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백산맥으로…

이제 태백산맥을 다 읽은 셈이다. 큰 숙제를 끝냈다는 느낌이다. 예전(1981년?)에 보성만의 율포로 가면서 벌교를 지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보성의 차밭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해도 보성의 한쪽 귀퉁이에나 재배가 되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창포가 보성강에서 키 높이로 자라 지나는 버스의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고 난 후 벌교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마 제2부용교를 넘어 흙빛으로 찌질대는 벌교천을 건넜으리라. 당시 부용교 위에서 바라 본 벌교는 코울타르가 먹여진 흑갈색 널판으로 지은 적산의 정미소 건물이 보이고, 벌교천 뚝방 아래로 농협창고와 연노랑색의 벽의 이층건물들로 시간이 더 이상 앞날을 향하여 나가지 못하여 60년대의 여울목에서 머물고 만 소읍이었다.

벌교(筏橋)란 뗏목을 이어 만든 다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여자만으로 펼쳐진 뻘 위에 놓여진 다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동네는 다리도 많다. 벌교천의 위에서 부터 봉림교, 홍교(횡갯다리), 소화다리(제1부용교), 제2부용교, 철다리(철교)가 있다.

회사의 신입사원 시절, 나의 주무사원이 바로 벌교 사람이었다. “벌교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그 당시에도 있었지만, 그는 참으로 신사였다. 아마 그때 당시에 ‘태백산맥’이 출판되고 내가 읽었다면 그와 많은 이야기 꺼리를 찾아낼 수 있었겠지만, 83년인가 젊잖았던 그가 폭압적이던 과장에게 우리가 보는 앞에서 대들었고 그는 “조직원으로써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상사에게 대들었던 자가 계속 회사 생활을 한다는 것은 조직에 대하여 미안한 짓거리다”하며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재작년 여름 벌교를 또 지났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벌교는 더 이상 1981년에 내가 보았던 벌교는 아니었다. 타이루를 바른 오륙층 건물들이 올라있었고, 녹차밭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벌교는 차들과 장거리의 소란함에 휩쌓여 있었고, 머리수건을 뒤집어 쓴 아낙네들은 꼬막이 가득한 스텡그릇을 아스팔트 위에 내놓고 팔고 있었다. 더 이상 아스라한 세월의 더께가 앉아 있는 소읍이 아닌 생활의 분주함과 활기로 난장을 벌이는 곳이었다.

1. 역사와 소설

책 ‘태백산맥’에 쓰여진 작가의 연보는 몹시 소략하다. 그러나 ‘태백산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작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찾아볼 수 있는 연보는 대처승인 아버지 조종현의 4남4녀 중 차남(넷째)로 전남 승주(순천) 선암사에서 43년에 태어나 ‘여순반란사건’을 순천에서 겪었고 49년에 순천남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으며 충남 논산에서 ‘육이오’를 맞이하고, 53년에 작은 아버지들이 산다는 벌교로 이사한다. 순천 토박이이며 14세인 그는 56년 부터 고향을 떠난다.

그러니까 ‘태백산맥’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암울하게 드리우던 이야기이며, 태백산맥의 재료는 그의 주변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을 것이고, 그는 지나간 이야기들을 채집하여 태백산맥의 끝자락의 아랫동네 이야기를 써나간 셈이다.

우리는 ‘줄거리의 역사’를 배워왔다. History(역사)란 His Story(그의 이야기)라고 한다. 여기에서 그(He)란 바로 여호와이다. 여기에서 역사란 이데올로기적일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다. 역사란 신이 예정하신 섭리에 따라 흘러가며 결국 선택받은 소수들만이 아마겟돈의 불의 징벌을 벗어나 신이 임재하시는 지상 왕국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리라는 것이다. 헤겔이든 마르크스든 동일한 직선사관의 틀 속에서 역사의 추동력을 ‘신의 섭리’에서 ‘절대이성’ 혹은 ‘물질’로 대입했을 뿐이며, 역사발전의 마지막 단계를 ‘절대다수의 자유’와 ‘후기 공산사회’로 대체했을 뿐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도식화, 단순화(줄거리화)라는 문제로 역사 속에서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복속되는 존재일 뿐 역사적 개인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면 Story(소설)는 무엇인가? 단순한 허구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인가? 소설이 현실을 무시한 채 동화로 존재할 수 있을까? 현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이며, 소설은 Our Story이기에 읽으면서 울고 웃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소설은 역사보다 현실적이며 <개인>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우리는 車띠고 包띠어버린 ‘역사’ 속에 매몰되었던 ‘개인’과 ‘민중’을 만났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정래’씨가 바라본 당시의 ‘개인과 민중’이 절대다수를 대표하느냐의 문제는 앞으로도 우리의 현대사에 지리한 물음표로 자리할 것이다. 군부독재가 서슬퍼렇게 엄존하던 1983년, 고통스런 물음표를 우리에게 선사해 준 ‘조정래’씨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불그르죽죽한 소설책을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2. 民衆, 國民, 人民, 民, 個人, 사람

