된 관념의 흐름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 쓰여진 진실은 말한 자의 관념이 아닌 읽는 자의 꿈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경전으로는 살아있는 진리를 담을 수 없다. 진리는 언어를 넘어 있는 만큼 경전은 박제된 진리일 뿐, 살아있는 진리는 없다. 사람들을 열광케 하던 말씀이 그때 그 자리를 벗어나 경전으로 변할 때 진리는 종교가 되고 부패하는 것이다.

지금 종교는 내연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나그 함마디(Nag Hammadi)의 봉인이 풀렸다. 그리하여 영지주의의 망령들과 천수백년 간 죽어있던 진리의 파편들이 세계 도처로 흘러나가고 있다. 여성 목사들이 신의 모습은 여성이라고 부르짖고, 흑인들은 검은 성모를 떠올리며, 사탄종파가 일어나 진짜 신은 사탄이며 여호와는 더러운 물질을 창조한 배반의 천사라고 웃음 짖고 있다.

모든 종교는 권위와 협잡의 반석 위에 거대한 금자탑을 세우고 신이라는 미명으로 무수한 인간들의 싸구려 보혈과 가난한 자의 피고름으로 만든 영생의 길. 무지한 인간들이 천국에 이르면 만날 자란 누구인가? 결국 천박한 인간. 그들은 기도소리로 천국을 메우고 남보다 더 빨리 신에게로 다다르기 위하여 서로 헐뜯고 싸우다 지친다. 만약 영혼이 있다면 소리칠 것이다. 아아 죽고 싶어! 진화되지 못한 영혼 위에 부어지는 영생은 끔찍한 형벌이라는 것. 잠자지 않는 사념, 죽어버리지 아니한 자아, 사악한 불멸의 영혼을 어찌 신이 깨끗게 할 것인가! 신이 정화할 수 있는 영혼은 자신의 것일 뿐, 인간의 영혼이 아니다. 만약 여호와(YHWH)께서 나를 잔잔한 물 가으로 인도하고 영혼의 아픔을 치유하실 수 있다면 나는 여호와의 꿈이요, 내가 여호와인 것이다.

시간마저 침묵과 명상으로 정지한 교단에도 세월이 흐르고 늙은 파수꾼이 죽었다. 우리는 이미 이십년 가까이 함께 했고 같이 자료들을 읽곤 했다. 그의 옆에 있으면 항상 따스했으며 모든 나의 생각과 마음을 그가 들여다 보고 있는 것마냥 생각되었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는 지 나에게 편지를 썼다. 그것은 침묵의 의무에 반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간단하게 썼다.

나의 아들아! 침묵을 알고 나서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진리를 버리고 나서 나는 더 행복해졌다. 왜냐하면 진리는 경전에도 어디에도 없고 단지 나에게만 있을 수 있는 것이기에 더 이상의 추구와 욕망은 없어졌다. 그리고 내 마음이 비어버리자 사랑이 와서 앉았다.

그가 죽자 나는 외로움에 떨었다. 새로운 파수꾼이 왔으나 아직 서로의 침묵을 나눌 수는 없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비워버렸고 포기했다. 말을 포기했고 생활을 버렸으며 심지어는 생각마저도 버렸으니 남은 것은 하나, 진리 뿐인데, 그것을 포기할 길은 없었다.

어느 날인가 수호자가 자료실로 왔다. 그는 한동안 침묵 속에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때가 없었으나 하잘 것 없는 우리의 시대를 종지부 찍을 때가 왔습니다. 오랜 명상을 통하여 나는 알았습니다. 이 곳을 역사 속에 묻어야 한다는 것을. 비록 이천년 가까이 이 곳을 지켜왔으나 더 이상 필요 없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지닌 진리는 받아들일 사람이 없고 또한 우리가 지켜온 진실은 허구가 될 뿐 입니다. 나그 함마디(Nag Hammadi)의 봉인이 풀렸으나 세상은 변화가 없습니다. 이미 인간에게는 종교적인 열정이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돈과 물리학적 법칙에 있습니다. 우리가 봉인을 풀고 모든 자료들을 그들에게 공개해도 사람들은 한 발자욱도 진리와 진실에 다가서지 못할 것입니다.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 혼란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한 변화는 못됩니다. 단지 기득권을 가진 자에게 던지는 돌팔매질. 또는 그들의 자리를 짓밟고 올라서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것이라는 점. 인간은 그렇게 운명 지어졌습니다. 우주에 편만한 위대한 진리와 진실도 삶이라는 꾀죄죄하고 볼품없는 것을 결단코 능멸할 수 없습니다. 저들의 지친 삶 때문에 진리의 광휘와 진실의 무게가 오물 속에 가라앉아 제 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때론 우리들이 너무나 잘못된 길을 걸어왔고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들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오고 있는 데 우리는 하늘을 이야기했고 땅을 외면해 왔습니다. 종교와 과학과 모든 신념들이 세상 저 멀리를 이야기 하면서도 한번도 인간을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함에도 진리를 떠들어 왔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이 자리를 파하고자 합니다.

