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오가해 설의

쌍계사 팔영루의 주련에서 야부 도천 스님의 시를 발견하고 그 시의 출전이 금강경오가해임을 알고 사게 된 책이다.

참으로 좋은 책을 만난 것 같다. 좋은 고전을 현대인이 읽고 이해하기 쉽게 번역했다는 것 자체가 나를 만족스럽게 했다.

‘강산무진’이라는 소설집 속의 <뼈>라는 단편에서 김훈은, 화자의 입을 빌어 밥 때가 되자 밥을 먹고, 밥을 다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더러워진 발을 씻는 일은 현묘하지도 장엄하지도 않다. 그것은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 도올 김용옥은 ‘금강경강해'(통나무, 1999)에서 이 대목을 해설하면서 금강경이 부처와 그 무리들의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하루의 일과 속에서 말하여지고 알아들어졌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었다. 나는 도올의 글을 읽으면서 그처럼 상례적인 일상의 구체성에 감격하는 그의 놀라운 놀라움이 놀라웠다.(강산무진 132쪽) 라고 쓰고 있다.

나도 도올 선생의 감탄에 대하여 김훈 씨처럼 상례적인 일상의 구체성에 감격하는 그의 놀라운 놀라움이 놀라웠다. 하지만 이 ‘금강경오가해 설의’를 읽자, 일상의 구체성이야말로 진실로 놀라움이라는 복음을 접하게 된다.

사실 불경처럼 어렵고, 조사들의 공안처럼 어려운 것이 또 어디있는가?

책 333쪽 ‘법대로 수지함’ 편(如法受持分)에서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한 것이 없습니다.”』 1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說法不 須菩提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라고 기술된 바와 같이, 장로 수보리(Subhuuti)조차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없다고 한다. 아무런 말씀도 없는 불경을 백천만번 들여다 본 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으로 똘똘 뭉쳐진 나와 같은 짐승(衆生)이 읽어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나에게 금강경을 이해시켜주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여태까지 읽은 금강경 중에서 그나마 불교에 다가가 피상적으로 나마 읽고 “아하! 그런가 보다” 하는 자만심에 빠져들게 해주는 책이라는 점이다. 도올 선생의 ‘금강경 강해’보다 이 책이 주는 느낌은 강렬하고 독특하다. 규봉 종밀(圭峰 宗密 : 780~841), 육조 혜능(六祖 慧能 : 638~713), 재가거사인 부대사(傅大士 : 497~569), 야부 도천(冶父 道川 : 송나라 1100년대로 추정), 예장 종경(豫章 宗鏡 : 알려진 바 없음)의 오가(五家)의 주석이나 詩(解)에 함허 득통(涵虛 得通 : 조선 1376~1433)의 설의가 금강경의 이해를 돕는다고 말하기 보다 강력한 에너지 장을 형성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금강경오가해 설의'(金剛經五家解 說誼)의 특징을 보면,

금강경 본문을 놓고,

  • 규봉의 찬요(纂要)가 금강경의 본문에 대하여 대체적인 개요를 짚어준다.
  • 그 다음에 육조의 해의(解義)가 금강경의 말씀의 뜻을 해석해주는데,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스님의 해설이라기에는 해의 그 자체가 금강경의 논서로써 최고봉이 아닌가 싶다.
  • 부대사는 찬(贊)을 달았는데, 삼성(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라는 유식론적 입장에서 금강경을 노래한다.
  • 야부는 송(頌)은 설명 대신 착어(着語 : 선가에서 공안에 붙이는 짤막한 평)와 선시로 대신하는데, 야부 도천 스님의 詩는 음미할 만 하다.
  • 종경은 제강(提綱)을 달았는데, 무상(無相 :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음)을 골자로 경의 취지를 말한다.
  • 그리고 윗분들 오가해에 함허가 설의(說誼)를 달아 이해를 돕는다.

사실 이 오가해를 통해서 반야부에 위치하는 금강경을 후대의 유식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선(禪) 문학적인 체취를 즐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是故 佛說一切法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그러므로 부처가 말하기를, ‘모든 법에는 자아도 없고, 인간도 없고, 중생도 없고, 목숨도 없다.’고 하였다.』(491쪽 究竟無我分 중)는 부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야부 도천 스님은 이렇게 노래한다.

借婆衫子拜婆門
禮數周旋已十分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할머니 저고리 빌려 입고 할머니께 절하니
그 예의 충분히 법도에 맞는다
대 그림자 층계를 쓸어도 티끌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네

금강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상(我相 : 몸과 마음이 나라고 여기는 견해), 인상(人相 : 식별되는 눈 앞의 대상 세계와 남들이 실재한다는 견해), 중생상(衆生相 : 중생을 중생이게 하는 무명의 번뇌가 실재한다는 견해), 수자상(壽者相 : 어떤 깨달음이 있다고 보는 견해) 모두 없어야(無相) 하는데, 나는 어리석게도 ‘나와 세상 그리고 번뇌와 고통이 있고, 마침내 온갖 번뇌를 끊은 깨달음의 경지가 있다’고 믿는다.

금강경을 그런 내가 이해한다는 것은 대나무 그림자로 빗자루를 만들어 대웅전 뜰 앞의 낙엽을 쓸거나, 달빛을 주워 호롱불을 대신하여 금강경을 읽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할머니의 저고리라도 빌려 입고자 하는 욕심과 어리석음을 어쩔 수는 없다.

참고 : 금강경 속의 네가지 견해

급고독기원을 서성이며

결국 심오한 진리에 이르게 되는데…

말하는 자와 말해지는 것은 없었으나, 듣는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듣는 이마저도 없어지는 때, 그 심오한 진리마저도 사라지는 것이 바로 금강경(Vajracchedika prajnaparamita sutra)이니……

어찌 그 길을 찾으리오?

길마저 없는 것을…

2009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