사람이라는 것의 명칭은 몹시 많다. 너무 많아서 다 설명하기란 힘들다. 국민은 양말로 the nation이다. Nation이란 보편적 사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민족,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 한나라의 사람’ 등을 가르킨다. 따라서 특수성이 개제된다. 인민은 people이다. 그러나 people은 민중과 국민을 포괄한 보다 보편적 개념이다. 그러나 people 또한 정치적인 특성이 탈각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은 정치성은 탈각되더라도 사회적인 개념에서 쓰여지며, 사람이란 종의 특성에서 말해진다.

우리의 헌법 전문을 보면, “悠久한 歷史와 傳統에 빛나는 우리 大韓國民은 3·1運動으로 建立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法統과 不義에 抗拒한 4·19民主理念을 계승하고…”라고 되어 있다. 재야운동권에서는 동학혁명을 전문에 넣자고 헌법개정 때마다 소리쳤지만, 법 개정 때마다 그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것은 ‘민중’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삼일운동의 핵심어는 ‘민족’이며, 동학혁명은 ‘민중’이다. 민족에서 국가로의 이행은 자연스럽지만, 민중에서 국가로의 이행의 과정에서 ‘민중이 아닌 자’는 어떻게 하느냐라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된다. 그리고 ‘민중’의 개념을 어떻게 획정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민중’을 사회의 기층세력이라고 볼 때, ‘프롤레타리아’와 ‘반민중’으로써 ‘부르조와와 쁘띠 부르조와’라는 대립각이 형성되며 ‘반민중’은 타도할 대상으로 부각된다. 그리하여 미군정 하에서 만들어진 제헌헌법은 ‘민족’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태백산맥’은 민족이라는 포괄적인 개념 속에서 ‘민중’과 ‘반민중’ 간의 서럽고 처절한 투쟁을 노래부르고 있으며 ‘외세’까지 가세한 싸움은 더럽기만 하다.

공자가 말씀하신 시경의 삼백오편을 한마디로 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는 것은 민중의 생활 속에는 거짓(이데올로기 포함)이 없다는 뜻이리라. 농사가 잘되면 함포고복의 즐거움을 누리고, 배고프면 고통스러워하며, 그 절규는 개인의 이득을 위함이라기보다 몸과 피가 부르는 절실함이기에 위정자나 제자들에게 “민초들의 소리에는 거짓이 없다. 그러니 그들의 소리를 들으라”고 소리친 것이다.

‘태백산맥’은 사특함과 거짓이 없는 민중의 소리를 짓밟아 누르려는 거짓으로 점철되고 사특한 위정자와 재력가와의 충돌에서 민중들이 산으로 쫓겨가고 굶주림과 헐벗음 속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그들은 ‘평등과 자유’를 얻은 것이다. 산 아래에선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나눠주지 못했어도 빨치산의 산 위는 ‘공산주의의 이념’ 아래에선 그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유와 평등’이었지 ‘공산주의’는 아무래도 좋았다.

3. 공산주의, 당, 국가. 민주주의

자유란 얼마나 기가 막히게 좋은 소리냐? 그러나 자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답할 자신이 없다. 민주란 또 얼마나 환장할 소리던가?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울부짖으며 거리에서 찾아낸 민주주의 속에서 민주의 뚜렷한 실체를 나의 뛰는 가슴으로 뽀돗이 보듬을 수 있었던가?

자본주의 국가도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도 자신들의 政體를 민주주의공화국이라고 한다.

북한의 현행헌법 제1장 제1조에 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라고 되어 있다. 같은 장 제4조에 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와 모든 근로인민에게 있다. 근로인민은 자기의 대표기관인 최고인민회의와 지방 각급 인민회의를 통하여 주권을 행사한다.”라고 쓰여있다. 제1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 제12조 “국가는 계급로선을 견지하며 인민민주주의독재를 강화하여 내외 적대분자들의 파괴책동으로부터 인민주권과 사회주의제도를 굳건히 보위한다.”라는 등의 알송달송한 말들을 지껄인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이 끝나고 프롤레타리아가 성취한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었다. 공산주의는 전세계 프롤레타리아가 일치단결하여 해방의 그 날을 맞이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 인민(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 근로인민)에 의한 一黨 만이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독재를 한다. 이러한 독재는 인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주의 독재이다.

공산주의가 성취되지 않은 바, 서방 제국주의에 대응하고 반동의 발호(적대분자들의 파괴책동)를 근절하고 세계 적화의 그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그들은 일당 독재(령도)에 의한 일국사회주의 국가의 성립을 필요로 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맞는 셈이다.