그는 말을 마친 후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오랫동안 내 곁에 앉아 있었다. 나는 벙어리요, 머리 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그렇게 있었다. 단지 간헐적으로 가슴에서 서글픔이 올라왔다. 나의 인생이 투명한 재로 무화 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 등이 머리 속을 표류했다. 그러나 지친 모습으로 망연히 쳐다보는 그의 공허한 눈을 보자 교단을 폐쇄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천년동안 한번도 잠들지 못한 것처럼 피곤이 엄습했다. 잠을 자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지친 웃음을 지었다. 웃음은 하찮은 나의 인생을 일깨웠고 그럼에도 평화 속에 깃들은 세월과 내가 얼마나 이들을 존경하고 사랑해 왔던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그의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는 갔다.

나는 광야를 지나 멀리 바닷가까지 여행을 하였다. 세상을 보았다. 내가 땅의 끝에 머물 동안 세상은 엄청나게 변화했으나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늘 고통 속에 있었다. 나의 젊은 시절에도 그랬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한 여자를 사랑함으로써 얼마나 고통을 받았던 가와 고통 속에서도 행복했으며, 그 행복이 고통을 치유하고 또 그녀에게 헌신할 수 있게 했고 어떤 수치심과 유치함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마저 주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행복에 집착하면 할수록 끊임없는 갈증에 그녀 집 앞에서 서성이게 했었다. 그러한 갈증이 못내 그리워졌다. 고통이 없는 삶을 살아왔던 내가 진리를 알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역사나 진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것은 침묵 그것 뿐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더 이상 자료를 읽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하루 하루가 지나가면 그에 따라 머리 속은 투명해져 아무런 사념의 그림자도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절정과 무지의 사이, 소음과 침묵의 사이, 때론 내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의 사이를 표류하고 있었다. 세월의 열병과 추억 그리고 황무지에 쏟아져 내리는 폭양. 마을 사람들의 지친 몰골과 말라버린 나의 혀. 이런 것들이 표류하고 있는 영혼에 다가와 소리치곤 했다. 진실이란 인간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환상이다. 그리고 절망을 넘어서면 생활이 살 비린내를 뿜어내며 네가 말하는 진실과 저 망할 놈의 광야의 빛을 뭉개 버릴 것을… 그리고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너한테 이야기하리라 너는 결국 삶에 속아버린 것이라고…

다락으로 올라가 밤의 하늘을 본다. 장엄한 가을 밤, 수많은 별들이 명멸한다. 나의 혀는 그대로 굳은 채 있고 머리는 정지하였다. 그리고 피곤을 느꼈다, 아주 나른한.

지평선 저 멀리에서 새벽이 오는 지 잠시 빛이 일어서더니 사라지고 더 짙은 어둠이 내린다. 조금 있으면 새벽이 소리치듯이 일어날 것이다.

총성이 들렸다. 광야 저 쪽에서 울리는 총성은 어둠 아래서 벌벌 떨면서 울려 퍼지더니 개들이 짖어대고 마을의 창에서 불빛이 하나 둘씩 일어났다. 한동안 있은 후 다시 불빛들이 사그러들고 광야와 마을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한 집에서 여인이 나왔다. 여인은 마을을 마을을 벗어나 광야를 향하여 걷기 시작한다.

