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의 전말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나의 이름은 에녹. 아비는 카인이 아니라, 아담의 현손(오세손)인 야렛이다. 내가 나이 육십오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았고, 아들은 일백팔십칠에 라멕을 낳았다. 육대조 할아버지인 아담이 살아있을 때에 나는 태어났고, 아담은 나의 손자이자 그의 잉손(팔세손)인 라멕의 출생을 보고도 오십육년을 더 살았노라.

이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니 나의 수가 삼백육십오세이다. 구백년을 넘게 사신 할아버지들을 대함에 있어 불효요, 박명이라. 하나님의 전에 들려 올라감은 하나님에겐 기쁨이나, 내가 땅의 수고로움을 이미 돌아가신 아담을 제외하고 현조(5대조)이신 셋과 고조 에노스, 증조 게난, 조부 마할랄렐 그리고 아비인 야렛께 짐지우는 것이며, 므두셀라는 아비를, 라멕은 그 할애비를 잃을 것이니, 위로는 죄송하고 아래로 미안하기가 그지없다.

내가 수를 다하지 못하고 들려 올라가게 된 전말은 므두셀라를 생산하고 기쁨에 넘쳐 정신을 놓았던 탓에 혼망한 중에 하나님께서 나를 불렀고, 땅에 보습을 풀어놓고 머리를 풀고 그를 쫓아 광야로 나갔노라.

그 후로 세상의 모든 곳을 보았고, 또 많은 자손을 낳았다. 나는 에덴의 동쪽 <놋>으로 가서 카인의 아들의 이름을 딴 <에녹성>에 들어가 카인의 후예들이 가축을 기르고 도살하여 먹고 수금과 함께 퉁소를 불며 즐기는 것을 보았노라. 또한 구리와 쇠를 돌맹이에서 뽑아내어 날카로운 기계와 사람을 죽이는 상서롭지 못한 도구를 만드는 소리를 들었노라. 그러나 아직 사람이 땅에 거한 지 얼마 아니되어 들과 고을은 한적하고 들판과 산에는 숲과 짐승의 떼가 가득했노라. 때론 어두운 거리에서 타락한 천사와 사람들이 교합하여 낳은 거인족, 네피림(창 6:4)들 속을 거닐었노라. 영혼이 없는 그들의 동공은 어둠 속에 광채를 띄었고 음성은 쇳소리처럼 찢어지거나, 사자의 그르렁 소리처럼 낮았다. 그들은 짐승을 맨 손으로 쳐서 죽여 날 것으로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지라, 네피림의 사이를 지날 때면 내 몸이 근심하여 떨었으나, 하나님의 신이 내 곁에 거함으로 감히 저들이 나를 해하지 못하였다.

나는 또한 들에서 식물을 가꾸는 자들, 사람의 딸들의 자손들을 만났노라. 그들은 하나님이 창세 제육일에 만든 <최초의 인간>의 자손(창 1:26~30)이라, 아담의 버림받은 아들, 카인이 놋에서 그들과 동침하여 자신의 후예를 만들었나니, 나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아담은 두번째 인간이자, 하나님의 아들(창 2:7)이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핏줄인 나에게 침뱉고 채찍질하며 능멸하였기에 나는 벌거벗기운 채 쫓기어 광야에서 굶주리고 목말라 했노라.

나는 신에 들린 자, 사막을 방황하는 최초의 나비(Nebi: 신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이다. 때때로 나의 몸은 지고의 체험과 신의 말씀으로 흔들렸고, 당신께서 “에녹아, 에녹아!” 하고 부르면 나의 근골이 찢어지고 생명이 고갈되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였노라.

후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미천한 나를 귀히 여겼다 하겠지만, 하나님과 동행함이 무엇인지 차마 모르리라. 당신께서 나를 이끌어 에덴 동산의 동편에 이르렀을 때 사람의 얼굴에 수컷 소의 몸, 사자의 꼬리와 날개를 가진 케루빔(창 3:24절의 그룹: 註)이 동산에 다가가는 나를 향하여 으르렁거렸고, 황폐한 동산의 가운데 화염의 칼날에 겹겹으로 둘러쌓인 생명나무가 보였노라. 동산 주변의 무화과와 감람나무, 그리고 수풀은 꺼지지 않는 화염에 시들어 그 광경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동산에서 발원한 네개의 강물에서는 차고 시원한 내음은 사라지고 역청과 유황냄새가 가득하여 하나님에게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주소서라고 애원했노라.