이러한 一國社會主義는 당의 령도 하에 서방 자본주의 제국에 대항하여 반동들의 준동(생산수단의 확보)을 막기 위하여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가 접수(사적소유의 근절)하고 전체주의에 입각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일국 사회주의라는 것은 결국 가장 거대한 ‘주식회사 소비에트 1노동자·농민·병사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로 변모했던 것이다. 모든 생산수단은 당이 지배(100% 지분소유)하는 국가가 소유하며, 프롤레타리아(인민)는 노동을 하고 소비를 하는 가장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일국주식회사가 되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자본집약에 따라 빠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나, 결국에는 효율성을 잃어버린 거대 공룡기업이 도산이 바로 1991년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인 것이다.

그러니까 소련은 의제 자본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지금 중국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등소평이 지껄이면서 경제적 빈곤과 낙후에서 탈피하는 과정에서 벗어난 만큼 중국의 주요모순은 이제 인민의 물질적 욕구와 낙후된 사회생산력 간의 차이로 인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시장경제를 도입해야겠다는 ‘남순강화’는 한마디로 “우리도 자본주의 한번 해 보자”라는 소리이다. 그러니까 공산주의는 영원한 이념일 뿐이라는 말이다.

자유와 민주가 실체없는 영원한 염원인 것처럼 염상진, 하대치, 김범우, 외서댁, 손승호… 그들은 다가가지 못할 영원한 이념을 위하여 우리의 산하에서 피로써 사라질 일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곳에 자유와 민주가 꽃피우고 모든 이들이 함께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푸르른 동산이 가꾸어 질 것인가? 아니면 역사의 되먹지 못한 날조가 그들의 이름을 더럽히고, 그들은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사라질 것인가?

4. 감상

몇장을 남겨놓지 못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태백산맥’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 민족은 살아남았고 살아갈 것이라는 것, 미선이 효순이를 미군 탱크바퀴 아래 보내면서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라는 것, 비굴한 우리야 말로 민족과 언어을 지키는 바로 그 힘이라는 어느 늙은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살아갈 것이라는 것이 이 ‘백두대간’을 지켜온 우리들의 함성인 것이다.

이 책을 읽도록 권고해 주신 이웃분들께 감사드리며, 책의 마지막에 있는 글을 올린다,

나는 ‘태백산맥’의 거대함을 사랑하기 보다는, 그 구체성을 사랑한다. 구체성이라는 것은, 삶과 역사에 대한 직접성이다. 이데올로기는 삶에 대한 직접성을 확보함으로써만 역사 앞에 순결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관념이 아니라 생명의 분비물이다. 생명의 분비물일 때만,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가동시킨다. 우리는 ‘태백산맥’에서 그렇게 역사를 가동시키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읽는다.

김훈(문학평론가)

태백산맥을 읽는 도중에…

우리의 70년대의 팔부능선과 80년대를 지나며…


드디어 육이오가 터졌다. 그리고 벌교도 인공 치하에 들어갔다. 여기까지 읽었다.

역사와 민족을 앞에 놓고 과연 양심과 정의가 비굴과 불의를 꺾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나에게 밥그릇을 생각할 수 밖에 없도록 조정래씨는 그렇게 <태백산맥>을 썼다.

<밥그릇>이 모든 이념에 앞설 수 밖에 없다는 것 또한 이데올로기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성>과 <밥그릇>, <역사와 민족>과 <밥그릇>

여기에서 우리는 뚜렷한 진리의 낱말들을 맞이하게 되는 데, 그것은 <이성과 역사와 민족>에 앞서 바로 <밥과 몸>이다.


79년 봄, [암태도 소작쟁의]를 읽고 난 후, 신입생들은 분노했다.

그러니까 놈의 의도는 고스란히 성공한 셈이었다. 후일 사람들은 그것을 의식화라고 했고, 신입생들은 당장에 써클에 가입하겠다고 볼펜들을 꺼내들고 있었다.

그때 교내에서 몇번인가 스쳐지났던 것 같은 여학생이

<비록 암태도의 농민들은 배운 것이 없어도 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하여 이렇게 노력했어요. 배운 우리들은 뭔가요?>라고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아무도 이런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우리 앞으로 맑스의 책도 읽읍시다.>

나는 아무 말없이 햇빛이 스며드는 지하 써클실의 한쪽 구석에 앉아서 그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 있었다.

<고문님! 한마디 하시지요?> 회장으로 있던 놈이 고문도 아닌 나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놈에게 보냈지만, 놈은 자꾸 재촉하는 눈치였다.