지평선 저편에서 한줄기 또렷한 미명이 지난다. 그러자 산맥의 능선으로 희미한 빛이 감돌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개 한마리가 울부짖는다. 여인의 집에서 사내가 나온다. 사내는 여인을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한다. 빛이 밝아지는 지 가을대지 위로 먼지가 발자국을 따르는 모습이 보인다. 저 멀리서 차가 달려오는 듯 가느다란 먼지가 선분을 그리며 마을로 다가온다. 투명해진 광야 속으로 여인은 점으로 사라지고 달려오던 먼지가 멈춰 섰다. 그러자 사내는 죽을 듯이 달린다. 다시 한줄기의 먼지가 기나긴 선분을 그리며 광야의 저쪽으로 달려간다. 사내는 그 자리에 선다.

해가 떠오른다. 광야 위로 그림자들이 웅성거리며 일어난다. 빛의 흔들거림과 정적 속으로 다시 한번 총성이 울린다. 정지해 있던 사내는 대지 위로 내려 앉는다. 비상한 새들이 하늘을 선회한다.

그러자 하늘은 차라리 백색으로 빛나기 시작했고 거친 아침 내음이 대지로부터 비상해 오르기 시작했다.

【끝】

용서받아야 할 자

아주 멀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봄은 라일락 향기와 함께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제 봄의 향기와 그 향기에서 시작되는 열정과 같은 것은 더 이상 움트지 않는 것 같다. 더 이상 노래와 같은 것, 춤을 추고 싶다거나 오랜 산보로 몸을 지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가끔은 먼 곳까지 천천히 걸어보고 싶다. 잊어버린 이름들이며, 순간들로부터 영원 속으로 흘러내려간 무수한 것들을 더듬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안타깝게도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기에는 이 봄은 너무 짧다. 나에게 기대되는 앞날이란 길지 않고, 지나간 날들도 후회로 얼룩진 것들이기 때문에 기억 속에서 무엇을 찾아낸다는 것은 고통스럽기도 하다.

나의 산문들은 불행한 유산이며, 식어버린 화로에서 안타깝게 불씨를 찾아내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거리다. 그래서 기록이란 때때로 고통스럽기도 하며, 치부를 드러낸 것처럼 화끈거리거나, 어리석음이 또 다른 후회와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습게도 그런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이 세계가 인간에게 가하는 모멸과 치욕은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회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세계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밥을 먹고 숨을 쉰다는 것은, 이가 갈리는 일이지만, 마침내 협잡의 산물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살아있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광기와 어리석음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갈망들 속으로 나를 이끌고 있다. 아직도, 아직도 말이다. 어리석음이 무죄라는 것은 알지만, 초라한 자신의 삶이 한번도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막막하다.

봄이 지나간다. 목련꽃잎과 거리를 구름처럼 물들였던 벚꽃들이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을 때, 까마득한 슬픔이 몰려왔다. 해마다 피고 지는 꽃들인데 어찌하여 이 봄에만 알 수없는 서글픔이 압도하는 것인지? 영속될 것으로 믿어왔던 어제의 오늘들이 홀연히 사라져버렸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오늘의 오늘 앞에 서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내일을 기다리고 있는 나의 초라한 모습을 꽃잎이 사라진 거리에서 마침내 마주했기 때문일까?

헛된 과거를 바라보며, 기대할 것 없는 허망한 내일을 맞이하는 것이란, 고통보다 더한 우울에 빠지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생을 깊이 생각하다보면, 자살을 꿈꾸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치욕스럽다 못해 찬란한 이 세상을 바라보면, 간신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대견스럽다.

살만한 이유가 없는데, 산다는 것은 어리석지만, 이유가 없는 세상의 저 빛과 그림자를 밟으며, 나는 살아가고 있다. 그냥!

이제 햇빛이 난다. 빛이 드는 거리는 찬란하다. 도로 위로 나무가 자라고,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는 것, 그 자체 만으로도 기적이다. 다리가 늘씬한 저 아가씨는 얼마나 생기에 차 있으며, 웃음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때때로 대지를 둘러싼 아름다움을 보면 미칠 것 같아 오히려 고통스럽다.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싶다거나, 노을이 끝나는 곳까지 마구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란 힘들다.

