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 무모한 전쟁

명량을 보았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나라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영화다. 하지만 나도 이 영화를 보았을 뿐, 이순신 장군의 승리 모델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감독은 통제사령관인 이순신이 울돌목이란 수형수세를 놓고 전략적인 포석 아래서 전술을 구사해나갔는지 아무런 연구도 없이 덜컥 영화를 만든 것 같다. 13척의 배를 유기적으로 운용하여도 힘든 싸움에서 충무공은 장군선 한척 만으로 까맣게 달려드는 적선들을 감당하는 무모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당일의 난중일기에 쓰여있는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13척의 배로 무려 130여척 혹은 330여척에 달하는 적함과 병력들을 아군의 사기 만 끌어올린다고 감당할 수는 없다. 23전 전승불패의 신화를 기록한 충무공은 무모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승리할 수 있는 싸움을 만들어가는 불세출의 전략가였다. 분명히 그는 서해로 진입하려는 적들이 명량으로 몰려들 것을 알고,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길 수 있는 싸움으로 반전시킬 묘수를 수십번도 넘게 복기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기를 가지고 13척의 함선으로 어떻게 적을 방어하고 격퇴할 것인가를 장수들과 함께 몇날 몇일을 논의하고 배들의 포지션을 정하고 임무를 할당하고 임무에 맞게 화약과 화포 그리고 화살, 노를 젖는 노꾼들을 배치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복기와 임무할당을 통하여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고 수군을 폐지하려는 선조에게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라고 상소를 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전투가 임박한 음력 9월 보름, 마지막으로 두려움에 떠는 장병들에게 “필생즉사, 필사즉생”이라고 엄숙한 독전의 선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충무공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을 본 부하들이 용기를 얻게 되고 쌔가 빠지게 싸움으로써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고 당일의 전투를 우발적인 사건처럼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당시 이순신 장군이 쓴 기사(난중일기)로 돌아가 보자.

1597년 음력 9월 보름, 계묘일. 맑았다. 적은 수의 배를 가지고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등지고 진을 펼칠 수 없어서 우수영 앞 바다로 진을 옮겼다. 장수들을 모으고 약속하기를, “병법에 말하기를 죽으려고 하면 반드시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좁은 길을 막아서면 천 사람이라도 두려워 할 것이라는 것이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다. 너희 각 장수들은 살고자 하는 마음을 내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시 군율에 처하리라” 하고 재삼 엄숙하게 약속을 하였다. 이 날밤에 신인이 꿈 속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저렇게 하면 질 것”이라고 하였다.

十五日癸卯. 晴. 數小舟師. 不可背鳴梁爲陣. 故移陣于右水營前洋. 招集諸將約束曰.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 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 爾各諸將. 勿以生爲心. 小有違令. 卽當軍律. 再三嚴約. 是夜. 神人夢告曰. 如此則大捷. 如此則取敗云.