<여러분께 한마디 묻겠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책을 얼마나 읽으셨나요?>

신입생들은 별로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책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는 여건에 놓여 있는 셈입니다.>

사실 당시는 E.H.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 조차 뻑하면 판금이 되거나 해제가 되곤 하던 시절이었다. 사상서적을 몰래 거래하고 있던 우리가 잘가던 서점의 다락방에도 맑스의 책을 찾아볼 수 없었고, 주인에게 [자본론]을 구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그것 만은 안돼>라며 적발이 될 경우 빼도 박도 못하게 빨갱이가 되는 만큼 딴 서점에 가서도 그런 말은 말라고 했다.

<암태도에서 벌어진 이 소작쟁의에 대해서 저는 여러분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할 것인가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여러분은 소작인들이 의식을 갖고 투쟁을 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는 데, 저는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빈곤에는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나 저나 상대적 빈곤은 경험했을 순 있어도, 기아상태라는 절대적 빈곤은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상대적 빈곤 상태에서는 빈부를 관념적으로 생각하고 부자들에게 대항하기 때문에 의식적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빈곤상태에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의 행동 밖에 남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행동이 있었고 그 행동 위에 공산주의가 기생했을 뿐 입니다.>

<그리고 명확히 해야 할 것은 이 자리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자리이지, 이른바 빨갱이를 만드는 써클이 아니라는 점 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셨다면 자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끝내자 친구 놈은 <야! 니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내가 깜빡했던 것인 데, 너 말 잘했다>며 내 등을 두드렸다.

아직도 어떻게 놈과 내가 만났는 지 이해를 할 수 없다.

이학년 가을 학기에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대운동장이 내려다 보이는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그때 닫혔던 교문이 열렸고 일대의 데모대들이 교문을 나선 후 다시 교문이 닫혔다. <또 군대갈 놈들 여럿 생겼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교문을 나선다는 것이 경찰서 지하에서 몇일을 보낸 다음 전방으로 배치되는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부나비처럼 교문을 나서고 있었고, 그것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잔디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그때 내 옆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놈을 보았다. 나는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직도 놈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음을 알고 <무슨 할 말 있냐?>하고 물었다.

<너 나하고 운동써클 만들 생각없냐?> 놈은 뜬굼없이 그렇게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년동안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놈과 한번도 이야기를 나누거나 한 적이 없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이 학과 내에서 누구와 어울려 노는 것조차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런 것 생각해본 적 없는 데… 써클이라는 것 자체가 성격에 맞질 않아. 그래서 학교 내 써클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어. 게다가 운동이라면 나는 국가나 민족에 대한 환상을 티끌만큼도 가지질 않고 있어. 나한테는 운동을 할만한 동기가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니가 번지수를 잘못 찾아 온거야.>

놈은 학교 써클보다는 단과대학 내에 써클을 만들려고 협력자를 찾아 왔는 데 내가 가장 적합한 것 같았다고 하며, 한달여를 내 주위를 맴돌았다고 했다. 그 결과 자신의 판단이 그르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놈이 내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질 못했다.

놈에게 민주주의가 뭔지를 아느냐고, 아니면 운동을 하려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려다 만약 그것을 물으면 전도를 한답시고 돌아다니는 기독부 아이들처럼 개거품을 물고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운동에는 체질이 안맞아. 원님도 자기 싫으면 그만 이래는 데… 운동이야 더 말할 것 없지.> 그러나 놈은 한번 잘 생각해보라고 했고, 힘들일 것 없이 다른 놈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학기가 지나면서 간혹 복도에서 놈을 마주치면 <그 일 잘되가느냐>고 물었고 놈은 <그저 그런대로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강포했던 유신의 정권이 기세가 등등해질수록 학원가와 사회는 조용했고 볼 것 없는 일간신문보다 스포츠신문이 더 잘 팔리기 시작했다. 칠십년대가 팔부능선을 넘던 그 즈음에는 뜨거운 물일수록 김도 안나듯 폭압이 거셀수록 그 폭압을 실증적으로 느낄 수 없어서 교정 위에 터지는 최루탄과 진주해 오는 군경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단지 수위실에서 <회수권>을 팔던 수위라고 생각했던 작자가 학생을 불러 큰소리를 치며 뺨따귀를 갈긴다던지 하는 일들이 가뭄에 콩나듯 터지고 또 잠잠해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복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학생을 보고 교정이 술렁이더니 <저 새끼들 쳐 죽여!>라는 소리가 들리고, 기새등등하던 사복들이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비굴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밀려오는 학생들을 보고 <이 자식들이 건방지게…>라고 하더니 <튀어!>라고 소리를 치며 넥타이를 휘날리며 언덕 아래로 치달려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정 위로 최루탄을 펑펑 쏘아대며 군인들이 들어왔다.