이러한 충동이야말로 사람들을 살게 하거나, 자살에 이르게 하기도 하고, 마침내 사랑에 빠지게 하는 지도 모른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자살을 한다거나, 산다는 것이나, 사랑을 한다는 것들 모두가 미친 짓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렇게 미쳐 날뛰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말은  거짓일 뿐이다.

늘 충동에 살고, 지겨움으로 나날을 보내는 것이 사람이다.

겨울로 진입하는 토요일,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부천으로 향하는 전철을 탔다. 전철에서 무수한 집과 지붕이 초겨울의 햇빛 속에서 서로 겹치고 흐트러지며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는 것을 보았다. 집과 골목과 야트막한 언덕이 세상의 광막함과 먼지 속에 멀어져가며 소실되고 있었다.

초라한 삶들이 좁다란 골목과 전신주 아래의 그늘 속으로 깃들고, 좁은 생애의 마당에는 손바닥 만한 햇빛조차 들지 않는데, 그토록 긴 시간을 그늘 아래에서 서성이다가, 홀연히 죽음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숙명 속에서 나는 잠시 체념을 했을지도 모른다. 고가철로 밑의 촘촘한 지붕 위로 1호선의 그림자는 하염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다.

철커덩거리는 전철의 바퀴소리를 들으며, 손잡이를 잡은 채 앞에 앉은 아줌마의 무표정한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뚜렷하게 아줌마의 얼굴을 보고 있었고 12월이었으나, 아줌마의 코 끝이 흐려져가며, 창을 넘어오는 오월의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낮잠을 잘 자고 난 것 같았다. 뿌듯했다. 눈을 뜨자 유년의 기억 속에서 마주했던 최초의 그 빛이 내가 누워있는 침대 위에 떨어져 내렸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위에는 종이상자들이 몇 개 놓여 있었고, 벽에는 낡은 옷가지들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습기 먹은 먼지 속에는 담배냄새가 찌들어 있었다. 단칸방이었다. 외로움이 나의 가슴에 차오르고 있었지만, 외로움은 오래된 친구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죽음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생애의 온갖 추억들을 더듬으며,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열망 그리고 아무런 환상이 없었다. 죽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생애의 모든 추억들을 그토록 짧은 시간에 떠올릴 수 있다니! 최초의 기억에서 부터, 어린 날 방에 놓여 있던 책상의 다리, 이웃집 담벼락의 장미와 벽돌의 균열 등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떠오르고, 사랑과 미움 그리고 풍경, 식구들의 아득한 목소리, 가슴 속의 수많은 아픔, 그리고 생의 정점들이 폭발하듯이 교차했다.

명멸하는 기억 속에서도, 주체할 수 없이 차오르는 눈물 속에서도, 가슴은 고요했다. 그것은 슬픔 때문 만이 아니라, 삶이 가진 그 다채로운 모습이 추억으로 빛바래가며 허물어져 내린다는 것, 그리하여 미묘한 아름다움이 된 후, 막연히 사라져버린다는 것에 대한 희열이었는지도 모른다. 슬픔과 희열에 들떠, 한번도 용납하지 못했고 늘 생경하기만 했던, 나의 삶을 처음으로 애절한 심정으로 포옹했다.

스쳐지나온 삶과 나 자신을 용서했을 때, 다시 창 밖에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함께 온갖 세상의 소리들이 넘쳐흘렀고, 공기는 어느 때 보다 상쾌했다. 일어서서 조그만 창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일어설 기운이 없었다. 얼굴에 닿는 마지막 햇살이 따스했다. 좀 더 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이만큼 살았으면 그만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용히 웃었다. 그때 죽음이 나른하게 몸 속 곳곳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다. 열두시가 조금 지난 경인 전철 어느 아줌마 앞에 나는 서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생애의 마지막 순간 속에 들어서 있었을까? 아마 찰라에 불과한 시간이었으리라. 그 짧은 동안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했지만, 지하철에 스며드는 햇빛과 철커덩거리는 전철의 소리는 그대로 였다.

한시에 있는 결혼식을 본 후,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1호선 용산에서 내렸다. 어두운 지하철로 집으로 가기 보다, 낡은 도시가 겨울로 들어가는 풍경이 보이는 국철을 타기로 했다.

