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 물빛 그리움 2를 보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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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동안 비는 끈덕지게 내렸다. 무더운 마음에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는 것 같았다. 가을이 왔고 기지개라도 펼까 했더니 한가위를 앞둔 가을비에 세종로까지 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북악산 사면을 따라 부암동으로 쏟아져 내린 빗물은 필시 골짜기의 나무가지를 꺾고 바위의 뿌리를 뽑아 다른 곳으로 흘려보낸 후 휩쓸린 자리 위에 토사를 내질러 놓았을 것이다.

이번 비로 부암동의 모습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세상도 고여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론 흐르고 떠내려가는 것인가 보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고 한다는 것을 그동안 나는 몰랐다.

앞으로의 부암동 계곡은 올해 떠내려간 그 계곡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내가 인사동의 갤러리M으로 발길을 잡은 것은 작년과 올해의 물빛은 어떻게 다를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 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올해의 빗물에 떠내려간 부암동의 녹슨 경치를 다시 한번 바라보고 싶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왜… 부암동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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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의 물빛에 대한 연작시리즈인 <부암동, 물빛 그리움 Ⅱ>의 전시회가 9.29~10.5일에 걸쳐 인사동 갤러리M에서 열렸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이다.

월요일 오전의 인사동처럼, 갤러리 안은 아직 한가했기에 그림과 거리를 두고 시간을 갖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 오전의 햇살이 갤러리 안으로 조용히 스몄고 간만에 맞이한 맑은 햇살 탓인지 부암동의 물빛이 작년과 다르다고 느꼈다. 물빛은 무슨 일인지 몰라도 작년보다 따스했고 조용했다. 갤러리 안으로 스몄던 햇살 탓일까?

잠시 넋이라도 놓고 있었던 탓인지 모르지만, 나른함이 지나가자 다른 곳은 왜 안되고 부암동의 물빛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분명 김태균씨의 <부암동, 물빛 그리움>의 연작은 풍경화라고 하지만, 넓은 풍경을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계곡 속 후미진 정경을 응시하는 작업이라서 미시적이다. 그의 그림은 풍경화라기보다 오히려 정물화를 닮은 것 같다. 그러니 아무 계곡이나 들어가 물빛을 그린다고 하여도 부암동의 물빛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 전시회의 타이틀 중 <그리움>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수 밖에 없다. 소귀 신영복 선생은 “그리움이 그림이다.”고 말한다.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을 그릴 이유란 없다. 보고 싶어도 어느 것이 더 보고 싶은가에 따라 우리는 도화지에 선택적으로 더듬더듬 그리는 것이다.

여기에 김태균씨의 시선이 부암동에 멈추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에게는 세상의 어느 물빛보다 부암동 계곡을 흐르다 멈춘 웅덩이의 그 물빛이 더욱 그리운 것이다.

그리움이 깊어야만 그림에 맺힌 빛과 그림자의 울림이 큰 것은 아닐까?

물빛의 화가,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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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렬씨를 ‘물방울의 화가’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 늘 물방울은 놓치고 그만 빛이 맺히고 결국 터져버리는 그 순간만을 기억한다.

두번의 연작을 통해서 김태균씨는 ‘물빛의 화가’라는 아이덴티티를 확보할 충분한 지점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 아이덴티티라 함은 어떤 정체성 속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험과 연구의 방향을 잡고 천착해나갈 어느 지점에 마침내 도달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물빛은 어렵다. 김창렬씨의 물방울에 맺히는 물빛은 한 점의 빛이라 기하학적이고 선명하다. 고인 물과 흐르는 물에 어리는 빛은 선이기도 하고 면이기도 하고 무늬이기도 하며 맺히기보다 퍼지며 물빛의 비추임과 일렁임을 함께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김창렬씨의 그림에서 나는 소리는 쨍하다. 바다의 물비늘의 소리가 고음이고 자글댄다면, 강물의 일렁임은 파동이 길어서 저음이다. 부암동 물빛이 담은 소리는 고요하다. 하지만 고요는 들을 수 없어 삼엄하다.

물빛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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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의 그림이 서양화의 오소독스한 기법에 근거하지만, 김태균씨를 물빛의 화가라고 한다면 물활론적 사고가 결여된 서양의 사유보다 생생하고 불식하는 동양적 사유를 통하여 그림 속의 물빛의 신비를 탐구해볼 필요도 있다고 본다.