그 말에 하나님이 나에게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지은 동산을 너의 할애비가 폐하였느니라. 아담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나(창 3:22), 영원한 삶의 권능은 빼앗겼나니, 네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의 죽음의 날을 보게 되리라 하셨고, 나의 나이가 삼백팔세가 되던 날 아담은 그가 난 때처럼 숨결이 흐트러지고 흙으로 다시 돌아가시더라.

한번은 셀 수 없는 날 동안 사막과 광야와 산과 강을 건너 땅이 끝나는 곳으로 가서 바다를 보았노라. 그때 하나님의 신께서 에녹아! 비가 내리는 것을 보았느뇨 하고 물으셨으나 비(雨)가 무엇인지를 몰랐고, 그럼 에녹아 네가 하늘의 푸르름을 보았느뇨하고 다시 물으셨노라. 내가 대지와 구름과 안개 밖에 본 적이 없는 지라, 하나님이 가로되 하늘 가운데 궁창이 있어 네가 하늘과 해(日)를 보지 못하였으나, 때가 이르면 네가 하늘과 해를 보게 되리라 하시니라. 또한 사람의 딸들과 천사들과 나의 아들들이 행음하여 서로 피를 섞고 혼잡할 뿐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죽여 그 피가 열방에 가득하노라.

머지않아 말세의 때가 당도하리니 그 날에 하늘의 궁창이 터져 사십주야동안 비가 내리고 온 땅이 네가 본 저 바다와 같이 되리라. 그 날이면 세상에 코로 숨쉬는 것들과 사람의 딸들과 교접한 자들과 네피림들 모두 세상에서 멸절되고, 의인이자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인 노아, 너의 증손자와 그의 아이와 자부들만이 살아남을 것이며 그 후로 크게 창성하여 온 열방을 가득 채우리라. 말세의 환난이 지나고 나면 하늘의 궁창은 땅으로 흘러내려 오늘 네가 본 바다보다 훨씬 큰 대양으로 갈라지고 하늘이 열릴 것이며, 마침내 너의 자손들이 해(日)를 보게 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어른들께 말씀드렸더니 아무도 이를 믿지 아니하였고, 우리 아이가 땅에서 소출을 거두는 일을 벗어놓고 유랑하더니 미쳤거나, 거짓된 신에 들림이 맞노라. 하나님의 신이 에녹과 같이 근면하지 않고 떠도는 자와 할 일이 없으리라 하며 머리를 풀고 몸에 재를 뿌리며 저들이 울더라. 저들도 나도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니 무엇으로 옳다 그르다를 의논할 수 있겠는가.

그때 하나님의 신이 나의 생령을 대신하여 소리하니 저들이 경외하며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심을 마침내 아노라. 저들이 정신이 돌아 온 나에게 말하길, 네 눈에 홍채가 드리우고 얼굴이 발광하니 우리가 도저히 너를 쳐다볼 수가 없었고, 목소리가 뇌성처럼 울려 우리의 몸이 흔들렸나니 신께서 가로되 에녹의 말이 하나님 전에 아름답도다 하셨노라.

나, 에녹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한 자이니라. 내가 당신을 미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께서 내 육신 속에 스민 까닭에 나의 겉 육신이 동행할 뿐, 생령은 혼절하였더라. 그러하니 하니님이 내게 듦에 내가 없고, 나의 영이 육신에 듦에 하나님이 없느니라. 단지 지나신 흔적으로 당신이 내게 거하심과 그의 말씀하심을 상기하노라.

