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그 날 새벽

당신은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한번 그 인생을 스쳐가면 그 사람은 나를 잊지 못하게 됩니다.
왜지?
내가 그 사람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그때 창 밖에서는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라는 군중의 고함소리가 합창처럼 들려왔다.

– 박완서씨의 책 속의 엔도 슈사쿠의 <사해 부근에서> 책에서 따온 구절이라고 한다 –

이웃블로그의 사진 속의 이 글을 읽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잊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이 “그 사람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 때문”이라니… 한 젊은이가 자신의 인생을 스쳐지나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다니… 또 창 밖의 군중들은 무슨 연고로 사랑하는 이 젊은이를 죽이라고 바락바락 외쳐대는지?

결국 복음서의 이 부분을 다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배교자라면, 믿음에 굴복할 것을 요구하고 자신이 굴복한 믿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혹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사도신경의 가혹한 신조(Creed)로부터 추출된 탓일지도 모른다. 나는 배교를 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따른 탓에 파문당한 셈이다.

나는, 결코, 사도신경을 인정할 수가 없다.

본디오 빌라도라는 총독은 예수의 공생애의 맨 마지막날 새벽에 예수를 만난다.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께서 죽던 그 날, 예수를 변호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던 빌라도를, 사도신경의 7행은 예수의 가해자라고 믿으라고 한다. 누가복음(23:4)에는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요한복음(18:38)에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군중들에게 변호한다. 대신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빌라도는 “어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마 27:23, 막 15:14)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는 군중에게 절규처럼 묻는다. 그리고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 손을 씻으며 유대인들을 향하여 외친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그 자리에 있던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좋다. 우리는 예수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 되니)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 소리친다.

더 이상 예수를 변호하기에 역부족인 것을 안 빌라도는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준다. 이것이 빌라도가 맞이한 그날 새벽 일의 전말이다.

“passus sub Pontio Pilato”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개신교)

천주교와 (성공회)의 한글 번역은 “본디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라고 되어 있다. 개신교의 번역에 맞는 영문이라면 ‘suffered from Pontius Pilate”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에서는 본디오 빌라도를 직접적인 가해자로 지목하고 있다. 천주교와 성공회의 해석은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던 시기, 혹은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체제 아래라는 시기나 통치시스템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고 천주교와 성공회가 맞다는 것도 아니다. 사실에 입각한다면, “본디오 빌라도가 변호하였으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가 맞다.

그러니까 사도신경은 빌라도 입장에서 보자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이며, 대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자신이 무죄하다고 외쳤던 그로서는 처절하기 그지없는 누명이다.

다시 위에 예수와 빌라도가 나눈 대화로 돌아가보자,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가 빌라도와 만나 그 날 새벽에 나눈 이야기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네 말이 옳도다” 한마디 외에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위의 글과 같은 대화는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의 기사에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라면 가능한 일이다.

다시 그 날로 돌아가보자,

유월절(니산월 14일)을 기점으로 예루살렘에 소요가 있으리라는 첩보를 받은 빌라도는 총독부가 있는 지중해의 해변의 가이샤라에서 예루살렘으로 총독부를 임시로 옮기고 병력을 이동, 소요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다.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 유대 전통을 무시하고 우격다짐으로 통치를 한 탓에 발발한 몇 건의 소요사태로 그는 이미 황제 티베리우스의 눈 밖에 나 있었고, 소요사태가 재발할 경우 총독 해임과 함께 본국으로 소환되어 문책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발생할 소요의 규모 또한 예전과 다를 것이라는 첩보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소요사태가 확산될 경우 데카폴리스의 병력을 이동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시리아 총독에게 당부할 정도로 상황은 급박했다.

유월절 예비일인 그 날 새벽 3~4시, 새벽닭이 운지 얼마 안된 시점에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를 끌고와 빌라도에게 고발한다. 고소 내용인즉,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하더이다”(눅 23:2)는 것이었다.

요한복음의 기사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총독의 관정에 들지 않고, 문 밖에서 총독 빌라도의 판결을 기다렸다고 한다.