우리가 잘아는 오행에는 물이 한번 나오지만, 주역을 이루는 팔괘에서는 두번 나온다. 물빛을 이야기하기에는 팔괘에 나오는 두가지 물(水)을 비교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좋다. 팔괘에는 물(水)을 뜻하는 감(坎)괘와 못(澤)을 뜻하는 태(兌)괘가 있다. 하지만 이 둘의 성질은 사뭇 다르다. 강물처럼 흐르는 물은 빛을 빨아들이고, 물이 고인 연못은 빛을 반사한다. 그래서 감수(坎水)는 검고 위태하며 계절은 겨울이고 방위는 높(北)다. 사신(四神)으로는 현무(玄武)이고, 그 성질은 오행 중 물(水)에 해당한다. 반면, 태택(兌澤)은 하얗고 기쁘며, 계절은 가을이며 방위는 하늬(西)다. 사신으로는 백호(白虎)이며, 성질은 오행 중 쇠(金)에 해당한다.

그러하니 김태균씨가 그린 부암동의 물빛은 태괘를 적중한 셈이다. 그의 물빛은 고여있어 고요하고, 부암동 계곡물은 가을을 담고 있으며, 세상의 풍경을 받아들여 다시 토해낸다. 그 풍경은 오목하되, 하늘을 받아 다시 드넓다.

태(兌)괘에 마음 심(心)을 더하면 기쁠 열(悅=說)이다. 흐르는 강물이 빠져나가는 쪽을 보면 우울해지지만, 연못이나 호수를 보면 사람의 마음은 편안해지고 희락해진다고 한다. 송나라의 정씨 형제는 논어의 첫구절 학이시습지에 나오는 열락에 대하여 “樂이 드러나 밖으로 떠들썩한 즐거움이라면, 悅(=說)은 가슴 속에 차오르는 기쁨이다.”(說在心, 樂主發散在外)고 한다.

부암동의 물빛을 보면서 우리는 가슴 속에 차오르는 기쁨을 맞이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편안하고 고요한 기쁨이 찾아온다.

사물의 경계에 대한 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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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가 자연의 끝에 부딪혀 소실되는 그 지점을 늘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바라보게 된다.

유화는 그런 점에서 동양화나 수채화의 먹이나 물감이 종이 속에 습합되거나 번지는 것을 보는 초조함과 같은 재미는 덜하다. 하지만 나는 늘 형상의 경계가 어떻게 표현되고 시간 속에 허물어져 내려 자연 속으로 회귀하는 사물의 윤곽에 집착한다.

김태균씨의 그림에서 경계면은 날카롭거나 초조하지 않다. 하지만 유심히 보면 치밀한 사생을 바탕으로 한 엄청난 공력과 작업들이 불필요한 색의 덧칠을 배제하고 사물과 빛과 그림자들이 각각 제자리를 잡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치밀하지만 오히려 간결하고, 때론 어두운 것 같지만 맑고, 밝아도 눈부시지 않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경계면이 지니는 긴장감이 적어 보이는 사물들은 햇살 아래 가라앉은 먼지처럼 고요하다.

이런 사물의 경계를 바라보는 일은 추상에서 즐길 일이 아니라 구상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부암동, 물빛 그리움으로 돌아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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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물빛 그리움>의 연작을 볼 때마다 예술이 염가화되는 이 시대에 다시금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된다. 이상한 일이다.

올해의 물빛은 작년처럼 물 밖 세계의 풍경을 받아 다시 토해내는 것보다, 밖의 빛을 물 속으로 잡아채 바닥이 이를 삼키고 은밀했던 개울과 웅덩이의 밑바닥을 물 밖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작년의 물빛에는 하늘이 많고 흰색으로 명료하면서도 물빛이 차고 깊었던 반면, 올해의 부암동의 물빛은 깊지 않고 은은하되 물빛은 오히려 작년보다 맑고 따스하다. 작년의 물빛은 전형적인 태괘의 빛을 간직하여 금속성의 빛을 간직했다면, 올해는 오방색 중 중앙토의 대지의 색깔이 수면 밑에서 떠오르며 오히려 은은하다.

그래서 올해의 부암동은 작년도 고요했지만 더욱 오붓하고 고요하다.

예술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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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위대한 희랍의 조각들과 건축물들을 목도하면서도 예술이란 이데아의 불완전한 그림자에 불과한 현상세계에 대한 미메시스의 결과물로 더욱더 불완전한 재복제물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플라톤이 예술작품을 이토록 폄하한 것은 논리의 함정에 빠진 것이거나, 美라는 것이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뚜렷한 광휘에 휩쌓여있다는 그 애매모호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반면 인간의 정신활동에 대하여 자연과학적 진리에 적용될 수 있는 이성적 설명은 안된다고 보고 인간의 정신적 산물에 대한 이해를 천착해나간 해석학적 방법은, 이해는 실존하는 개인들의 경험의 역사 속에서 개인들마다 고유한 것이지 자연과학과 같은 코기토에서 연역해낸 보편성은 없다고 본다. 이럴 경우 美에 대한 이해와 느낌은 보편성을 상실하고 개개인의 실존적인 특수성 속에 함몰될 뿐이다.

