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란 것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미술 전체가 ‘개념미술’이다. 사실 현대미술은 ‘개념미술’ 이전에도 개념적이었고, 이후에도 여전히 개념적이다. 오늘날의 예술은, 물질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든지 관계없이, 모두 개념적 배경을 갖는다. 개념미술을 통해 창작은 ‘제작’의 의무에서, 작품은 ‘재료’의 감옥에서, 수용은 ‘지각’의 관례에서 해방되었다.
헤겔의 말대로 예술은 죽었다. 아니, 예술의 육신은 죽고 영혼만 남아 비물질성(immateriality)에 도달했다. 물질을 떠난 예술은 우리의 영혼처럼 마침내 파괴될 수 없는 불멸성(immortality)에 도달했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후기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167쪽

One and Three Chairs / Joseph Kosuth
Completion Date: 1965. Style: Conceptual Art. Genre: installation

왜 현대미술이 이해 안되고 기괴한가는 이 글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육신은 죽고 영혼만 남았다는 것은 예술이란 것이 산(生)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기에는 이미 유령이나 귀신의 차원으로 옮겨갔거나, 아니면 우리가 바라보는 작품이라는 것들이 죽은 것들로, 거기에는 살아있는 증거인 퍼포먼스나 해프닝이란 기대할 수 없으며, 작품 그 자체는 말라비틀어지고 시어빠진 결과다. 그래서 현대미술은 프랑켄슈타인적이거나 그림을 스쳐지난 사태들을 메마른 흔적 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이상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그 작품의 (개념이나 관념에 대한 설명을) 귀로 들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말은 그러하면서도 폴록이나 워홀, 그리고 리히텐스타인의 죽은 육신(작품)이 그토록 비싼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값싸고 좋은 문고판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사라져버린 우리나라 출판계에 대해서 나는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문고판이야말로 좋은 책에 대한 실증적 관념을 제공한다. 또 페이퍼 백으로 된 문고판이 값이 쌀 뿐 아니라, 출퇴근을 하거나 여행을 하는데 반려하는 서적으로 알맞다는 것을 모른다면, 독서와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출판계는 독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지 영리를 위하여 책을 만들고 파는 곳이다.

1. 책, 그 물리적 어려움에 대해서

참 읽기 힘든 책이다. 책의 내용이나 번역, 편집 등의 문제는 아니다. 책의 기능적이고 물리적인 면에서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독자들에 대한 고려는 아예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책은 책상 위에 펼쳐져야 함에도 이 책은 그렇지 못하다. 책갈피에 돈을 숨겨놓기에 적당하다. 180도로 펼쳐지지 않을 뿐 아니라, 보아야 할 쪽(페이지)을 보기 위해서는 오른손과 왼손으로 책을 잡고 힘을 주어 펼쳐야만 책을 읽을 수 있다. 한 손을 놓으면 경첩에 용수철이라도 붙어 있는 것처럼 책은 쾅하고 닫힌다. 무게가 상당한 책으로 이 책의 상단 여백을 눌러놓고 책을 읽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 무거운 책 밑으로 밀려나와 저절로 닫히기가 일쑤였다.

책이 이 모양 이 꼬라지가 된 데에는 우리나라 출판사들의 제본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책값은 무지하게 비싼데도 불구하고, 제본은 노동력이 별로 들어가지 않아 가장 싼 무선제본(일명 떡제본, 본드로 종이 끝을 그냥 붙이는 방식)을 한다. 이 책도 벌써 제본이 풀어져 몇 장은 책 사이에서 혀를 내밀고 있다. 이 책을 180도로 펼친다면 이 책의 제본은 풀어지고 종이는 산산히 흩어질 것이다.

종이는 두껍고 질은 좋게 보인다. 하지만 가독성 면에서 종이표면이 매끄러워 번들거리기 보다는 신문지나 갱지처럼 빛이 난반사되는 것이 좋다. 하얗고 반질거리는 종이로 만든 요즘의 책들은 컴퓨터 화면보다 더 눈이 아프다. 이런 불편하지만 비싼 종이를 사용하게 된 것은, 책의 면수에 비하여 두껍고 외관 상 고급스러워 보인다. 그만큼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두꺼운 종이로 떡 제본된 이 개떡같은 책을 펼치고 읽기 위하여, 나는 책과 씨름을 했다. 그래서 “내가 슬라보예 지젝 어쩌구 저쩌구 하는 책을 미워한다”고 말하게 된다.

제발 책의 기능이나 독자에 대해서 생각을 해가면서 책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제에발!

2. 이 책, 그 내용에 관하여

우선 번역가 박정수씨는 슬라보예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이라는 책을 번역한 사람이다. 독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라캉’을 슬라보예 지젝 특유의 신공인 ‘꼬고 비틀어’ 읽기를 시도한 이 책에, 박정수씨가 제공한 번역은 가히 외설적인 수준의 난해함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책은 슬라보예 지젝이 쓴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번역이 난해함을 가중시켰다고 말할 구석은 없다. 이 점에서 박정수씨의 번역도 괜찮았지만, 저자인 토니 마이어스의 지젝에 대한 해설이 탁월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보다 ‘How to read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편이 났다. 지젝의 사유에 대한 개론서이지만, 이 책은 지젝의 저작을 몇 권 쯤 읽고, “이 사람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 때, 읽는 것이 좋다. 지젝의 현란한 모순어법, 들배지기 논리, 대중문화와 문학 그리고 사유들을 통하여 대타자가 사라진 이 시대의 문제를 해부하는 그의 글을 읽고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을 이유란 없다.

지젝의 사유에 아무 통일성없어 보이거나, 문화비평가로서 날렵한 자신의 기지에 입각하여 떠들어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면, 이 책은 지젝이 아주 튼튼하고 풍성한 사유의 전통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몹시 기지가 넘치는 독특한 방식으로 기존의 사유를 재해석하고 그것을 도구로 포스트 모던시대에 당도한 ‘주체’의 당혹스러움과 냉전 이후 홀로 남은 탓에 냉소적일수 밖에 없는 ‘이데올로기’, 신으로 대표되는 ‘대타자’가 없는 이 세상의 병증을 아주 불안한 눈으로 진단하고,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극복 방안을 암중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하여 어렴풋이 – 나의 역량으로 명확히 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기 이전에 지젝의 책을 몇 권 읽은 후,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그 후 다시 지젝의 책을 읽어라.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도 괜찮다. 그러면 그의 문법, 그가 지향하는 바, 그가 진단하는 현실의 의미가 이전보다 투명하게 이해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