교정에 난입한 군인들과 가차없이 뿜어져 나오는 최루가스를 피하여 나는 건물 안으로 도망쳤다. 군인들은 도서관과 건물 각층의 복도에 쉬우쉬우 소리를 내는 최루탄을 무자비하게 퐁퐁 쏘아 넣고 있었다. 복도에 쓰러져 있는 학우의 허리를 잡아 일으켰을 때, 나의 허파 또한 멈추었고, 한줌의 공기를 염원하였다. 그를 부축하고서 공기가 있는 수면 위로 올라가듯, 계단을 올라 꼭대기 층에 있던 강당에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 건물 아래에는 포연처럼 여기저기 최루 연막이 뿜어져 나와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교정을 가득 채운 연기를 보고도, 복도에 쓰러져 먹은 것을 개워내던 학우를 보고도, 언덕 위에서 린치를 당하던 학생을 보면서도 나는 울분하지 않았고, 분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그때야 알아챘다.

연막이 걷히고 교정 내의 학우들이 패잔병처럼 교정 곳곳에서 흘러나와 교문을 지나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건물을 나서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군인들의 무표정하고 지친 눈동자를 보았을 때, 부질없는 짓거리이자, 약자에 대한 과잉반응이 시스템적으로 이루어지는 공화국에 대하여 웃음이 나왔다.

겨울방학이 시작하려고 할 즈음에 놈이 다시 왔다.

<사실 딴 놈에게 말해 보질 않았어. 난 니가 적격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왔지.>

<네 제안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어. 결론을 나는 나의 비굴함 때문이라고 내려고 했는 데, 사실 그것이 아니었던 것 같아. 사실 나의 비굴은 내가 비굴해질까봐 겁이 난다는 것인 데… 나는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좀 있어. 경찰에 불려가서 책상 한번만 쾅 쳐도 다 부를 것 같거든…>

<우리가 무슨 나쁜 짓 하냐? 그리고 다 부른다 해도 괜찮아.>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는 분노할 줄 모른다는 거야. 분노하지 못하는 데 무슨 운동이냐? 그러니까 비굴함과 무감각의 짬뽕인 데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취미생활이거나 오락 밖에 더 되겠어?>

놈은 잠시 생각한 후,<알았어! 그럼 다시 너한테 써클 만드는 것 부탁 안할테니 다른 부탁 하나만 들어줘.>라고 말했다.

<뭔데?> <방학동안 나와 스터디 좀 하자.> <무슨 스터디?> <그러니까 사회과학 서적을 함께 읽고 토론하자는 것이지> <그건 그렇게 하지>

겨울방학동안 우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오후 네시에 만났다. 단과대 삼층 구석에 있던 가설독서실에 방학을 기하여 <어떠저떠한 이유로 학생들의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써 붙인 뒤, 놈은 학생처로 가서 <방학동안 아무개 교수의 프로젝트 때문에 독서실을 방학동안 사용해야 된다>며, 열쇠를 받아왔고 복사를 해서 나눠 가졌다.

우리는 매주 두권의 책을 읽고 토론했다. 토론이 끝나면 놈은 어떻게 섭외를 했는 지, 그간의 운동 전력 때문에 학내 써클에서 정식활동을 못하고 낭인처럼 지하 써클 활동을 하던 이른바 <고문>들을 불러와 우리가 읽었던 책에 대한 강평을 듣거나, 아니면 해방 후의 한국의 정세, 아니면 향후의 정세 등을 이야기 했다. 그들은 보통 졸업학년이거나 휴학한 채이거나, 아니면 아예 제적된 상태로 학내를 전전하고 있었다. 통상 토론과 강평이 끝나면 여섯시 삼십분 쯤 되었고, 어둠이 자글거리며 깔리는 교정을 지나 로타리 옆의 술집에 들어가 막걸리를 마셨다. 방학을 맞이하여 텅빈 술집 한귀퉁이에서 남았던 이야기를 소근거리며 끝내고 술값을 계산하려면 누군가가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아이 씨팔! 새끼들이 계산을 했으니 우리 더 먹자. 이 술 국민의 세금으로 마시는 거다. 짭새가 내는 것 아니란 말야. 먹어! 아줌마 파전도 하나 더 주고요.>

그러나 그 해 겨울동안 읽고 독서실 창 가에 앉아 토론한 것들은 정작 쓰레기들에 불과했다. 리영희씨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어떤 특정 사실을 놓고 이야기했기에 이해가 좀 쉬웠다면, 우리가 읽었던 책들은 이른바 사회과학총서들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듯 숱한 아무개의 예문과 단편적인 사실들을 가지고 직조한 형태인데다가, 불온서적이라는 말에 걸맞게 아마추어적인 번역과 제본 상태로 독해가 어려웠다. 그런 책을 읽기 위해서는 씨줄인 맑스의 글이나 포이에르 바흐, 아니면 하버마스 등이 저술한 온전한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그들의 이름조차 잘 몰랐고, 또 그런 책을 구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 였다. 만약 당시에 맑스의 책을 누군가 읽었다고 한다면 아마 우리는 그를 세상의 모든 지식을 소유한 사람처럼 우러러 보았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이해의 수준이란 E.H.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조차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의 경우는 나보다 더 한심한 수준이어서 토론시간의 대부분을 녀석에게 오히려 내가 개념을 설명해주고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될꺼야>라고 방향을 잡아주고 있었다.