따라서 요한복음에 나온 총독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는 두 사람 혹은 그 자리에 있었던 로마군병이나 시위 등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기록은 제삼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루머처럼) 알려졌거나 혹은 루머와 Q-자료를 참조한 기자의 창작이거나, 아니면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성경의 일자일획 이라도 성령이 임하여 기록되지 아니한 것이 없다는 이른바 축자영감(逐字靈感 : Verbal Inspiration)에 의한 기록일 지도 모른다. 어쩌자고 성령께서 공관복음의 기록과 다른 것을 요한복음에 기록토록 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예수를 본 빌라도는 자신이 딜렘마에 빠진 것을 직감한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군중의 손을 들어줄 경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에게 호산나를 외치던 예수의 추종자들이 소요를 일으킬 것이고, 예수를 풀어줄 경우 총독 관저를 둘러싸고 있는 대제사장과 군중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었다. 이들이 소요를 일으킬 경우 예루살렘의 어두운 골목 그림자 아래 웅크리고 있을 열심당원들이 가세하여 폭동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말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가까이로 불러 “(정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분명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고 “이 젊은이가 자신이 왕이라고 한 적이 없다고 하니, 나도 어쩔 수가 없지 않느냐? 나는 증거를 찾지 못하였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며 예수를 넘겨줄 요량이었으나, 예수는 날 잡아잡수라고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했다고 공관복음서에는 기록되어있다.(마 27:11, 막 15:2, 눅 23:3)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대제사장과 군중들로 부터 벗어나, 관정 안으로 들어간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하고 빌라도의 질문을 회피한다. 그러자 빌라도는 역정을 내듯이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며 되묻는다. 그러자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한다. 빌라도는 즉답을 회피하는 예수에게 짜증섞인 목소리로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그러자 예수께서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고 큰 소리로 말한 후 빌라도의 눈을 바라보며, 나즈막한 소리로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말한다.(요 18:33~37)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놀라서 “(도대체 네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요 18:38)

나로서도 궁금한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기록은 (진리에 대하여 말씀하고 증거한다는 성경임에도) 누락되어 있다. 생애의 마지막을 맞이하신 예수께서는 진리에 대한 무서운 진실을 밝혔을지도 모른다. 가령 <영원한 사랑의 포로가 되면, 영영 자신(예수)을 잊지 못하리라>는 등의 가혹한 진실 말이다. 자신의 왕국은 욕망과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신의 진노와 같고, 영원하여 잊을 수도, 도망할 수도 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그리하여 사랑의 가혹함보다 채찍질로 살점이 떨어지고 못이 발과 손등의 살과 뼈를 뜷고 찢는 통고가 오히려 자비처럼 느껴지는 잔혹한 진리를 말했는지도 모른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빌라도는 예수를 남겨둔 채 관정 밖으로 나가, 유대인들에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소리친다.(요 18:38) 누가복음에는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눅 23:4)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의 이 구절에 대하여 군중들이 “저가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눅 23:5)라고 하자 빌라도는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냐?”(23:6) 묻고는 예수 판결의 책임을 돌리기 위하여 갈릴리의 통치자인 헤롯 안티바에게 보낸다. 예수의 이적에 대하여 호기심이 많던 헤롯은 이적을 행해보라고 하는 등 희롱을 하고 심문을 했으나, 예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답을 얻지 못하자 예수에게 유대인의 왕에 걸맞는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다시 돌려보낸다.

헤롯이 예수를 죽이지 않고 돌려보낸 것을 빌미로,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관원,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23:13),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리라.”(23:14~15)고 한 후 “(그냥) 때려서 놓겠노라.”(23:16)며 살려주자고 유대인들을 어룬다.

반면 다른 세복음서에서는 명절(유월절)이 되면 총독이 식민지 백성의 소원을 들어 죄수 하나를 사면해 주는 관례를 이용하여 풀어줄테니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사복음서 모두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달라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관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예수을 어떻게 처리하랴?”고 묻자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했고 이에 대하여 빌라도는 무슨 악한 일을 했기에 이토록 가혹한 사형을 요구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막무가내로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다.