1597년 9월 기망(16일), 갑진일. 맑음. 아침 일찍 별망이 와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적선들이 우리 배를 향해 곧바로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라고 보고를 한다.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330여척이 우리 함대를 둘러 쌀 기세다. 장수들이 중과부적임으로 알고 어떻게 해서라도 몸을 빼서 살 궁리만 한다. 우수사 김억추는 아득한 먼바다로 배를 빼버렸다. 나는 “노를 저어라”하고 앞으로 돌격해 나갔다.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 각종 총통을 어지럽게 쏘며 바람과 번개처럼 나아갔다. 군관들이 선상에서 화살을 세우고 소나기처럼 쏘아대니 적도들이 감당하지 못하고 가까이 왔다가도 물러가곤 했다. 하지만 둘러싼 배가 워낙 많아 세를 가늠할 수 없자, 배 위의 사람들이 하얗게 질려 서로를 바라본다. 나는 조용히 그들에게 “비록 적의 배가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 대들지 못한다. 마음을 굳건히 하라”고 용기를 주었다. 힘을 다하여 적에게 쏘아대며 우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보니 먼바다로 물러나 바라보기만 한다. 배를 돌려 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하길래, 중군 김응함의 배에 곧바로 대고 우선 목을 베어 효시를 했다. 나의 배가 뱃머리를 돌리는 것을 보고, 두려워서 우리 배들이 점점 멀리 물러났다. 적선은 점점 가까와 오고, 전선이 돌아가는 것이 낭패였다. 그래서 중군을 향해 맞서 싸우라 이르는 한편, 기를 내리고 다시 초요기를 세워서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선이 우리 배로 다가오도록 했다.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이르러 내가 선 상에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길 “안위야 군법에 의해 죽고자 하느냐. 네가 군법에 의해 죽고자 하느냐. 어디로  도망가 살려하느냐?”하니 안위가 황망히 적선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장이 되어 먼 곳으로 피해있으면서 대장으로 구하지 않으니 죄에서 어찌 벗어나겠느냐? 형을 집행코자 하나 적세가 몹시 급하니  우선 명령을 내릴테니 공을 세우라”고 말했다. 두 배가 적진에 들어 교전을 하는 사이, 적장이 직접 지휘 하의 배 3척이 순식간에 안위의 배에 들러붙어 적병이 개미처럼 배 위로 오르려고 한다. 안위와 배의 수군들이 죽기로 물리친다. 기력이 다할 즈음에 내가 배를 돌려 곧바로 다가가 소나기처럼 쏘아대니 적선 3척은 더 이상 소탕할 것이 없게 되었다.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의 대리장군 정응두의 배가 계속 이르러 힘을 합하여 적선을 향하여 쏘아댔다. 안골포 해전 때 투항한 준사란 자가 우리 배 위에서 내려다 보더니 “그림이 그려진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안골포 해전 때의 적장 마다시입니다”라고 한다. 내가 김석손에게 갈고리를 던져 뱃머리로 끌어올리니 준사가 뛰어올라 말하길 “이 놈이 마다시”라고 한다. 그래서 목을 베게 하니 적의 예기가 꺽였다. 모든 배들이 떠들썩하게 북을 울리며 나란히 나아갔다. 모두 지자총통 현자총통을 방포하고, 화살을 소나기처럼 쏘아부으니 그 소리가 산과 강을 흔들어댄다. 30여척의 적의 배가 부딪혀 으깨지고, 패주한 적선들이 감히 우리의 군사 근처에는 얼씬도 못했다. 이는 정말로 천행이다. 물의 흐름이 극히 험하고 우리의 군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와 진을 당사도로 옮긴다.

十六日甲辰. 晴. 早朝. 別望進告. 賊船不知其數. 直向我船云. 卽令諸船. 擧碇出海. 賊船三百三十餘隻. 回擁我諸船. 諸將自度衆寡不敵. 便生回避之計. 右水使金億秋. 退在渺然之地. 余促櫓突前. 亂放地玄各㨾銃筒. 發如風雷. 軍官等簇立船上. 如雨亂射. 賊徒不能抵當. 乍近乍退. 然圍之數重. 勢將不測. 一船之人. 相顧失色. 余從容諭之曰. 賊雖千隻. 莫敵我船. 切勿動心. 盡力射賊. 顧見諸將船. 則退在遠海觀. 望不進欲回船. 直泊中軍金應諴船. 先斬梟示. 而我船回頭. 則恐諸船次次遠退. 賊船漸迫. 事勢狼狽. 卽令角立中軍. 令下旗. 又立招搖旗. 則中軍將彌助項僉使金應諴船. 漸近我船. 巨濟縣令安衛船先至. 余立于船上. 親呼安衛曰. 安衛欲死軍法乎. 汝欲死軍法乎. 逃生何所耶. 安衛慌忙突入賊船中. 又呼金應諴曰. 汝爲中軍而遠避. 不救大將. 罪安可逃. 欲爲行刑. 則賊勢又急. 姑令立功. 兩船直入交鋒之際. 賊將指揮其麾下船三隻. 一時蟻附安衛船. 攀緣爭登. 安衛及船上之人. 殊死亂擊. 幾至力盡. 余回船直入. 如雨亂射. 賊船三隻. 無遺盡勦. 鹿島萬戶宋汝悰. 平山浦代將丁應斗船繼至. 合力射賊. 降倭俊沙者. 乃安骨賊陣投降來者也. 在於我船上. 俯視曰. 着畫文紅錦衣者. 乃安骨陣賊將馬多時也. 吾使金石孫鉤上船頭. 則俊沙踴躍曰. 是馬多時云. 故卽令寸斬. 賊氣大挫. 諸船一時皷噪齊進. 各放地玄字. 射矢如雨. 聲震河岳. 賊船三十隻撞破. 賊船退走. 更不敢近我師. 此實天幸. 水勢極險. 勢亦孤危. 移陣唐笥島.