<일학년 때부터 운동써클 돌아다니고 했다면서 뭐한 거냐?> <딴 놈들도 매한가지야. 나나 그 놈들이나 그것이 그것이야.> <이렇게 무식해서야 무슨 학생운동이냐? 뭘 알아야 면장이라도 해 먹을 것 아니야?> <내가 그 정도만 되었으면 너하고 스터디 하자고 했겠냐?>

어찌되었건 그 해의 겨울이 지나고 삼학년이 되었다. 신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아이들 사이에서 놈의 이야기가 떠돌더니 <야! 써클 드디어 조직했다. 써클룸도 하나 얻었구.>하고 웃음을 지으며 놈이 나에게 다가와 <이제 너도 회원가입 하지.>하고 권했다.

<네 부탁은 다 들어준 것 같고, 겨울방학동안 아무리 읽어봐도 운동을 왜 하는 지 더더욱 모르겠더라고… 이제부터 나도 학점이나 신경쓰고 공부를 더해야 겠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소설책을 덮었고, 인문서적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수업에 꼬박꼬박 들어가 필기를 하는 것은 물론 부교재라고 했던 참고서적들을 사서 읽고는 했다. 너무 열심히 해서 어떤 과목은 한학기가 지나자 노트가 세권이나 되었고 관련서적을 대여섯권을 읽을 정도였다. 그러나 학점을 신경썼다기 보다,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겠다는 심산이었기에 아직도 전공과목은 잘 해야 B였고 타대학의 수강과목은 A플러스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놈은 아예 수업은 작파하고 도서실에 눌러 붙었다. <너 잘못하면 ○○○○ 학점 안 나올지도 몰라, 교수가 출석부를 때마다 없다고 본때를 보이겠다고 하던데…>하면서 놈이 읽고 있는 책을 보니 일어로 된 책이었다. <너 일본말도 할 줄 아니?> <아니 우리나라 책은 안되겠고, 할 수 없이 일본말 좀 배워서 읽고 있는 중이야>

내가 볼 때 놈은 정말로 한심한 놈이었다. 당시 학교 뒤에 있는 절 부근에 살고 있었는 데, 편모에 외아들이었다. 본래 쌍둥이로 태어났는 데, 촌에서 살다보니 한쪽이 죽어 두 몫을 살라고 이름 자 가운데 <쌍>자를 넣어주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환갑이 넘었는 데도 아들의 학비 마련을 위하여 삯바느질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놈은 공부할 생각은 않고 비싼 일본책이나 사서 읽고 수업은 내팽개쳤으니… <넌 니 어머니 생각하면, 이 책이 읽히냐?>하고 도서실을 빠져 나왔다.

본시 나란 놈은 사상하고 관계가 없지만, 그 해 일학기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하여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단한 것 같지는 않았기에 불교를 공부하고자 그 날 수업이 없어도 새벽이면 한문강독을 들으러 갔다. 그리고 여자친구나 만나러 갔고, 그녀의 브라우스가 바람에 휘날리며 풍겨오는 샴푸냄새에 이미 한 겨울동안 읽었던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이상하게도 고등학교 때부터 <박정희>가 잘 아는 사람에게 총에 맞아 죽을 것이란 것을 당위론적으로 느끼고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으며 그 다음도 군부가 등장하리라는 것을 투명하게 알고 있었다. 단지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은 언제 그 일이 벌어질 것이냐 였다.