빌라도는 그 광경을 보고, 그냥 놔두면 민란으로 번질 것이 두려워 예수에게 채찍질을 하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그를 내준다.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영화 등에서 우리가 본 장면들이 연출된다. 바라바를 놓아달라는 군중의 요구를 듣고, 빌라도는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을 한다. 군병들이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고 자색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며 손바닥으로 다시 때린다.(19:1~3)

빌라도는 군중들 앞으로 나아가서 말한다.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함이로라.”(19:4)하고 채찍질과 구타로 흘린 피로 칠갑을 한 예수를 이끌고 나와 군중에게 보인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19:5)

대제사장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자, 빌라도는
“(그렇다면)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19:6)

유대인들은 이에 대하여,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나이다.”(19:7)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은 빌라도는 두려워 관정 안으로 들어가 예수에게 다시 묻는다.
“너는 어디로서냐?”(Whence art thou? = Where are you come from?)

이 질문에 예수가 대답하지 않자,(19:8~9)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9:10)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한다.(19:11)

빌라도가 이렇게 예수를 놓아주려고 하자,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 말한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9:12)

예수를 살려주는 일은 반역자를 옹호하는 것이라는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관정 밖의 리토스트로토스(박석(인도) : 희브리말로는 가바다)에 재판정을 차리고 예수를 끌고 나온다.(19:13)

개신교의 요한복음에는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19:14)고 되어 있다. 반면, 가톨릭성경에는 ‘그 날은 파스카 축제(유월절)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시쯤이었다’고 쓰여 있다. 이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시간계산으로 치자면 12시가 맞으나, 요한복음의 시간은 로마시간을 따르는 만큼 오전 6시가 맞다는 의견이 있다. 다른 복음서들의 시간으로는 빌라도가 예수를 넘겨준 시간은 새벽 6시쯤 된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말하길, “보라! 너희 왕이로다.”(19:14)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다시 말하길, “(그럼)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대제사장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한다.(19:15)

이에 따라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준다.(19:16)

이것이 본디오 빌라도가 맞이한 그 날 새벽 3시에서 아침 6시까지의 전말이다.

그 후 예수는 총독의 관저로 부터 800미터 정도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끌고 가서 제 삼시(아침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신다. 제 육시(낮 12시)가 되자 예루살렘 전역이 어둠에 감싸이더니 제 구시(오후 세시)에 운명하신다.

그리고 더 이상 본디오 빌라도에 대한 이야기는 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결국 그는 예수가 죽은 후 삼년 뒤에 있은 사마리아 지방의 폭동으로 총독직에서 면직되었고, 황제 칼리큘라로 부터 사형집행 통보를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빌라도 보고서(원명은「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카이사르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것이 현재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사원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빌라도 당시의 법정 공문서라고 하는데,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복음서의 권위를 높히기 위하여 허위로 만들어진 문서라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을 파악하기에 도움이 되며, 복음서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 주고 있다. <참고 : 빌라도 보고서 >

MCMXC a.D.그리고 소설, 출장

그제(20120514)

MCMXC a.D.는 기원후 1990년이다. 즉 anno Domini 1990.

하루종일 회사 책상 주위를 돌며 코를 풀었다. 크리넥스 2통을 작살내고 지하철에 오르니 빨갛게 충혈된 눈이 시리다. 출장을 가기 위하여 하얀 새벽에 일어나 안개 자욱한 도시를 가로질러 아득한 서쪽, 영종도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감기가 다시 도지는 것 같다.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신경숙의 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읽는다. 데오도라키스가 작곡한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eno Fevigi Sits Okto)에서 제목을 따왔을 것이다. 공산당원이자 가수인 아그네스 발차는 “카테리나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나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라고 애조가 깃든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기차가 떠나는 8시라는 시각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호하다. 하지만 기차는 정해진 시각에 떠날 것이다.

아침 9시 10분발 비행기지만 상사는 노파심에서 6시 30분에 만나자고 한다. 시간에 대기 위해서 4시 30분에 일어나야 한다.