철로변의 포플러는 강가로 얼룩진 가지를 드리우고, 철길의 자갈은 겨울 오후의 빛을 거칠게 반짝이고 있었다. 강과 도시의 뒷모습이 창을 스쳐 지났다. 때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한가한 객차의 복도를 스쳐 지나곤 했다.

열차가 서빙고를 지날 때, 지금의 나는, 그 날 정오경 현재로 부터 이득한 미래인 죽음의 순간으로 역행했던 것처럼, 수십년 전으로부터 시간을 거슬러 내려와 마주한 미래의 환상이 아닐까 했다. 제발 그랬으면 했다. 아직도 이태원의 지하 카페에서 어느 소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상상할 수 조차 없이 무의미하고 지친 중년의 어느 날을 잠시 꿈꾸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하지만 국철 안으로 스며드는 햇빛은 너무 투명했고, 내가 알던 거리의 풍경들이 심드렁하게 스쳐 지나며, 한양대학의 건물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왕십리였다. 국철에서 내려 5호선 쪽으로 간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익숙했다.

경고음을 울리며, 5호선이 다가왔다. 밝은 철길보다, 형광등으로 밝혀진 지하로 내려가면서 오히려 현실로 현실로 아득하게 내려서는 것 같았다. 거대한 지하 동굴, 시멘트 침목, 그림자처럼 어슬렁거리는 승객들, 더 이상 생각이 흘러가지 않도록 막아선 타일 벽, 신문지조각, 지상의 번지수인 <왕십리>라고 쓰인 이정표, 이런 것들은 너무도 뚜렷하여 나는 아무 것도 꿈꿀 수 없었다. 지하철을 탔고, 맞은 편에 앉은 여자 승객의 얼굴이나 다리를 보았다. 심심하면 뒤돌아서 있는 여자의 엉덩이를 쳐다보며 그녀의 앞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현실이 시간 속으로 흘러가면, 추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난 이십몇년 동안 현실의 어느 지점이 추억이 되고,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는 또 다른 꿈이 된 적은 없다. 있다고 해도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그 내용은 몹시 빈곤하다. 그것들은 기억들일 뿐이다. 이런 빈한한 나날들 속에서 그나마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숨 쉴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마저 지금 기대어 살고 있는 그 미미한 오랜 시절들의 추억이었다면, 생의 한 부분 중의 또 한 부분에 기대어, 간신히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야금야금 빨아먹던 추억마저도 한쪽이 무너지고 말았다. 무너진 추억은 뭔지 몰라도 아슬아슬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의 기억이 떠올라, 위태롭게 보였던 이유를 알게 됐다. 그 추억은 거짓 위에 쌓아올려진 기억들의 더미에 불과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려 했고, 그녀가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낌으로는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의 기억은 그녀가 나에게 던졌던 몇마디의 말에 스스로가 날조한 기억을 덛붙여가며, 기어코 그녀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으로 추억을 만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녀가 전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허접스런 기억의 지층 속에서 발견해 냈을 때, 당시에 욕정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시에 나는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육신 깊숙히 나의 살을 밀어넣음으로써… 가슴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자신들의 사랑을, 그녀의 육신 깊숙한 곳에 아로새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지 못했던 것은, 당시의 낡은 윤리나 나 자신의 가슴 속의 도덕율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기에, 와락 그녀를 껴안았을 때, 서로가 의무감에 이어왔던 그 얄팍한 사랑마저 깨져버리고 간신히 내 곁에 잡아두었던 그녀가 사라져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때의 추억은 무너졌고, 나는 거짓된 추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지고 난 후, 남은 추억이란 한움큼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마저 너무 미미하여 빛이 조만간 바래고 말 것이란 두려움이 있지만 말이다.

한줄기 남은 추억마저 삭제를 해버린다면, 하루는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직장으로 나가고, 일을 한 후 다시 돌아와 밥을 먹고 잔다는 것으로 환원될 것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시간이 멈추기를 바란다거나, 어느 순간이 영원으로 흘러들기를 한 번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은, 몹시 슬픈 일임에 틀림없다. 몇 번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광장에서 맞이한 밤이나, 대륙의 끝에서 부는 저녁의 훈풍과 같은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순간들은 그 뿌리에 외로움이 잔뜩 깃들어 있었고, 늘 다음날의 왁자지껄함이나 피로감들로 지워지곤 했다.

