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시절 -11

이런 구신 씨나락 까먹는 SF적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나는 뒷줄 생활에 신물이 났고, 다시 앞 줄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앞으로 갔다.

그러자 놈도 따라왔고 우리는 셋째 줄에 둥지를 틀었다. 나는 아이들과 다시 친해졌고, 놈은 나뿐 아니라 앞 줄에서 나와 친한 놈들까지 보호했다. 나의 주변은 놈이 있다는 그 자체로 평화로웠고, 감히 놈 때문에 잡놈(대충 잡놈들은 셋째와 다섯째 줄에 몰린다는 특성이 있다. 놈들은 항상 자신들보다 별 볼일 없는 놈을 찾아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는 피학성 음란증 환자이다)들이 와서 껄렁거리지를 못했다.

앞 줄에 와보니 애들은 바람직한 고등학교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놈들은 고일이기에 공부보다는 정신에 자양분을 공급하겠다고, 카프카의 <변신>이나 <갈매기의 꿈>(국어선생의 추천도서였음)을 읽고 있었다. 좀 진도가 나간 놈들은 어디에서 알았는 지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도 읽었다. 그 정도면 상당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을 뿐 만 아니라, <아프락사스>라는 말까지 하면, 놈이 이 세상의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다고 믿기까지 했다. 우리는 읽은 책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때론 영화를 보았다.

당시에는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국민학교 때부터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으르렁거리면서도 늘 만나던 동갑내기 육촌이 어느 날부터 ‘피상적’이라는 단어를 갑자기 쓰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 문장 안에 피상적이라는 단어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인생이란 것이나 우정이나 다 피상적일 뿐이야…, 너의 대답은 언제나 피상적일 뿐이야…, 아름다움은 진실이 아니라 피상적인 것이고…” 기타 등등의 말들을 씨부렸다.

미치고 폴짝 뛸 일은, 그 놈의 피상적이란 것이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거나, 내가 하는 말에 딴지를 걸기 위한 불순한 주문인 것 같은 데, 그 의미를 종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피상적이 뭐냐고 녀석에게 묻는다면, 무식이 됀통 드러날 것이라는 것 때문에, 집으로 돌아와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거기에는 ‘사물의 판단이나 파악 등이 본질에 이르지 못하고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현상에만 관계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사물이라는 것은 좀 알겠는데…, 본질, 현상 이런 개념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열여섯의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오랫동안 사색한 끝에, 이것이 ‘수박 겉핥기’라는 생생한 개념을 체득해냈다. 그때서야 이 빌어먹을 자식이 헐렁한 이야기를 씨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놈을 만나 “그 놈의 피상적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놈은 내가 국어사전에서 보았던 그 고도의 사변적인 의미를 말했다.

“무식해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다시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설명을 해 달라.”고 했다.

드디어 놈의 말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피상적이란 단어가 우주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그 뒷면, 어쩌고 저쩌고 되더니 나중에는 현대철학의 새로운 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마 좀더 놈을 추궁해 들어갔다면, 지금쯤 놈은 이십세기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질 급한 나는, 놈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오묘한 뜻을 가진 것이 아니라, 아주 피상적이게도 수박 겉핥기 식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리고 “너는 아주 피상적으로 아무 뜻도 모르면서 피상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을러댔다.

즉 고일의 수준은 아주 피상적이었고, 읽기는 했어도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변신을 읽었다는 놈에게 소설의 줄거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무슨 벌레로 변신한 것이라고 대답한 놈은 책의 뒤에 있는 해제를 읽은 놈이었고, 책의 맨끝까지 가서 볼짱을 다 보았다는 그 인내력 하나 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가장 솔직한 대답은 “몰라!” 였다.

당시 <아프락사스>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은, 그리고 그 단어가 <데미안>이라는 존경받을 만한 책에서 나왔다는 것 그 자체 만으로도 엄청난 권위가 있었다. 나는 아프락사스가 실존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프락사스는 실존하는 단어가 아닌 허구의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허구의 단어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나는 동화를 별로 읽지 못해서 동화 속의 허구적인 것에 익숙치 못했다)

아프락사스에 대하여 지껄이는 놈에게 “아프락사스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놈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라고 데미안에서 나온 구절을 씨부린 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관계를 지닌 고대의 일종의 신”이라고 내게 말했다.

놈에게 아프락사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놈은 분명히 있다고 했고, 한 번 있는 지 없는 지를 찾아보자고 했다. 놈이 자신만만하게 대들자 약간 겁이 났다.

나름대로 조사를 했지만,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고, 세상의 그 많은 신과 고대의 신 전체를 검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국어선생에게 아프락사스라는 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국어선생은 한동안 생각하더니, 상징과 은유의 체계를 이야기했다. 데미안의 그 문장에 여호와니 어떤 실제하는 신의 이름을 대입하기에는 어쭙잖으니까 헷세가 그러한 신의 이름을 만들어 냈으리라는 결론을 선생은 내렸고, 나는 승리했다.

