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와 객체 그리고 아바타

알 수 없었으나, 내 적이 나와 나의 함대를 향해 총포를 겨누는 한 나는 내 적의 적이었다. 그것은 자명했다. 내 적에 의하여 자리매겨지는 나의 위치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 <칼의 노래 1권 71쪽>

1.

때때로 엄숙한 통찰을 통하여 뼈저리고 천박한 나의 일상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나의 일상이 천박한 것은 이른바 내가 주체가 아닌 탓이다. 나는 하나의 다루어져야 할 객체이며, 그것에 걸맞게 숨을 죽이고 나를 부르는 자의 눈치를 보거나 아내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아버지답게 자식에게 처신해야 하는 것이다. 대체로 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저들의 요구 수준에 늘 미달하는 그럴듯한 외양을 간직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언어를 나의 언어가 아닌 저들의 말로 구사하는 것이기에, 나의 욕망과 나로부터 분출되는 언어란 없다.

2.

아바타를 보았다. 산스크리트어 ‘아바따라(avataara)’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바타는 사이버 상에서 자신을 대신하는 분신(가상육체)으로, 단지 나를 대신하는 익명의 상징으로 쓰인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조세프 루스낵의 <13층>에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영화의 서론에 예고했지만, 가상세계 속에 프로그래밍된 허구의 존재(아바타)들은 자신이 자명한 주체를 지니고 스스로 사고하는 실존이라고 생각한다. <매트릭스>의 네오는 자신이 매트릭스 속에서 현실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매트릭스 내의 프로그램과 싸우는 구세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니까 1999년에 나온 두 영화는 사이버 세계가 실존하지 않는 세계이면서도 <空>을 바탕으로 세계와 우주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몹시 불교적이다.

이번 <아바타>는 가상세계 속에 존재하는 아바타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는 본인의 의식을 현실공간 속의 다른 생명체(아바타)에 텔레포트하는 것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최근에 나온 SF영화치고는 몹시 낙관적이다. 이러한 낙관론은 인간에 대한 믿음보다, 생존방식이 원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외계인 나비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이 영화는 아름답다. 인간의 상상력이 그린 화면도 아름답지만, 주체와 객체로 이원화하고 객체는 주체를 위하여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는 서구의 합리주의에 대한 물활론의 승리, 모든 생명체가 교감하는 세계가 아름답다.

이 영화를 찍은 감독은 서구문명이 아메리카 인디언과 남미에서 자행한 만행을 나비족의 승리로 속죄하는 것 같다.

20100110

참고> 아바타

SF영화, 13층

오랜 영화에 대한 편력 끝에 SF영화를 즐기는 편이다. 아무 생각없이 시간이 가고 재미가 있다.

아내는 SF영화를 심각하게 보고 있는 나를 가끔 한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볼 때가 있다. 그러나 SF영화에는 상당히 그럴 듯한 종교적 코드 또는 시그널이 있다는 것을 아내는 모른다.

SF영화 속에는 물리학적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장면이 나오고, 논리적이나 물리적인 법칙으로 해소가 안되는 부분은 결국 영혼이나 정신 등으로 얼버무리게 되는 데, 그 속에 종교적인 코드가 잡음을 발하며 끼어들게 된다.

상당히 종교적인 요소가 개재가 될 것 같은 컬트 무비를 보면, 오히려 종교적인 요소는 없고 구도는 단순하며 발라먹을 만한 것이 없다. 오멘이나 기타 등등을 보면 666이라는 상징성이나 사탄 등을 단순한 도식 속에서 흘려버린다. 거의 기대할 것이 없고 빈곤하다.

이십수년전에 ‘Space 1999’라는 BBC의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다. 이 드라마가 AFKN에서 방영을 했는 지 한국방송에서 방영을 했는 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달 이면에 있는 핵폐기물하치장의 폭발로 달이 지구의 궤도를 벗어나 우주를 떠돌면서 달 기지의 대원들이 겪게 되는 모험을 그린 이 드라마를 보면서, 분명히 종교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영국의 신지학적인 요소가 게재되었거나 서양의 부처라고 불리우는 구르드지에프의 불량한 제자 오스펜스키의 논리(지구야 말로 우주에서 가장 진화가 덜된 혹성이라는 논리)가 함유되었다고 느꼈다.

그 후 에이리언 포에버라는 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 이 비디오는 시고니 위버가 나오는 그 에이리언이 아니라 가오리같이 생긴 에이리언이 나오는 데, 좀 형편없는 비디오였다. 여기의 에이리언은 가오리처럼 생겼는 데, 뇌가 몸통에 비하여 너무 커서 어떤 숙주에 기생하지 않으면 뇌에 영양분을 공급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 기생하게 된다. 또 이것은 뇌에 안테나와 같은 것이 있어 정신(생각, 기억, 경험 등)을 상호교류한다.

정신의 교류 상태에서 몸통으로써의 각 개체는 있으나 정신은 하나이다. 하나인 정신을 위해서 각 개체는 아낌없이 희생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끔찍한 일이다. 만약 통합된 정신의 지시 아래 하나의 개체의 부품으로 움직여 가는 인간의 몸통을 생각해보라.

그 세계는 완벽할 것이지만, 몸이 없는 정신 만 남는 세상이다. 또한 두 사람의 정신이 통합되었을 때, 정신분열로 살아가든지 아니면 큰 자아가 작은 자아를 흡수 통합하여야 하는 데 과연 인간에게 자아라는 것이 있는 지 조차 애매하다. 그리고 타인의 뇌 속에 깃든 엄청난 노이즈(번뇌 등)를 통합과정에 감당할 수 있느냐 등도 문제이다.

이 비디오는 의도했든 안 했든 몸과 마음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고 정신과 영혼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요즘 실험되고 있는 사이보그에 대한 암담한 결론을 보여주고 있다.

13층(The Thirteen Floor)은 감독도 배우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이다. 매트릭스 기법을 썼다고 하는 데 엄청날 정도로 기독교적이면서도 불교적인 요소를 간직하고 있는 영화다. 나는 13층이라는 제목에서 컬트적인 요소가 있지 않을까 했으나, 컬트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다. 매트릭스적인 폭력도 없다. 재미있느냐 하면 별로 재미도 없다.

한 컴퓨터 천재가 가상의 시뮬레이션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 속을 여행한다. 자신이 만든 가상의 세계를 체험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또한 시뮬레이션된 허구의 세계임을 알게 된다. 그가 허구의 세계임을 알게 되자 자신을 만든 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가상의 세계에 와서 그를 살해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창조라는 코드는 분명 기독교적인 코드에 해당한다. 그러나 가상의 시뮬레이션 세계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자아와 생명에 연연한다. 비록 자신이 시뮬레이션에 의하여 만들어졌음에도 가상의 인간들과 도시 속에서 연기관계 속에서 자아를 형성하고 개별적인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는 분명 불교적인 코드에 해당한다.

이 13층이라는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이 되었는 지는 잘 모르겠다. 또 비디오로 성공을 거두지도 못한 것 같다. 그러나 한 번 유의해서 볼 만한 종교영화인 것은 틀림없다.

참고> The Thirteenth Flo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