내릴 역이 되어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덮었다. 책갈피 속에서 아이보리 비누 냄새와 같은 것, 그러면서도 미미한 피비린내같은 것이 파~하고 번지더니 금새 사라졌다. 한강, 공지영, 신경숙 등, 내가 읽은 여자들이 쓴 글, 아니 김훈 씨가 쓴 ‘언니의 폐경’에서도 그런 냄새가 났다.

책을 가방에 쑤셔박은 후 고개를 들었다. 검은 미니스커트 밑으로 하얗고 늘씬한 다리가 눈 앞에 들어왔다. 니트로 된 검은 미니스커트의 올 사이로 안쪽 허벅지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하얀 다리는 치마 속으로 감춰지며 검은 색으로 변하고 좁은 다리와 다리 사이, 사타구니로 이어지는 허벅지를 객실의 형광등 불빛이 쓰다듬었다. 다리는 늘씬했고 싱싱해서 세포 하나 하나가 욕망과 쾌락으로 퍼덕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자의 손이 무심결에 말려올라가는 치마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나는 아가씨의 얼굴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익명으로 퍼덕이는 젊은 다리를 실명으로 옭아매고자 하는, 아니면 해체된 부분을 얼굴을 중심으로 재조립하고 부분의 쾌락의 총합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아가씨는 자신의 손이 무심결에 치마를 내리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어둠이 까맣게 달라붙은 전철의 차창에 비춰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차창을 바라보는 시선은 응시와 촛점이 풀려지는 몽롱함이 중첩되이 었었다. 여자가 차창을 보고 미소를 지어보인다. 여자의 치마를 내리는 손과 차창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 그리고 생기로 가득한 그녀의 다리 모두가 하나로 응집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서 분열된 채 제각각이라는 느낌이다. 다시 코가 막혀 숨쉬기가 불편했고 몇시에 일어나 어디로 가서 공항버스를 타는 것이 좋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눈길이 아가씨의 사타구니 쪽에 다시 멈췄다. 늙고 무력한 나의 관음증이 무안했다.

PRINCIPLES OF LUST : 욕망과 욕정의 원리

MCMXC a.D.는 1990년에 발매되었다. 그 다음 해 둔촌동 사거리의 택시 안에서 좌회전 신호등이 들어오길 기다리던 22시에서 23시 사이, 지친 몸을 택시 뒷좌석에 묻은 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니그마의 노래를 들었다. 아마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곡은 Sadeness일 것이다.

그레고리안 성가 타입의 노래는 그때가 처음이었고, 반젤리스나 토미타 혹은 쟌 피에르 류의 신디사이져 음악과는 이제 결별해야 될 때가 왔다는 것을 나는 예감했다.

Principles of Lust는 MCMXC a.D.의 첫번째 파트이자, 이 속에 마이클 크레투와 그의 동료들의 첫 싱글인 셈인 Sadeness가 들어있다. Sadeness는 슬픔이 아니다. 사드니스, 사전에 없는 단어다. 가학성음란증에 빠져있던 사드 후작적임으로 새겨야 할 지 모르겠다. 이니그마의 Sadeness는 사드 후작의 도착적인 믿음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 사드니스에 나오는 그레고리안 성가 타입의 노래는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편 24:7~8)라고 한다. 이 노래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짖고 들의 성막에 있던 성궤를 지성소에 들일 때의 장면이라고 한다. 그때는 기원전 957년경이고 솔로몬의 치세였다. 성전은 예루살렘 성안, 하르 하바이트(성전산)에 있었다. 두마리의 ‘그룹’ 1cherubim : 그룹(cherub)이라고도 한다. 하느님이 에덴에서 사람을 쫓아내고 동산의 동편에 풀어놓았다. 또 하느님의 보좌나 성스러운 장소를 지키는 것으로 믿어, ‘계약의 궤’에는 황금으로 만든 케루빔이 배치되어 있었다. 앗시리아의 신전을 지킨 사람의 얼굴에 숫소의 몸, 사자의 꼬리와 날개를 가진 케루빔이 도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cherub : 천사 혹은 천사와 같은 아이 이 날개로 보호하는 형상이 새겨진 성궤의 안에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두번째로 받아온 계명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계명은 하지 말라! 즉 욕정의 원리(Principles of Lust)에 반하는 열가지의 말씀(Decalogue)이 들어 있다. 데카로그는 하느님과 유대인들과의 계약인만큼, 성궤를 언약의 궤(The Arc of the Covenant)라고 했다. “이 언약을 지키는 한 너희를 창성케 할 것이며, 이를 어길시 국물도 없음은 물론 너희를 산산히 흐트려 바빌론의 강 가에서 울게 하거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진멸하리니…”하며 언약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그 탓에 그들은 선민이요, 계약맺기를 즐겨하는 장사치요, 고리대금업자이니…

