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우는 낮과 오후

한낮이지만, 사방이 막힌 화장실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그 소리는 시간 속에 깃든 어둠을 갉아내는 소리같다. 그래서 귀뚜라미가 우는 화장실은 오히려 어둠으로 적막하다.

어제는 무수한 구름이 떠있었다. 높은 구름은 하늘을 반쯤 가린 채 동쪽으로 서서히 흘러갔고, 낮은 구름은 서쪽으로 바삐 흘러갔다. 대지 위로는 바람이 휘몰아쳤고 추웠지만,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고 투명했다. 구름과 구름 사이로 햇빛이 흘러나와 들과 산은 빛과 그림자와 뒤섞였다.

산이 낮은 이 곳은 공기가 투명한 날이면 세상의 끝까지 다 보일 듯하다.

나무들은 바람을 맞이하여 가지를 뒤척였다. 여름동안 어깨를 내리누르던 습기와 광막하여 그 끝을 알 수 없었던 열기는 그만 사라졌다. 오늘 낮 가을햇살은 이렇게 따갑지만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어둠을 지나 새벽이 오고 아침 햇살이 도로와 골목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았다. 가까운 사물과 풍경은 투명하다 못해 생경하여 아득했고, 오히려 산과 같이 먼 곳은 바로 눈 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런 햇살은 고추가 빨갛게 익듯 사물이 익고 마침내 자신의 비밀을 풀어낼 수 밖에 없는 투명함으로 가득한 것만 같다.

바람과 빛으로 풍경이 지쳐가는 오후, 무료한 신호등이 보이는 사거리에 서서, 하루가 가고, 오후의 햇빛을 반사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을 보았다. 차가 지나간 오후의 끝은 투명하다 못해 가을햇살로 들끓었다.

녹색 신호등이 들어왔고 사거리 저쪽에서 눈을 내리깔고 침묵하던 무료한 차들이, 문득 눈을 부릅뜨고 나에게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비밀을 알게 되었다. 진리나 사랑이 나와는 무관하다는 것. 그리고 이제 저녁이 시작된다.

세상의 늦은 하늘 위에는 석양을 담은 구름이 하늘 저편으로 가라앉아 있다. 그리고 미루나무.

허물어지는 시간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이런 사무가 나에게 잘 어울리는 지도 모른다. 시간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비가역의 세상 저 끝으로 허물어져 내리고 아무런 역사도, 흔적도 없이 공허가 되는 지금, 사무실 건너편에 있는 플라타너스를 보는 일은 멋진 일이다. 싹이 난 후 한번도 가지가 잘려져 나가지 않은 나무의 모습은 의젓하다. 잎이 져 버린 가지 사이로 아침이 가고 오후가 지나간 후, 늦은 저녁이 열리더니, 저녁 속으로 건너편 병영에서 울리는 취침 나팔소리가 스며들었다.

하루가 저무는 모습은 처연하다. 취침 나팔소리를 들으면, 시간이 낡은 도시로 몰려든 영하의 먼지와 뒤섞이는 방식에 대하여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고 나자 나에게 있어서 사랑이라는 것이 한번도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