이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탄 대장선에 왜군이 올라와 백병전이 벌어지는 기록은 없다. 왜선과 초근접하여 사력을 다하여 화살을 쏘아댄 기록만 있을 뿐이다. 왜군들이 조선의 배에 올라 백병전이 벌어졌다면 거제현령 안위의 배다.

이와 함께 수급을 벤 적장의 이름이 안골포 해전의 적장 ‘마다시’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명량해전에서 죽은 왜장은 구루시마 미치후사이다. 미치후사의 형인 미치유키가 죽은 해전은 안골포가 아닌 당포해전이다. 따라서 난중일기에서 준사가 지명한 마다시는 구루시마 미치유키가 아닌 다른 자일 수 있다. 준사는 안골포 해전 당시 왜군으로 참전했다가 조선수군에 투항한 만큼 마다시라는 왜장에 대하여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학자의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들이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모르고 전라우수사, 삼도수군통제사 등으로만 알다가 임진왜란의 백서에 해당되는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으로 유입(당시에는 군사기밀에 해당되었으나 일본으로 반출됨)된 후 바다에서 자신들을 막아서서 23승 전승을 기록한 신인이 이순신 장군이라는 것을 비로서 알았다고 한다. 사학자의 말이 맞는다면 당시에 왜군들이 인식한 적장은 이순신이 아니라, 조선 해군사령관이나 해군통제사령관이라는 불특정의 지휘관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거꾸로 생각한다면, 조선에서도 구루시마 미치후사나 와키자카 야스히로, 도도 다카토라 등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참고 : 울돌목에서

울돌목에서

해남의 문내면 학동리 즉 전라우수영과 진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 명량(鳴梁:울돌목)에 왔다. 와봐야지 와봐야지 하다가 마침내 온 것이다.

제2 진도대교를 건너서 대교의 밑, 여울목(鹿津) 가까이 다가갔다. 돌이 우는 여울목이라는 이름처럼 바다가 울고 있다. 넓은 서쪽바다가 좁은 명량해협을 통해 남해로 쏟아지는 소리를, 나의 답답한 철자법으로 받아적을 수는 없다. 소리는 쉐-쉐-하다가 주르륵하며 물에 잠기는 것 같기도 하고, 돌돌거리며 바위돌에 접히는 산골짝의 개울물 소리같기도 하다.

    < 울돌목 사진들 >

울돌목은 좁은 곳의 폭은 294m, 수심 19m 미만이며, 여울의 바닥은 암초와 같은 바위들이 깔려있다고 한다. 서쪽 바닷물이 잠잠하다가(停潮) 밀물 때가 되면 좁은 명량(목)을 통해 쏜살처럼 밀려들면서 바닥의 바위들을 두드리면 돌들이 운다고 울돌의 목 즉 명량이라고 한 모양이다.

정유(丁酉 : 1597년)년 재침한 왜적들은 유월에 가덕도에서, 칠월에는 칠천량에서 대승을 거두어 경상의 제해권을 장악한 후, 삼도수군통제사령부가 있는 한산섬을 지나고, 전라좌수영인 여수 앞 바다까지 장악한다. 적들은 더 나아가 이진(利津 : 완도와 북평리 사이의 포구)을 지나고, 땅끝마을 옆 어란포(於蘭浦 : 송지면 어란리에 있는 항구)를 지나 팔월말부터 진도의 북단 벽파진(碧波津 : 진도군 고군면 벽파항)까지 출몰하곤 했다.