나는 의인도 아니요, 선함과 사랑과 진리,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하였으며, 지혜 또한 없나니 하나님이 무엇으로 나를 택하셨는지 도무지 알 수 없노라. 나의 평생의 소원은 힘들여 땅을 갈아 소출하고, 아들 므두셀라와 자손, 아내와 함께 식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매 나날을 채우고 나의 수(壽)를 다하는 것이나, 불현듯 하나님께서 가로되, 우리들이 너를 땅에서 들어올려 우리의 전(殿)에 함께 하려 하노라고 하시니, 지상에 거할 날이 다하고, 산 채로 하나님 옆에 있게 되었다.

이것이 어찌 은총인가. 죽을 목숨을 지닌 사람으로서 영생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산 자로서 먹고 마시며, 이웃과 가족들과 희락하여 웃지도 못하며 이제 빛 속에 갇혀 하나님의 신과 교통하게 되었으니 죽지도 못하고 세세년년을 보내며 말세를 보게 될 것이고, 온갖 생명을 내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옆에서 보게 될 것인지라 무섭고 떨리기가 그지 없노라.

아아!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축복과 진노를 벗어날 것이며, 어찌 자신의 의지가 있다, 선의와 공의를 스스로 펼치노라 떠들 수 있겠는가.

나 에녹은 이제 하늘로 들리워 갈 것인 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시간을 지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창성할 나의 자손들이여. 이러한 나를 애통해 하며, 늘 너의 하나님을 경외할지어다.

<에녹이 전한 말>

에녹은 최초로 휴거(산채로 하늘로 올라간)된 자이다. 에녹에 대한 정경의 언급은 짧지만 아담의 자손 중 노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길다. 아마 그보다 그 기록이 긴 사람이 있다면 카인의 현손(5세손)인 라멕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에녹에 대한 기사는 5장 21절에서 24절이 다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은 나이인 365세로 요절하였고, 기사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고 데려가셨다는 말이 후대에 어떻게 하늘로 들려 올라간 것으로 해석이 되는 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에녹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첫째는 이름이 멋있을 뿐 아니라, 최초로 하늘을 날았으며 하나님과 손을 잡고서 세상을 주유했고 또 산채로 하늘에 올라갔다는 것이 신비로왔다.

유태인적인 사고 방식에는 천국이 없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흙에 묻혀 흑암(시간도 공간도 없는 상태) 중에 있다가 하나님이 지상에 임재한 그때에 불러일으켜 세워지고 저리로서 심판을 받아 영생을 얻거나 아니면 무저갱에 내쳐지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유태인의 가운데 육탈을 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감이란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창세기의 초반부를 읽다보면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자신이 살던 곳에서 떠나며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아담과 하와의 자손 말고도 분명 제삼의 인간들이 있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같은 4장 17절에 <아내와 동침하니>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십계명의 첫번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로 유태인들이 본래 다신교였음을 유추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창세기의 6장 1~3절을 보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고, 4절에 보면,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성경 해설자들의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네피림>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이 구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중간계에 앨프와 호비트, 각종 종족이 얽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은 창세기 2장 7절의 흙으로 빚어진 아담과 그의 후손을, <사람의 딸>은 창세기 1장 27절에 창조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둘의 차이는 2장 7절에는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되어 있다. 네피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천사와 사람이 교접하여 낳은 영혼이 없는 거인족을 뜻한다.

이와 같이 창세기의 기사에는 해석이 불가한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내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무엇보다도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간 부분이다. 과연 하나님과 함께 함이 은총일까 하는 의문이 나에게는 늘 있어 왔다.

그리고 아래에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계보를 그려보았다. 노아는 오백살이 되어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으며, 그 후 백년이 지난, 아담의 탄생으로 부터 1656년에 홍수를 만난다. 홍수가 나기 바로 직전에 인류 중 가장 오래 산 에녹의 아들이자, 노아의 할아버지인 무드셀라가 죽었으리라고 추정된다. 노아의 아비인 라멕은 그보다 5년전에 죽은 것으로 나타난다.