그 이전까지 유대인들은 아무 신이나 마구잽이로 믿었고, 신의 형상을 자기 멋대로 새겨 기도했으며, 신의 이름을 경망되이 함부로 불렀을 뿐 아니라, 평일이나 안식일의 구분이 없었고, 부모에게 불효함은 다반사요, 함부로 사람을 죽였고, 아무나 눈이 맞으면 교접했으며, 도둑질은 취미생활이고, 공회와 법정에서 자신의 이익에 따라 거짓증언을 밥먹듯 하고, 늘 이웃의 재물을 탐내곤 했다고 십계명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십계명(Ten Commandments)은 분명 욕정과 욕망의 원리(Principles of Lust)에 반한다.

어제(20120515)

식은 땀을 흘리며 일어났을 때 새벽 두시였고, 소변을 보고 침대에 기어들어가자 다시 네시였다. 화장실의 불을 켜자 서치라이트 빛이 눈을 찌르고 들듯 눈이 부시고 아프고 쓰라렸다. 샤워를 하고 속옷을 갈아입고 삼성동 공항터미널로 갔다. 신새벽의 공복을 달래기 위해 시킨 고구마라테가 식어서 먹기 좋을 만한 즈음에 인천공항으로 가는 첫 버스에 올랐다. 고구마라테를 다 마시고 난 후 혼절했는지 공항이라는 안내방송에 깨어났다. 공항 도착시각은 06시 10분, 새벽을 가르며 달리는 차들은 예정시간보다 다급하게 목적지에 다달았다.

무료한 나는 공항청사를 어슬렁거리며 뭔가를 생각했다.

친구나 첫사랑, 은사님들, 잊어버린 사람을 찾는 프로그램에 대한 것이었다. 나에게 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없었다. 보고 싶기는 하나 그런 프로그램에 나가 “이런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고 말할 만큼의 절박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가슴을 치고, 벅차게 서로 껴안아야 할 그런 그리움이 나에겐 없다. 살아온 삶의 색채가 어찌 이토록 단순하며 그저 흘러가 아득해져 버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박한 그리움이 없는 만큼, 타인들의 나에 대한 그리움 또한 백지처럼 하얗고, 한 때 사랑했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모처에서 다시 만나도 가슴 뛸 일이 없는 사람으로 하얗게 소외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게 무슨 그지같은 인생일까? 왜 아무도 그립지 않단 말인가?

하늘까지 높게 쌓아올린 공항청사의 유리창 앞에서 하늘을 보며 의자 위에 풀썩 주저 앉고 말았다.

MEA CULPA : 내 탓이요

MCMXC a.D.의 두번째 싱글파트는 미에 쿠에바(Mea Culpa가 내게는 그렇게 들린다)다. 이는 16세기 이후 미사의 전례화된 고백의 시간에 가슴을 세번치며 읊조리는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는 라틴어 문구 중 일부다.