그래서 매일 저녁이면, 퇴근을 하고 지하철로부터 천천히 지상으로 올라가 낮 동안 직장에서 접어놓았던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그러나 늦은 저녁에 시작하는 하루 또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치킨 집과 제과점, 약국, 미용실 등으로 꽉 들어찬 골목을 따라 꽃이 져버린 나무 아래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늘의 중간 쯤에 위치한 집으로 들어가 티브이를 켤 뿐이다. 그러면 하루는 그냥 이불 속으로 들기 위해서 멍청하게 생긴 잠옷을 갈아입고 이빨을 닦으며, 사라질 뿐이다.

이런 무료함을 지우기 위하여 때로 책을 읽는다. 그러면 아내는 내게 책이란 단지 생활에서 도망치기 위한 도구가 아니냐고 한다. 회사나 다니는 사람에게는 터무니없이 어려운 책이며, 그러한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이야기들은 누굴 즐겁게 할 수도, 쓸모도 없을 뿐 아니라, 식구들 누구도 읽어 볼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책에는 아주 값싼 진실이 있거나, 쓸데없는 농담과 수다가 있을 뿐이다. 진실이나 진리가 있는 것이나 할까? 설령 있다고 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쓸모도 없을 것이다.

추억도 아니고 진실이기 위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맞는 지도 모른다.

어느 일요일, 항구도시인 K시에 도착했을 때, 날은 저물었지만, 아직 늦은 시간은 아니다. 삼개월 만에 다시 그곳에 왔던 것이다. 홀로 저녁을 먹기는 싫었지만,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놓고 왔다는 것을 안다. 혹시 친구들이 있지 않을까 초동으로 들어섰고, 친구들이 자주 가던 다방으로 올라간다. 계단에서 빗질을 하고 있는 여자를 지나 다방 문을 열자, 스탠드 바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거기에서 나와 밖으로 내려간다. 계단에 있던 여자가 말한다. “왜 그냥 가시게요?”, “다방인 줄 알고 왔는데, 혹시 친구가 있을까 해서…”, “제가 친구 해 드리면 안 될까요?” 여자의 얼굴을 본다. 늘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보게 마련이니까. 여자의 눈이 몹시 매력적이라는 것을 느끼고, “그러기로 하죠.”라고 말한다. 여자의 손에 끌려 다시 스탠드 바로 들어갔다. 자신이 자리에 앉자, 여자는 술을 따르기 위하여 스탠드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술을 팔아먹기 위해 유혹을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밤까지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안다. 사내는 스탠드를 임대하여 장사를 한다는 그녀와 술을 주고 받았다. 양주를 한 병 비우고 나자, 여자는 일요일 밤이 되면 더 이상 손님이 없으니, 테이블에 앉아 편히 술을 먹자고 했다. 술을 한 잔이라도 더 팔겠다는 여자의 상술이 얄팍하다고 생각했지만, 술은 취하지 않았고, 아직 호주머니에는 돈이 남아 있었다. 그러자고 했다. 여자는 자신이 초동 뒤의 마르센 호텔에 있는 나이트 클럽의 댄서였다고 말했다. 여자의 얼굴에 멈추어 있던 시선을 여자의 온 몸으로 옮겼다. 키도 크고, 늘씬했기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사내의 옆 자리로 와서, 팔을 껴안고 “오늘 손님도 없을텐데, 문 닫고, 우리 나이트 클럽이나 가요? 마르센 호텔은 말고요.”라고 말한다. 사내는 호주머니 속의 돈을 대충 계산해 본 후, 그러자고 했다. 그들은 나이트 클럽으로 갔고, 함께 춤을 춘 후, 어둠 속에서 입맞춤을 하고 만다. 초동의 여관에서 여자가 “당신을 사랑해도 되죠?”라고 묻는다. 그래도 된다고 말한다. “그럼 편지를 써도 돼요?”라고 말한다. 사내는 그럴 필요가 없으며, 자주 K시에 내려온다고 말한다. 사내는 항구 쪽에서 드문 드문 울리는 무적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자는 자고 있었다. 반쯤 벗은 여자의 늘씬한 몸을 보자 다시 욕정이 솟았지만, 일을 보러 가야만 했다. 조용히 샤워를 하고, 옷을 입은 뒤,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돈이 얼마 없었다. K시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차비와 아침, 점심값, 그리고 담배값을 꺼내 호주머니에 넣은 후, 남은 돈을 지갑에서 꺼냈다. 삼만삼천원. 삼천원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고, 삼만원을 티 테이블에 올려 놓은 후, 조용히 문을 닫고 사내는 방을 나선다.