가을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징집영장이 날아왔다. 거기에는 11월3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학과친구들이 졸업 여행을 간다고 할 때까지도 휴학계를 내지 않은 상태였기에 못간다며,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0월 27일 아침 새벽 네시에 나는 깨어 있었다. 밤을 세워 가며 책을 읽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방송이 시작할 시간이 아님에도 무료함에 라디오를 켰다. 쉬이이- 소리 만 나야 할 라디오에서는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아주 단조로운 음악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께서 위독하셔서 통합병원으로…자세한 소식은…> 하는 방송이 나왔다. 아버지를 깨웠고, <박정희가 죽은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렸다. 인공치하의 지하에서 유엔군 방송을 듣는 사람들처럼 소리를 죽여가며 간헐적으로 들리는 <자세한 소식은…>을 들으며, <죽었다는 거야 살았다는 거야>하며 새 소식을 기다렸다. 여섯시가 되자 弔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몸에 소름이 돗기 시작했다. <드디어 죽었다.> 아마 나의 뇌리를 스치던 낱말은 아마 <해방>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한숨을 푹 쉬시며 <한 시대가 갔네. 이제 민주주의가 오려나?>하고 날이 밝아오는 마당으로 나가셨다.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생각을 접고 잠에 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 <아참, 휴학계!>를 소리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학교로 나갔다. 후문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정문을 지나 당도 했을 때, 교문에는 화이바를 눌러 써 그 표정을 가늠할 수 없는 군인들이 탄띠에 M16을 걸쳐논 집총상태로 서 있었다. 약간 겁이 났지만,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저어~>하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둘 밖에 없던 그들은 나보다 더 긴장을 했는 지 후다닥 앞에 총 자세로 나의 늑골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뭡니까?> <저어~ 휴학계 내러 왔는 데요. 저도 군대가야 하거든요.> <학교는 당분간 휴굡니다.> <언제까지요?> <모릅니다.> <그럼 휴학계는 어떡하구요?> <우린 모릅니다. 한번 정문에 가보시죠.> 정문 앞에 가도 중위는 모른다며 언젠가는 열릴 것이며, 군대가면서 휴학계 안냈다고 제적은 안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나에게 중요한 것은 <교련혜택>을 받아 복무기간을 단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교의 이곳저곳에 전화를 하고, 오전 오후로 전화를 해댄 지 삼일 만에 학적과를 학교 앞 서점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접하고 후다닥 뛰어가 <휴학계>를 내고 <군에 제출할 서류>를 받아들었을 때는 10월도 하루를 남겨놓고 있었다.

다음날 저녁 졸업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친구들이 느닷없이 집으로 쳐들어왔고, 놈들을 데리고 집 앞의 돼지갈비 집으로 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 말 않고 군대 홀랑 가버리려고 하면 어떡하냐?> <그러면 졸업여행 가는 놈들을 붙들고, 입대하니까 술 사달라고 할까? 술 안먹으니까 좋은 데, 술에 절어서 군에 가면 좋을 것 있냐?> <근데 우리 설악산에 있을 동안 너는 뭐했냐? 우리는 이 자식 때문에 죽는 줄 알았다.>

나는 10월27일에서 부터 휴학계를 내기까지의 이야기를 했고, 친구들은 한 놈이 술 처먹고 지랄하다 산 속에서 다리를 다쳐 서로 업고 이고 하면서 설악산을 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야! 박정희가 죽었으니 민주주의가 오겠지?>하고 물었다. <내 느낌에는 다시 군부가 집권할 것 같아. 그런데 너희들 중 써클 가입한 놈들 조심해야 될꺼야.> <걱정마! 전투경찰에 1월에 가기로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다시 군부가 정권을 잡기야 하겠냐?> <정승화가 딴 맘 먹으면 넘어가는 것 아니냐?>

입대한 11월 3일은 국장일이었다. 그 해 11월은 그렇게 추워서 낙엽이 지기도 전에 얼음이 얼었다. 병영의 밖은 소란스러워도 삼군사령부에서 내려오는 전통은 우국충정으로 가득했고, 개구리가 까끌까끌 울어대는 소리가 들릴 때 쯤, 멀리 광주에서 난리가 난 것을 알았고, 불현듯 친구들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두번째 휴가 때 쯤 만난 친구들에게 들은 소리로는 써클에 있었던 몇 사람과 친구가 그 해 오월에 기관에 잡혀 들어갔으며, 다시 학교로 돌아왔으나 모두 입을 열지 않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남영동을 스쳐지날 때, 길거리에서 전경을 간 친구를 만났고 놈은 <삼일째 잠을 못잤다>고 하며 포주들을 잡아 삼청교육대를 보내려고 용산역 사창가를 외곽 포위를 햇는 데, 포주는 한 놈도 못잡고 억울한 <비어홀> 웨이터 몇놈 잡아 청송으로 후송 보냈다며 <아이 씨팔! 편안하다는 전투경찰되려고 시험보고 9대1로 합격했는 데… 이게 뭐냐?>라며, 방패를 들고 <제대한 후 보자>라며 삼각지 쪽으로 이동했다.

복학을 한 후, 학교로 돌아가 어떻게 어떻게 하여 놈의 소식을 들었다. 대학 내에 설치했던 그 운동써클은 놈이 잡혀간 후, 가담자 전체가 기관에 불려가고, 담당교수도 불려간 후, 즉시 폐쇄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불려가자 마자 모든 것을 토설했고 학교로 돌아와 서로를 미워하더니 하나씩 군대로 갔고, 놈은 독자이자 환갑이 넘은 홀어머니를 모신다는 관계로 군대도 못간 채 눈총을 받아가며 홀로 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졸업을 하자 기관에서 <괜히 취직도 안될 것, 우리가 융자를 해줄 테니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나 짖는 것이 어떻냐?>고 했고, 놈은 더러운 돈을 꿍쳐들고 낙향을 했다고 했다.