GenesisFamily/diagram

주: 언약의 궤의 뚜껑에 있는 유대식의 스핑크스 彫像의 모습을 지닌 동물. 아시리아의 신전을 지킨 사람의 얼굴에 수컷 소의 몸, 사자의 꼬리와 날개를 가진 케루빔이 도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본디오 빌라도의 독백

일요일만 되면 머리가 빠게 질 것 같습니다. 귀가 가렵다 못해 이제는 진물이 날 지경이라니까요. 저 쪽에 있는 친구 있잖아요. 자기 스승을 팔아먹은 작자. 가롯의 유다라고 하는 친구 말이예요. 나는 일요일 만 되면, 두통으로 이렇게 시달리고 있는 데도, 저 친구는 쿨쿨 낮잠만 잘 자더군요. 베드로라고 있지요? 아침이 되기 전에 예수?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 디… 잘 몰라라. 하고 세번이나 부인했다가 어디론가 짱 박혔던 친구 있잖아요. 그 친구 로마에 가서 출세했다고 하데요. 그런데 로마에 정말 가긴 갔는지? 그것이 루머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그 친구가 짱 박혀 있는 동안 내가 예수를 풀어주기 위하여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모른다고요? 천당가려면 성경책 좀 읽으세요, 성경에 보면 저의 활약 상 다 나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베드로, 갈릴리에서 고기나 잡던 이 친구가 로마에 가서 출세하고 나서 환장을 했던지, 뭘 잘못먹었던지, 어떻게 나를 씹어댔으면 <사도신경>에 예수가 저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나왔느냐 이거예요. 이거 원 법적으로 고소할 수도 없고…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일요일만 되면 수십억의 신도들이 나를 씹어대는 데 내가 견딜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이거 죽을 맛입니다. 이천년이 넘도록 들었으면, 이제 이골이 날 만도 한데, 날이 갈수록 견디기가 더 힘듭니다. 아마 인구도 늘고, 대한민국과 같은 나라 있잖아요? 이 놈의 나라를 어떻게 꼬살랐으면 와장창 기독교인이 되어 나를 씹어대더라 이겁니다.

이제는 변명도 하기 싫고, 따지기도 싫지만 욕을 하더라도 알고 하라는 심정에서 제 처지에 대해서 한자락 읊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총독 발령장을 들고 희망에 부풀어서 유대지방으로 간 것은 그러니까 예수력으로 따지면 빵빵이륙년 입니다. 친구들은 총독으로 가면, 탱자탱자한다고 하더군요. 나도 이국의 풍광 속에서 이교도 여인의 치맛 폭에 휩싸일 꿈에 부풀어 있던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괴팍한 싸이코 티베리우스 황제와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제일 좋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제가 꿈꾸었던 것과 달랐습니다. 날씨는 무덥고 좁아터진 성벽 안의 골목에는 문둥병 환자와 창녀들이 득실거리고, 헤롯은 색골에다 싸이코로 상종도 하기 싫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뭐든 희생할 수 있는 혐오스런 자들이었고, 바리새인들은 숨을 쉬어도 율법, 길을 걸어도 율법 하는 꽉 막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열심당 놈들은 자고 나면 폭동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며칠을 지나고 나자, 제가 똥밟은 것을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총독 안하겠다고 하면 티베리우스가 열 받을 것 같기에 그냥 참기로 했죠.

그게 불찰이었습니다. 제가 간 후 두차례의 폭동이 있었고, 티베리우스는 저에게 다시 소요사태가 있을 경우 봉고파직이라고 준엄한 경고장을 보냈습니다. 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허울은 총독이지만, 예하의 병력은 천명이 되지 않았고, 예루살렘에는 백부장 하나에 백명 정도의 병력만 주둔시키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병력으로 소요사태를 예방하기란 몹시 힘들었습니다.

저들이 무서웠고, 빌어먹을 예루살렘은 무덥기가 한량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라는 자가 갈릴리 지방을 떠돌고 있으며, 희한한 소리를 지껄인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누구는 신의 아들이라고 했고, 누구는 메시야라고 하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신의 아들이기엔 너무 미천한 자였고, 메시야가 되기에는 적수공권, 아뭇 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 주위로 군중이 몰려들고 하기에 그를 예의 주시하기로 했습니다. 입수되는 첩보들로 보았을 때, 그는 천재적인 말빨을 자랑하는 사람이더군요. 한 유대인이 예수를 빌어 군중을 선동키 위하여 가이샤에게 세를 내는 것이 옳은 가 했을 때,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고 교묘히 빠져나갔을 뿐 아니라, 어느 여인을 너희들 중 죄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 함으로써 구출해낸 일을 들었을 때, 나도 그와 같이 현명했으면 했습니다. 성전 앞에서 좌판을 뒤집어엎을 때는 나는 그의 용기에 존경심이 우러날 지경이었습니다.