이런 이야기는 어떤 인간의 정신적 산물에 대한 평가는 개개인마다 달리 할 수 있고 정답을 달리할 수 있다는 의미이자, 뽕짝도 누구에게는 예술이 되고 누구에게는 천박하게스리… 라고 마음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예술이란?

이 물음에 확연한 어떤 이론도 미학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있고, 보편적인 설명이 가능한 것이라면 세상의 모든 예술은 보편적인 하나로 귀결될 것이며, 오직 보편성에 입각한  오직 하나의 예술작품과 그것을 만든 작가 외에 어떤 작품도 작가도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아무런 보편타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이 이성의 한계, 이것이야말로 세상에 온갖 예술이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모순이라는 점에서 대체로 예술이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우리는 묻는다. 또 예술가는 자신의 작업의 지평을 넓혀가기 위하여 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부단하게 되뇌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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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김태균씨의 작품을 마주하면서 예술이란 무엇일까를 묻게되는 것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은 분명 아니다.

이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인 동시에 후기 산업사회다. 예술은 시들어가는 반면, 명품이 만들어지고, 본질은 별 것 아닌데 명성(광고와 브랜드)이 본질을 뒤덮는 시대이다. 그러니까 정작 욕구는 중요하지 않고 허욕을 찾는 시대이다. 즉 헛물켜는 시대인 셈이다.

이 헛물켜는 시대에 기대여 살면서, <부암동, 물빛 그리움>을 보게 되면 무엇이 김태균 그를 모두 다 외면하는 구상작품을 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가 고집스럽게 포착해내는 물빛과 계절 속에서 무엇이 우리의 가슴 속 울림을 찾아주고 한낱 물그림자에 매료되게 하느냐 이다.

어떤 이론도 이야기도 믿을수 없고 단지 가슴에 물어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만히 바라보고 느낄 것이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을……

※ 작년의 전시회 그림을 보시고 싶으시면, 갤러리 갈라로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부암동, 물빛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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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던과 구상

벌거숭이 임금님이 있었다. 그는 멋진 옷을 사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옷을 선사하겠다는 꾀임에 넘어간 임금님은 결국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믿고 벌거숭이인 채, 자신의 옷을 자랑하기 위하여 저자거리로 나선다.

이 포스트 모던시대에 美란 벌거숭이 임금님의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아름다움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화되고 관념화되는 이 시대임에도, 예술이란 이성에 대하여 혁명한다고 한다. 그것이 이 시대에 있어서의 문예에 부과된 과제이며, 이성의 오염으로부터 해방한다는 복음이라고 한다.

이러한 복음이 오히려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함은 틀림없다. 이러한 사조는 보다 자유로운 작업의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소음을 배출하기도 한다. 그 소음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 아름답지도 못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감수해야하는 것, 이성에서 벗어났다고 하면서도 더욱 관념화되어 어느 전시회의 카탈로그의 서문이나 설명을 보면, 이해를 돕기는 커녕 이성이 만든 관념과 개념들이 난무하여 의미도 없는 헛 것이 얼마나 아름답게 명멸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움이 모호해지는 시기에 이르면, 작품보다 해설이 더욱 가치를 지니며, 그 해설 또한 탈구축(De-construction)화되어, 작가의 작업정신과 의도와는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이 해설자의 내적 체험 만 올올히 남게 되어, 작가와 작품은 서로 소외된다. 이러한 탈구축은 아름다움에 대한 객관성도 보편성을 깨부신다. 아름다움은 관객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그 무엇이 되며, 모든 텍스트에 있어서 작가의 의도와 작품에 대한 권위는 마땅히 해체되어야 하고 독자 스스로 작품을 창조해내가는 독법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구체의 풍경을 놓고, 보는 사람들의 눈을 이끄는 구상은 이미 철 지난 유행처럼 치부되기 마련이고, 구상작품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천만의 일이다.

하지만, 비구상이라고 하는 것, 이른바 추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인식 상 불가피한 요소이다. 모든 구상작품 또한 일정 수준의 미시적인 단계에 이르면 추상으로 마무리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세계의 빛을 모조리 세세히 남김없이 표현할 수 없기에 천차만별 약동하는 세계를 선과 면, 색으로 얼버무릴 수 밖에 없다.

이런 구상과 추상의 경계면에서 이발소 그림과 만화와 작품의 차이가 존재하게 되며, 작가의 시선에 대한 차이를 바라볼 수 있는데, 그 차이로 부터 독특한 미적 체험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부터 김태균씨의 <부암동, 물빛 그리움>이라는 연작들은 시작된다.