<졸업은 한 모양이군? 돈이라도 마련해서 고향으로 내려간 것은 다행이야. 군사정권의 은전을 톡톡히 봤어. 이제 어머니는 한 시름 놓겠군.>

그 후로 놈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홍콩에서 아내가 잘 안다고 같은 학부형이던 학교여선배를 소개해주었고, 선배의 남편을 만났을 때, 서로가 <어디서 보았지?>하다가 그 해 겨울을 기억했다. 그는 우리가 학교에서 책을 읽고 난 후 강평을 하러 왔을 때 만났고 술집에서 나는 그의 웃음이 멋지다고 한 적이 있던 것으로 기억했다.

<선배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 지?>

<팔십년 그 해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나와 아내는 같이 고문을 당했고 아내는 어떻게 어떻게 참아냈는 데 나는 그들이 불으라는 것을 불 수 밖에 없었어. 지금이야 말할 수 있는 데, 거기에 불려간 자들은 다들 불었어 그러나 밖에 나와서는 아무도 불었다고 하지 않았지. 거기에서 나는 잘못한 거야. 나만 자백했다고 했지. 나는 아무 곳에도 발붙일 곳이 없었지만 아내 만이 나를 이해했어. 그래서 아내와 결혼을 하고 대만으로 가서 동양철학을 공부했어. 그러다 보니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쪽 저쪽을 떠다니기만 하고 있어.>

우리 식구와 선배의 식구는 간혹 사이쿵이나 청짜오 등을 놀러갔지만 우리는 더 이상 옛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배의 식구는 광쪼우로 이사를 갔고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제 검색창에 친구의 이름을 쳤다. 워낙 독특한 이름이라 놈의 이름과 고향이 명확하게 겹쳐지며 주루룩 올라왔다. 한동안 올라와 있는 내용들을 보았다. 놈의 큰 자식은 이미 서울대학 생명어쩌고 저쩌고 학과에 들어가 있었고, 사진으로 보는 놈의 얼굴은 햇볕을 바라보고 사는 직업 때문인 지 많이 늙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얼굴처럼 들뜨고 어설프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 금과 얼룩이 뚜렷하게 자리잡혀 있었다. 놈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수입농산물 개방반대, 민주노동당, 포도재배에 대한 이야기 등등이 얼금설금 섞여 있었다. <이 친구는 평생 어쩔 수 없군> 하고 중얼거렸지만, 나의 삶과 형식이 천박할 수 밖에 없어 아침이면 샤워를 한다, 면도를 하고 스킨을 바른다 하며 껍데기를 관리하고 있지만, 놈과 같은 얼굴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할 때, 지난 스무몇해를 매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놈의 게시판 위에 <나다. 아무개> 하며 글을 남기려다, 나는 그만 두고 말았다.

젊은 시절 내가 회피하고자 했던 그 <비굴>, 자신이 감내해야만 했던 <비굴>을 놈이 다시 기억하지 않을까 해서…

비록 예상했던 것처럼 <비굴>해질 수 밖에 없었던 그 상황에서 나는 벗어났지만, 놈이 감내할 수 밖에 없었던 좌절과 굴욕보다 더할 수 없는 <수치>를 민주화의 그 날에 만날 수 밖에 없었다. <박종철>이 죽어간 그 해, 비둘기만 날고 차들 만이 씽씽 달리던 시청 앞에, 학생과 시민들이 몰려들고, 최류탄이 충정로에 기인 꼬리를 그리며 달려가고, 거리의 곳곳에서 <물러가라 군부독재>를 소리치며 지하철과 시청 앞 광장으로 사람들이 밀려들 때, 민주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주춤거리며 왔으며 얼마만큼의 오욕의 상채기를 저들의 가슴에 알알이 못박았는가를 생각했다.

민주와 자유라는 것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분노하며 울분을 터트렸을까를 사무실 창 가에서 몰려드는 군중을 보며 생각했다. 소리와 함성과 군중의 수가 늘어나고 드디어 <육이구>선언이 터졌다. 그 날 북창동 가화 다방에서 나는 <민주화 기념>으로 주인이 베푼 공짜 커피를 마신 후, 결국 돈을 내고 나왔다.

동료가 <공짠데 왜 돈을 내냐?>고 했고, 나는 <최소한 나에게 민주화는 공짜루 왔기 때문에 커피값을 낼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수치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회피했던 <비굴>이 운명처럼 다가왔을 때, 나는 어떠했을까 했다. 아마 비굴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나 역사는 다시 오지 않는 것이기에 나의 교묘한 선택은 <비굴>보다 더 한 <수치> 속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었다.

어쩌면 민주와 자유라는 찬란한 추상은 피와 오욕과 비굴을 빨아들이며, 견고한 독재와 폭압을 뚫고 나와 결국 나와 같은 자 앞에서 수치를 일깨우며 꽃을 피우는 야비한 속성의,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미완의 몽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