신도도 아니고 한글 전례문에 대하여 과문한 탓에, 영문을 전례문을 보면,

전능하신 하느님과 나의 형제 자매이신 여러분 앞에 제가 지은 큰 죄를 고백하노니, 제가 생각으로건, 말이건, 행위 가운데 짖거나, 저질러 어그러진 것은,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다 내 큰 탓이오니,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자들, 그리고 나의 형제 자매이신 여러분 앞에 자비로움을 간구하고, 저를 위하여 주님이신 하느님께 기도해 주심을 비나이다. 2I confess to almighty God and to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hat I have greatly sinned, in my thoughts and in my words, in what I have done and in what I have failed to do, through my fault, through my own fault, through my own most grievous fault; therefore I ask blessed Mary ever-Virgin, all the Angels and Saints, and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o pray for me to the Lord our God.

라고 되어 있다.

비행기는 9시 10분 이륙하여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날아간다.

그래 다 내 탓이다. 사랑하지 못한 죄, 사랑하되 그것을 감추고 말하지 못한 죄, 나를 사랑함을 알면서도 안아주지 못한 죄, 다 내 큰 탓이다.

오늘(20120516)

호텔의 TV를 켜 놓은 채 잤던 모양으로 치이~소리와 함께 얼굴에 쏟아져 내리는 붉고 푸르거나 초록색의 화면조정 불빛에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잠. 현지시간 06시 30분에 자명종을 맞춰놓았지만 불쑥 다시 일어나 TV를 끄고 침대에서 누워 뒤척인 시간이 04시 30분이다.

벌써 창 밖으로는 동틀 준비로 하늘이 무르익고 있었다. 서울과 시차가 1시간에 불과한 이 곳으로 볼 때, 동트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하늘은 이미 밝았다.

속옷차림으로 베란다로 나가 도시의 가로등 불빛이 점차 외로워지는 풍경을 보았다. 어둠의 위로 아침이 내습하는 모습은 믿을 수 없게 천천히 다가오지만 아침은 느닷없이 밝고 가로등은 무용지물이 되어 마른가지처럼 앙상하다.

청도(푸른섬)는 교주만의 동쪽에 있으며 만의 건너편에 황도(노란섬)가 있다. 류팅에 있는 국제공항에서 황도로 오는 사이, 홍도(붉은섬)라는 지명도 보았다.

호텔의 베란다에서 경제개발구의 한켠에 가설된 것같은 거리를 내려다 본다.

너무 뻔하여 더 이상 볼 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풍경. 낮은 언덕이 있고, 그 사이로 도로가 있고, 언덕마루까지 같은 모양의 집이 들어서 있고, 그 뒤로 아파트 단지 그리고 아득히 먼 곳에 산이 보이는 풍경이다. 그것도 커다란 산은 착시일 뿐 시골마을 뒷동산 정도로 낮은 돌산일 뿐이다. 아득히 먼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공해에 찌든 잿빛공기 탓이다.

좁은 반경 속에 풍경은 갇혀있고 눈에 들어오는 사물들의 세세한 윤곽까지 뚜렷하며, 시선이 가닿지 못할 곳이 없을 뿐 아니라, 같은 해에 같이 지어진 천편일률의 건물들, 시간의 흔적이 손망실 처리된 동네. 단지 먹고 자고 일하러 나가기 위한 베드타운 기능 외엔 없는 동네다. 그래서 이 동네의 집과 건물들에는 삶이라는 중력을 찾아볼 수 없고 대지와 친화하지 못하여 조금 들떠있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이 동네로 흘러들어 서식하다가 또 물이 빠지듯 빠져나갈 것이다. 시간의 그늘이나 자신의 인생의 일부를 흘려보낼 여지가 없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냄새가 없다. 그러한 공허함을 매우기라도 하려는 듯 동네의 한쪽 건물 위에 BAR라고 쓰여진 네온싸인이 걸쳐져 있는데, 우습꽝스럽고 그 동네가 지닐 수 있는 최대한 쾌락의 지수가 저 정도일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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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5분 발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7시30분에 호텔을 출발한 차는 공항을 지척에 남겨놓은 8시에 도로의 차량들과 엉켜 그만 멈춰섰다. 결국 비행기가 이륙한 09:50분 쯤 도로가 풀리고 10시에 공항에 도착했다.