구월 기망(旣望 : 16일), 적들은 이른 아침 어란포에서 남쪽바다에서 서쪽바다로 물이 빠지는 때에 북서 순류를 타고 330여척의 왜선이 왔다. 왜선이 벽파진을 넘자 이순신은 조선수군에게 남아있던 ’12척의 전함’ 1칠천량 해전에서 전세가 불리하자 후퇴한 경상우수사 배설의 전선들이다. 배설은 임진란 중 합천군수 시에 적병과 싸우지도 않고 후퇴를 하거나 칠천량 해전에서 몰래 줄행랑을 놓고 명량해전 시에는 탈영을 하는 등 후퇴와 탈영으로 점철된 비겁한 인물이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빼돌린 12척의 전선이야 말로 조선을 살린 기틀이 된다. 에 남해에서 거둔 전함 1척, 도합 13척으로 울돌목 서쪽에 일자진(一字陣)을 펼친다.

왜적들이 우수영을 놔두고, 진도의 남단을 돌아 서쪽 바다로 나가면 조선수군에 의해 뒷덜미가 잡힐 것이기에 좁은 명량에서 이순신을 깨고 서해로 나아가고자 한 것은 이해가 하지만, 13척의 전함으로 ’10배가 넘는 적을 감당하려한 무모함’ 2李忠武公全書卷之九 조카인 정랑 이분의 글을 보면, 임진년으로 부터 5~6년간 적들은 수군이 길을 막고 있었던 관계로 감히 곧바로 호남으로 쳐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전선이 12척이 있아온 즉,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운다면 오히려 싸울 만 합니다. 수군을 전부 폐지한다면, 이는 적에겐 다행일 것입니다. 호남의 오른쪽을 경유하여 한강에 다다를 것인 바, 이것이야말로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다고 할지라도 미천한 신이 죽지 아니하였사오니 적들이 저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自壬辰至于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扼其路也.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則是賊之所以爲幸. 而由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라고 선조에게 폐하면 안된다며 출사표를 던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글로 보면 호남이 떨어지면 한강이 떨어지고 그러면 종묘와 사직을 보전할 수 없다는 의미로 뒤의 주석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와 일맥상통한다. 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충무공은 호남이 없다면, 나라가 없다”(若無湖南是無國家) 3李忠武公全書卷之十一에 나오는데, 영의정인 이항복이 쓴 忠愍祠(여수에 있는 충무공 사액사당)記에 나온다. 내용은 한산대첩을 기리는 글에 근거한다. 그때 왜적들이 여러차례 호남을 엿보며 으르렁거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충무)공이 나라를 위하여 軍을 쌓아놓았으니 모두 호남에 의지한 바였다. 호남이 없다면 나라가 없다.(時賊屢窺湖南. 狺然未已. 公以爲國家軍儲. 皆靠湖南. 若無湖南. 是無國家也) 며, 13척의 배를 가로로 벌려 서쪽 바다를 막는다.

S121105008

우수영에 있는 의제 허백련씨의 글씨로 된 若無湖南是無國家

미시(未時 : 13시~15시)가 지나자,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서쪽바다가 명량을 지나 동남쪽 남해로 가파르게 밀려들기 시작 4정유년 구월 기망의 오전 중 최대 간조가 06:55분, 오후 최대 만조는 14:30분 이었다고 한다. 간조(썰물) 때 남해에서 서해 쪽으로 흐르는 유속은 9노트(17Km/Hr), 만조(밀물) 때 서해에서 남해로 흐르는 유속은 11.5노트(21km/Hr)라고 한다. 정조시기는 밀물과 썰물 후 약 1시간 가량이었으니, 교전은 오후 2시 30분경으로 추정됨 했다. 왜적의 배들은 좁은 명량으로 비비적거리며 몰려들다가 뱃전이 서로 부딪혀 깨지고, 좁은 해협에 뒤엉킨 적의 함대 위로 우뢰와 같은 현자총통의 화력이 함선을 부수고, 빗발같은 불화살이 좁은 해협에 가득했다. 마침 적장(來島通總)의 수급을 베어 매달으니 적은 그만 궤멸되고 만다.

아수라와 같은 전쟁과 전쟁을 돌파해야만 했던 이순신을, 김훈은 그의 ‘칼의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애틋한 마음으로 대변한다.

“사실 나는 무인된 자의 마지막 사치로서, 나의 생애에서 이기고 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나는 다만 무력할 수 있는 무인이기를 바랐다. 바다에서, 나의 武의 위치는 적의 위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칼의 노래 1권 34쪽)

휴일도 아닌 월요일 오전 9시에 나는 울돌목에서 ‘다만 무력할 수 있는 무인이기를 바랐다’는 김훈의 글을 보며, 사람이란 요사스러워서 평화 시에는 무인으로서 문반들에게 홀대받기 보다 전쟁을 고대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 본다.