여기에서 진실은 사랑이나, 여자의 편지가 아니다. 삼만원이다. 사랑은 믿을 수 없는 반면, 삼만원은 가혹하고, 정확한 값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난 여자는 삼만원을 본다.

“사아랑? 웃기고 있네. 너는 삼만원에 불과한 여자일 뿐이야.”는 남자의 속 쓰린 진실을 알아차린다. 문득 담배가 생각났지만, 한 개피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재털이의 꽁초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여관을 나와 근처의 식당에서, 홀로 아침을 먹는다.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계산을 한다. 그 돈이 남자의 돈이었다는 것을 알고, “빌어먹을!”이라고 말한다.

창녀가 일찍 늙고 추해지는 것은, 바라보고 자신의 몸과 젊음을 가꾸어야 할, 추억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미한 광채이긴 하여도 아주 조그만 사랑에 대한 기억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책 따위는 집어던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마저 집어던진다면,

아무런 추억도 없다면,

그리고 빈한한 나의 일상들을 그만 포기할 수도 있다면…

나는 이카텐의 고원으로 갈 것이다.

거기는 먼지를 몰고오는 바람이 하루종일 불고, 죽은 잡초더미들이 딱딱하게 굳은 대지 위를 배회한다. 세상의 모든 길들은 지평선 저쪽에 정박해 있다. 그리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 늘 노을이 피어오르곤 했다.

나의 일상이라고는 걸상을 흙벽 쪽 그늘 아래에 내어놓고, 거기에 앉아 지평선을 바라보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도 남는 것이라곤 시간 밖에 없다.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난다. 외롭고 심심하다. 외로움은 견딜 만 할 것이다. 한번도 외롭지 않았다. 외롭다고 하여도 견뎌내지 못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심심한 것은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조그만 텃밭을 내고 푸성귀같은 것을 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뭘 심고 가꾸는 것을 전혀 할 줄 모른다. 씨앗을 뿌리고 싹이 나는 그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몹시 고통스러울 것이다. 씨앗을 어느 정도 깊이로 심어야 할 지, 물은 어느 정도 주어야 할 지, 씨앗이 발아하고 싹이 나서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매일 물을 주며 싹이 나는 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멍청하거나 현명한 사람들이나 할 일이다. 아마 씨를 뿌린지 삼일정도가 지나면 씨앗이 발아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땅을 파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텃밭을 내는 것은 포기하기로 한다.

그때부터 의자에 몸을 묻고, 지평선을 바라보며 그 황량한 광야를 건너오는 사람을 기다릴 것이다. 물론 거친 광야를 건너온 사람이 하는 외국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다. 그에게 시원한 물을 한잔 준다던지, 저녁을 지어주고 나면, 나와의 무거운 침묵 때문에, 그는 또 떠날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기다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상상이나 할 것이다. 거짓된 시간들 속에서 버려졌던 추억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추억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추억이란 단지 더듬한 기억들을 모으고 거기에 살아야 할 약간의 이유들을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에 경악할 것이다.

그래서 이카텐에서 다시 도시로 돌아올 것이고, 어느 골목의 단칸방으로 들어가 남은 날들을 보낼 것이다. 기억에 남을 것 없는 하찮은 날들을 보내며, 한순간 만이라도 삶의 절정에 이르기를 기다리다 마침내,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거짓된 이 삶의 내용들이,
그녀의 육신 속에 깃들지 못했던 그 짧은 시간 때문에
흘려보냈던 거짓된 추억들이,
한번도 거짓된 적은 없으며,
그저 죽음의 정원 바깥에
뜻없이 피어나고 져버리는 꽃잎같은 것이었다고
마침내 말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