다음 항공편은 14:50분이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다시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편다.

신경숙은 자살 시도 후 선택적 기억상실에 빠진 조카와 그런 조카를 얼마간 돌보지만 자신 또한 선택적 기억상실로 조카와 거의 같은 나이였던 21살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모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연약했다. 그들을 선택적 기억상실로 내몬 가해자들, 조카의 친구나 자신의 제자는 그녀들보다 더욱 가엽고 연약해서 배신임을 알면서도 친구의 남자와 선생의 남자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신경숙은 남자들이 그런 여자들을 보듬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남자는 함께 떠나기로 한 그 시각에 나타나지 않고 결국 카테리나행 열차는 떠난다. 그 시각은 7시가 아니고 8시이지만 그 시간이 아침인지 저녁 때인지 나는 모른다.

신경숙은 남자가 얼마만큼 연약한 존재인지 모른다. 남자는 너무 연약해서 늘 현실 앞에서 사랑을 포기한다. 그리고 자신 만의 합리화와 변명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결국 식구와 친구와 세상의 모든 것으로 부터 소외되고 하얗게 늙어가는 것을 택하게 되는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모른다. 그녀가 이런 단순한 것을 모르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여자는 선택적 기억상실 속에서 잊었던 과거를 찾게 되고 드디어 현실과 타협을 하고 조카는 두드려패는 가학성음란증(드럼)을 통해서 자신이 미워하고 돌아서야했던 것들을 직시하거나 살아갈 터무니없는 이유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찾을 생각도 없이 살아갈 뿐이다. 나에겐 이 생이 절망스러운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다. 단지 심심하고 재미가 없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내 인생은 소설이 될 수 없고 그냥 현실 속에 정박해 있는 것이다.

BACK TO THE RIVERS OF BELIEF : 믿음의 강으로 돌아가다

비행기는 14:50분을 조금 지난 시각에 창공으로 떴고 서해상에서 난기류를 만났다. 비행기의 동체는 얼개가 어긋나서 결구가 사무치는 끼륵끼륵 소리를 내며 좌우로 흔들리거나 조그만 에어포켓과 같은 것에 빠져 쿵쾅거리기도 했다. 무서웠다.

믿음의 강(Rivers of Belief)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이 믿음의 강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MCMXC a.D.앨범의 후반부에 있다. 이 믿음의 강의 초반은 스필버그 감독의 ‘미지와의 조우’에서 나왔던 음악과 매력적인 그레고리안 성가가 섞인다. 여기가 영원으로 가는 길(Way to Eternity)이다. 강한 비트풍의 할렐루야(Hallelujah)에서는 정통파적인 비잔티움풍의 성가가 나오면서 믿음의 강(Rivers of Belief)로 이어지고 크레투 자신의 노래가 나온다. 노래가 끝난 뒤 잠시 침묵이 있은 후, 어느 남자가 말한다.

When the Lamb opened the seventh seal, silence covered the sky. 3어린 양이 일곱번째 봉인을 열자, 침묵이 하늘을 가렸다.(계시록 8장 1절) 하지만 New Standard America Bible에는 ‘And when He broke the seventh seal, there was silence in heaven for about half an hour.’라고 ‘반시간 가량’이라는 문구가 더 들어가 있다.

계시록의 같은 장 마지막에는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라고 쓰여있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공항철도를 한번 갈아타고 거의 집에 다다랐을때, 소설은 끝났다. 책을 덮었다. 문득 아주 오래전 팔의 동맥을 끊어서 팔목에 하얀 붕대를 친친 감은 여자의 손을 잡았던 기억이 났다.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이상하게도 그녀의 손바닥으로 부터 가파르게 뛰는 맥박을 감지할 수 있었고 혹시 끊어진 동맥에서 다시 피가 분출되는 것은 아닌지, 내 손에서는 땀이 흘렀고 여자의 팔목의 서늘한 아픔이 전해져 왔다. 왜 그녀의 손을 잡았으며, 그녀가 누구였는지 도무지 기억할 수 없다. 경미하기는 하지만 나도 선택적 기억상실이거나 혹은 치매의 초기일지도 모른다.