나 역시 성공한 프로젝트에 가담하여 자신의 일이나 묵묵히 하는 사람이고자 했으나, 프로젝트는 위태롭고 고단하기만 하다.

참고> 1597년9월16일의 난중일기

十五日癸卯. 晴. 數小舟師. 不可背鳴梁爲陣. 故移陣于右水營前洋. 招集諸將約束曰.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 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 爾各諸將. 勿以生爲心. 小有違令. 卽當軍律. 再三嚴約. 是夜. 神人夢告曰. 如此則大捷. 如此則取敗云.

十六日甲辰. 晴. 早朝. 別望進告. 賊船不知其數. 直向我船云. 卽令諸船. 擧碇出海. 賊船三百三十餘隻. 回擁我諸船. 諸將自度衆寡不敵. 便生回避之計. 右水使金億秋. 退在渺然之地. 余促櫓突前. 亂放地玄各㨾銃筒. 發如風雷. 軍官等簇立船上. 如雨亂射. 賊徒不能抵當. 乍近乍退. 然圍之數重. 勢將不測. 一船之人. 相顧失色. 余從容諭之曰. 賊雖千隻. 莫敵我船. 切勿動心. 盡力射賊. 顧見諸將船. 則退在遠海觀. 望不進欲回船. 直泊中軍金應諴船. 先斬梟示. 而我船回頭. 則恐諸船次次遠退. 賊船漸迫. 事勢狼狽. 卽令角立中軍. 令下旗. 又立招搖旗. 則中軍將彌助項僉使金應諴船. 漸近我船. 巨濟縣令安衛船先至. 余立于船上. 親呼安衛曰. 安衛欲死軍法乎. 汝欲死軍法乎. 逃生何所耶. 安衛慌忙突入賊船中. 又呼金應諴曰. 汝爲中軍而遠避. 不救大將. 罪安可逃. 欲爲行刑. 則賊勢又急. 姑令立功. 兩船直入交鋒之際. 賊將指揮其麾下船三隻. 一時蟻附安衛船. 攀緣爭登. 安衛及船上之人. 殊死亂擊. 幾至力盡. 余回船直入. 如雨亂射. 賊船三隻. 無遺盡勦. 鹿島萬戶宋汝悰. 平山浦代將丁應斗船繼至. 合力射賊. 降倭俊沙者. 乃安骨賊陣投降來者也. 在於我船上. 俯視曰. 着畫文紅錦衣者. 乃安骨陣賊將馬多時也. 吾使金石孫鉤上船頭. 則俊沙踴躍曰. 是馬多時云. 故卽令寸斬. 賊氣大挫. 諸船一時皷噪齊進. 各放地玄字. 射矢如雨. 聲震河岳. 賊船三十隻撞破. 賊船退走. 更不敢近我師. 此實天幸. 水勢極險. 勢亦孤危. 移陣唐笥島.

이 글에는 단순한 전투기록만 기술되어 있다.

15일의 기록에는 그 유명한 ‘필사즉생 필생즉사’가 나오고 밤에 신인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대첩을 이룰 것이라고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전쟁 당일인 16일의 글을 보면, 위와 같은 울돌목의 급물살과 전략구상 등에 대한 기록은 없고, 우리 수군의 사기 또한 개판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330여척에 달하는 적의 전함을 남해바다에서 간신히 건져올린 13척으로 대적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우수사인 김억추는 행방이 묘연했고, 싸움을 회피하는 안위와 김응함에게 군법에 의해서 죽겠느냐고 독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후 김응함, 안위등이 전투에 뛰어들고 송여종과 정응두의 배가 계속 전투에 임하고 귀순한 왜군 준사(당시 피아간의 병력이 마구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가 말한 적장 마다시(來島通總 :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목을 베어 왜적들의 기가 꺽이고 현자총통을 쏘고 화살을 비처럼 쏘아대자 적선 30척이 격침되고 달아나 다시금 우리 수군에게 다가올 생각을 못했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이 내려주신 다행이다. 물살이 몹시 험하고 세가 고독하고 험하여 陣을 당사도로 옮긴다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