그 후 없는 신을 찾아냈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놈들은 나를 대단하게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신의 이름은 생성문법을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에 대하여 모르는 자들만이 주어진 신의 이름, 여호와, 알라, 브라흐만 등의 이름을 그대로 수용하지, 신을 체험한 자들은 자신의 체험을 기존의 신의 이름으로 수용할 수 없을 때 불가피하게 또 다른 신의 이름으로 부를 수 밖에 없으며, 혹은 또 다른 교리와 율법을 세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벌) 이 아프락사스에 대하여는 가현설을 주장한 바실리데스의 이야기에도 볼 수 있으며, 해리 포터의 <불의 잔>에 나오는 주문, <아브라카다브라>와 <현자의 돌>의 관계는 나의 블로그 포스트에도 자세히 나오지만, 최근 나는 보르헤스의 <픽션들>의 가운데 <바벨의 도서관>의 주석에서 비슷한 내용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바실리데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데, 그는 130년경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 그노시스 학파의 학자라고 되어 있으며, [보르헤스 사전]에서 따온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피타고라스와 히브리 카발라 신비주의의 원리들, 그리고 동양의 전통을 기독교 신앙과 접합시켰다. 바실리데스는 그리스의 숫자 체계에 따르면 신의 이름인 아브락사스(Abraxas)란 이름을 구성하는 글자들의 숫자적 등가는 365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아브락사스가 <이해>를 창조했고, 이것이 이어 <말>을 창조했다. 계속되는 계급 구조적 과정에 따라 천사들의 다른 질서 체계들(사실 365개인)이 창조되었다. 이러한 위계질서 중 – 여기에는 유태의 신도 포함된다 – 가장 낮은 것이 세계를 창조했다. ……』라고 되어 있다. 바실리데스에 의하면 최고의 신은 아브락사스이며, 데미우르고스(창조주)는 하급신일 뿐이다. 이 인용문에서 <이해>라는 단어는 아마도 그노시스일 것이며, <말>은 로고스(Logos)가 아닌가 한다.

그러니 보르헤스의 말이 맞는다면, 예수가 하늘로 들려 올라간 후, 백년 후에 생긴 신흥종교의 최고신으로 나의 친구의 말이 맞았고, 나와 선생은 틀렸던 것이다.

푸코의 추에서 발췌한 글들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에 너무 큰 기대를 걸면 안 된다.

– 스타니슬라프 J. 레츠, 『아포리츠미 프라쉬키』, 크라코프, 비다브닉트보 리테라츠키, 1977, 「미슐리 니에우체자네」

→ 세상의 종말에 기대를 가진 자들은 어떠한 인간들인가? (旅인)

빛과 신들로부터 비롯되었어도, 나는 이제 그 빛과 신들로 부터 떨어져 여기 홀로 방황한다.

– 투르파의 斷想, M7

→ 명백히 이 글은 빛과 신들에 대한 모독이다. 앞의 문장이 옳다면 뒤의 문장은 성립되지 않으며, 떨어져 홀로 방황한다면 그는 빛과 신들과는 아무런 유대가 없는 것이다. (旅인)

대립하는 아날로지(類推)는 빛과 어둠, 절정과 나락, 충만과 공허의 관계와 같다. 모든 도그마의 교의인 알레고리(寓意)는 인장을 봉인으로 현실을 환영으로 바꾼다. 말하자면 眞의 僞요, 위의 진이다.

– 엘리파스 레비, 『고등마술의 도그마』, 빠리, 발리에르, 1856, XXII, 2

→ 사실 이 시대를 형성하는 담론과 같은 것이 이와 같지 않을까? (旅인)

…… 이 密旨의 秘儀를 전수한 자들은 대담한 음모를 획책하고 도당 짓기를 계속하면서 나날이 팽창해 왔다. 예수회 교리, 磁氣說, 마르티니즘, 哲人의 돌(化金石), 몽중유행, 어정쩡한 에클렉티시즘(折衷主義)…… 이 모든 것은 이로써 생겨난 것들이다.

– C.L. 까데 가시꾸르, 『자끄 드 몰레의 무덤』, 빠리, 드센느, 1797, p.91

→ 절충주의(eclecticism)란 철학이나 신학에서 독자적인 체계를 세우면서도 다른 하나의 체계에 의거하지 않고 몇 개의 체계로부터 각각 옳다고 생각되는 요소(장점)를 빼내어 하나의 체계로 삼는 것이다. 마르티니즘은 오컬트 계통의 수비학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철인의 돌이란 바로 아브라카다브라(아프락사스)와 연관이 있는 현자의 돌을 가르킨다. (旅인)

정상에서 바닥에 이르기까지, 대피라미드의 체적은 약 161,000,000,000입방 인치이다. 그렇다면 아담에서 오늘날까지 이 땅에 살았던 인간의 수는 얼마나 될까? 153,000,000,000 내지 171,900,000,000명에 가깝다.

– 피아찌 스미드, 『대피라미드에 깃들여 있는 인류의 유산』, 런던, 이스비스더, 1880, p.583

→ 대피라미드를 건축할 당시 인치의 개념은 없었다. 그 당시의 척도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놀라운 점은 아담에서 1880년까지 살았던 인간의 수를 1,530~1,719억명이라고 계산해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아찌의 계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거기에는 자신 나름의 무수한 전제조건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피아찌의 계산에 오늘날까지를 더한다면 2,000억명 쯤 되리라. 그러나 어째서 그렇냐고 나에게 묻지 마라. 나에게도 말할 수 없는 전제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旅인)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요, 섬김을 받는 동시에 증오를 당하는 자이며, 성인이자 창부이기 때문이다.

-『나그 함마디(Nag Hammadi)』의 斷想 6, 2

→ 여기에서 나란 아마도 신일 것이다. 이 글처럼 신이란 영광과 치욕을 함께 해야만 하는 존재일 것이다.(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