그 즈음에 첩보가 접수되었습니다. 유월절을 계기로 대규모 폭동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의 시리아인 데카폴리로 병력을 증파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병력은 오지 않았고 나는 초조했습니다.

예수는 그때 내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를 보고 고울지방의 무녀였던 아내는 제 발치에 엎드려 몸을 맡기고 울면서 말하였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저 사람에게 손대지 마십시오. 그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어제 밤, 저는 환상 중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물 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 바람의 날개를 타고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기드론 골짜기는 피로 물들어 붉게 흐르고 있었고 가이샤의 조상(彫像)은 대량학살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중간 기둥들은 퇴락하였고 태양은 무덤 속의 제녀 처럼 슬픔 속에 면사포로 가리고 있었습니다. 오! 빌라도여, 악(惡)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아내인 제 애원을 듣지 않으신다면 로마 중의원이 받을 저주가 두렵고 가이샤가 당할 괴로움이 두렵습니다.”

제 관저에는 이른 아침임에도 사람들이 넘쳐났고, 혐오스런 제사장들은 끌고 온 예수를 땅에 패대기 치며 그를 죽이기를 요청했습니다. 아내의 간청이 아니더라도 왠만하면 그를 풀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냐?”고 그가 대답하기 어려운 것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이 사람은 죽을려고 환장했는지 “당신 말이 옳소이다” 하더군요. 군중들이 뒤집어 졌습니다. “죽여라! 죽여라!” 하고 소리치는 군중에게 나는 물었습니다. “무엇을 원하는 가?” “나사렛 사람의 죽음이요!” 그들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무슨 죄 때문인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의 황폐를 예언했으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했소.”

나는 그들에게 답했습니다. “로마의 법은 그 딴 것으로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의 말을 무시하고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으시요!” 하고 다시 소리쳤습니다.

아침 햇살은 지글거리고 그들의 함성은 관저의 안과 밖에 가득했습니다.

이미 대세는 거스를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에게 그 날 하루가 잔인했다면, 저에게는 지리하고 환장할 것 같은 날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형사재판 방식과 절차 상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성난 군중들을 다스리려 했으나 그들은 더욱 분노했습니다. 예수를 잔인하게 매질함으로써 그들의 분노를 다스리려고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고,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죽일까하고 그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으나, 이 미친 것들은 예수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버티면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키겠더라고요. 바리새인, 열심당원들이 여기에 합류하면 소요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에겐 폭동을 진압할 병력이 없었습니다. 나는 관저의 안팎을 에워싸고 있는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함성 속에 비릿한 피의 냄새가 실려 왔습니다. 어지러웠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너희들의 뜻대로 하라! 그리고 대야를 가져오게 하여 손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묻은 물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관저를 메운 혐오스런 유태인들에게 또렷하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이것이 끝입니다.

예수가 골고다로 가서 죽은 후에도 다시 살아난 후에도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육년 후 사마리아인들의 학살 사건으로 연루되어 저는 봉고파직 되었습니다.

생애 중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에 피에 굶주린 무리들이 외치는 소리에 저는 무릎을 꿇었는 지 모릅니다. 용기가 없었습니다. 저는 봉고파직된 이후 늘 이 비극의 현장을 잊을 수 없었으며, 로마에 대한 저의 충성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유배지에서 늘 그 젊은이를 생각하다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로마의 긍지에 찬 시민에게는 자살 또한 아름다운 것이니까요.

알고 보면 저 불쌍한 사람입니다. 지가 뭐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도신경에 제 이름을 적어놓고 욕을 해대는 몰상식한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부탁드리는 한편, 예수가 다시 살아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