김태균씨에 대한 나의 정보는 딱 카탈로그에 나온 약력에 불과하다. 그보다 조금 더 안다면, 네이버에서 블로그를 하면서 알았던 이웃의 남편이라는 정도일 것이다. 부암동이라는 장소 또한 어렸을 적 통의동에 살았으면서도, 창의문 너머 잠박(창의문의 별칭인 ‘자하문 밖’을 잠박이라고 줄여부름)의 어느 곳에 있는 서울에서 가장 자연이 풍성하고 물과 공기가 깨끗한 동네라는 정도 밖에 모른다.

토요일 오후, 회사에서 잔무를 대충 끝내고 인사동에 들어섰을때 문화축제인가 뭔가로 소란스러웠다. 지도를 잘못봐서 다른 골목으로 들어섰다가 갤러리 갈라를 찾으면서 약간의 두려움이 생겨났다.

그림을 본 적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것, 그래서 미적 감흥에 매우 둔감해져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갤러리 갈라에 당도했을 때, 거기에는 가을 날의 물빛이 있었다.

물빛, 그 아름다움

물빛은 아름답다. 물은 세계를 들여마셨다가 다시 빛으로 토해내는데, 그것이 물빛이다. 바다에서는 물빛이 명멸하고, 강에서는 흐르며, 부암동의 웅덩이에선 비추인다. 한 여름동안 숲을 채웠던 매미소리처럼 소란했던 빛은, 가을이 끼치면 돌연 잔잔해져 수줍은 듯 하다.

부암동으로 간 작가는 낙옆 진 풍경을 헤치고 기어이 웅덩이를 찾아낸 후 물빛을 퍼올려 혹여 물에 파문이라도 일지 않을까? 바람에 흔들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캔버스 앞에 앉아 얇게 얇게 색을 더해 나간다.

조금 떨어져 보면 수채화같고, 가까이 가서 보면 색들의 밑으로 캔버스의 올들이 치밀기도 한다. 물감이 나이프로 이개져 엉켜있거나 붓의 터치가 드러나 거칠지 않다. 차라리 실의 올들에 스며있던 색이 바깥으로 우러난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래서 유화처럼 텁텁하지 않고 오히려 맑다.

그림을 보면서 가을빛에 대하여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은 셈이다. 가을이 맑은 것이 하늘이 높고 짙푸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빛이 여름처럼 발광하여 사물의 각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그윽해져 가는 빛과 친교를 맺고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다는 데 있다. 그래서 뚜렷하고 맑다. 또 드러냄의 형식은 차라리 정적이다. 부암동에서 느낄 수 있는 소리는 고요이며, 들을 수 있다면, 낙옆이 바싹거리거나 가을빛이 바위에 와서 부딪는 낯빛의 소리다.

부암동, 물빛 그리움의 연작 시리즈의 시선은 낮고 오목하며 드높다. 물빛에 어린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기에 낮을 수 밖에 없는 시선은 대지에 온갖 가라앉은 것들을 본다. 그래서 드높아야 할 가을의 모습은 아래로 떨어진 것들을 통하여 바라보아진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하늘은 때로는 순일하여 파랗다. 하지만 물빛이 삼키고 토해내는 하늘은 단일하게 파란 하늘과는 사뭇 다르다. 작가는 물이 삼키고 토해내는 세계와 하늘을 연작을 통하여 다채롭게 보여준다. 그것들은 대체로 얕아서 하늘과 바닥이 엉켜 그 색조는 누렇고 하얗게 하늘을 조탁해내지만, 때론 깊어서 남색으로 감기기도 한다. 낙옆들은 젖어있거나 마른 대기로 인하여 바싹 말라있기도 하다.

그래서 가을이면 평야와 산맥으로 펼쳐져 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시선을 작가는 잡아들여, 가을의 내밀한 오의로 이끌고 침묵과 고요 속에 머물게 한다.

이렇게 짧은 부암동으로의 산책은 끝났다.

그리움이라는 것은

신영복 선생은 그림은 그리움이라고 한다. 이 말씀이 맞다면, 그리움은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뚜렷한 구상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추상처럼 대상없는 아름다움도 추구할 대상이기는 하다. 나는 받아든 화보집을 몇번이고 들여다 보았다. 인사동을 벗어나 안국동 로타리에 섰을 때, 오후의 빛을 등에 진 인왕산이 눈 앞에 달려왔다. 가을이다. 우리는 눈을 뜨고 조락해가는 풍경의 향연을 바라보아야 할 때다. 바라보면서도 가을은 그립다.

또 다시 부암동, 물빛 그리움이 그립다.

2009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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