책을 덮고 내릴 준비를 하자 그제처럼 한 아가씨가 내 앞에 섰다. 이번에는 미니가 아니라 하얀 스판바지다. 그 스판바지는 마치 살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호하는 뱀의 허물처럼 얇았다. 너무 꼭끼이는 것인지 신축성이 좋아서인지 바지는 아가씨의 속살의 소식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것은 물론, 피하지방 밑을 흐르는 모세혈관이 지방과 섞이면서 나타나는 살색이 흰 스판 위로 번져나오는 것 같았다.

이 몸에 만연한 색심이며, 고목나무에 핀 춘심이여! 그대에게 화, 화, 화가 있을진저!

첨언, 사족

MCMXCad/Others

1990년이란 이니그마가 첫 앨범을 발매하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해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80년대 동구가 붕괴되고, 개혁과 개방을 부르짖으며 소련이 와해되고 냉전 체제는 종식되었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의 질곡에서 벗어나면서 인류는 20세기의 마지막 10년, 1990년으로 진입했다. 1990년은 세번째 밀레니엄으로 진입하는 초입이기도 했고 휴거가 일어나고 아마겟돈에서 인류 멸망을 위한 불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그런 10년이기도 했다.

그래서 20세기 마지막 십년을 장식하는 비지니스는 종교일 것이며, 영성과 명상과 같은 것들이 창궐할 것이라고 했다. 그랬다 그 십년은 치열하게 종교적이었고 동시에 사이비적이었다.

하지만 우리를 진리로 이끌 것은 무엇이던가?

우리가 믿음의 강에 당도하기 이전에, 우리를 에덴에서 뽑아 불신의 동쪽으로 내친 것은 대체 무엇인가? 왜 하와는 말씀(성령)과 뱀(The Voice & The Snake) 중 뱀을 따랐으며, 아담은 어쩌자고 하와의 유혹에 빠져든 것일까?

뱀이 거짓이며 말씀(성령)이 우리를 진리와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어떻게 속단할 수 있겠는가? 여호와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치기 전에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4Then the Lord God said, Behold, the man has become like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stretch out his hand, and take also from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ever. (창세기 3장 22절)라며 누군가와 속삭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에덴에서 추방당한 진실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담과 하와가 추방된 것은 선악과를 먹어 죄를 지은 탓이 아니라, 저들과 같아진다는 것!

이 구절에 입각하면 뱀의 말이 거짓일 수는 없다. 뱀의 말대로 하와와 아담은 눈이 밝아졌으나, 영생할 수 있는 생명나무에 접근이 금지되었을 뿐이다.

이니그마의 앨범은 이처럼 신학적 의미가 중첩되어 있으며, 다채로운 음악이 신비롭게 혼효되어 있고, 고전적 음악을 신디사이져나 이국적인 악기와 엮어 신비로움을 엮어낸다. 게다가 엑스터시에 빠져든 여인의 거친 호흡을 가미하고 악마적이거나 아니면 천상의 목소리로 마치 진실을 알려주거나, 몸에 지울 수 없는 쾌락의 문신을 수 놓아 줄 것처럼 속삭인다.

진리란…진리란…다 그런 것이며,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이 울부짖으며 지키는) 금지된 (에덴의) 문을 두드린다고(Knocking on Forbidden Doors) ‘네개의 강’ 5에덴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인데, 네개의 강은 에덴에서 발원한다고 한다. 그 강들은 ① Pishon : 하빌라(Havilah)의 땅을 둘러 흐른다고 한다. 하빌라에서는 正金 뿐 아니라, 베델리엄(bdellium)과 줄마노(onyx)가 난다. ② Gihon : 구스(Cush)의 온 땅을 적신다. ③ Tigris : 힛데겔이라기도 하며, 앗시리아의 동쪽으로 흐른다. ④ Euphrates : 유브라데라기도 한다. 이 흐르는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갈 것인지?

참고> 기차는7시에떠나네

참고> MCMXC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