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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체험)을 이성으로 분석하면 …이라는 뜻임.

언어의 사회 실용적인 기원은 내적 삶의 정신적 개인적 현실들 간의 소통에 있어서는 부적당하게 된다. 나의 내적 지속의 순간들은 비교할 수 없이 독특하다. 내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단어를 통해 그 순간들을 타인에게 전달하게 되면 그 순간들은 평범해지고 왜곡될 뿐이다.[베르제즈와 위스망이 쓴 <철학강의> 61쪽]

이 철학강의의 내용을 보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언어(이성)로는 자신 만의 독특한 내적 지속의 순간(체험)들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언어(사고)란 아래의 보르헤스의 언명과 같이 차이점(독특한 점, 변별적인 것)을 잊는 것(즉 일반화하고 개념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기된 해석학은 설명되어지지 않는 것(정신과학)의 이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해란 결국 오해에 다름이 아니다.

그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칼어, 라틴어를 습득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푸네스의 풍요로운 세계에는 단지 거의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 밖에 없었다.[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 중]

나는 보르헤스의 글을 읽으면서 경험의 폭죽들이 터지는 그 순간 순간들과, 그 매순간에 우주의 넓이로 다가오는 경험의 무늬들을 생각했다. 시공간에 펼쳐지는 그 무한한 세계를 생각하자, 절망적인 공포가 다가왔다. 아마 개와 개구리와 여치들은 매순간 공포와 경이에 사로잡혀 그 무한한 세계를 받아들이고 또 흘려보낼 것이다. 마치 말을 모르는 갓난아이의 눈 위에 스쳐지나는 정체를 모를 다양한 표정들처럼 말이다. 결국 언어란 우리의 뇌가 감내할 수 없는 이 무한한 경험들을 잠재의식 속으로 흘려보내고, 감각의 경험을 추상화하는 것, 그래서 기억과 사고를 가능케 하는 압축장치가 아닐까?

결국 느낌(! : 체험)은 사유(? : 이성)로 분석(÷)하고 종합(=)할 수없는 것이다.

썩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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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지 않는 것들을 위한 변명은 방 높이 놓여있는 시렁 위에 먼지 속에 뽀얗고, 우리가 시간에 의하여 능욕당하고 있을 즈음, 친구는 27센티미터쯤이라도 살았더라면 하고 한 시간을 넘도록 나를 고문하였기에 하는 수 없이 사랑과 여행을 이야기했지만, 기대한 만큼의 성찬은 없었고, 지도 위에 그어진 음란과 방종의 선분들을 감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계는 이제 四季를 지나 미망의 계절로 향하고, 시간은 유혹의 9시 43분. 죽음마저 멈추어 있는 그때, 금이 간 모래시계는 바닥 모를 시점과 끊임없이 입 맞추고 있었습니다.

온갖 것을 둘러싼 광휘와 사랑의 뿌리를 찾지 못할 때, 잃어버린 시간과 조각난 지평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 존재. 음울과 몽상 속에서 갈증과 기아를 면치 못할 것이며, 정당한 믿음또한 갖지 못하여 영원한 이교도로 희망도 절망도 없는 하루와 또 다른 내일을 맞이할 것입니다.

썩지 않는 영혼과 육신을 가진 자, 나여! 不壞의 자리에 놓여질 수 있는 것은 녹슬은 신화와 탐욕과 인간이 만들어낸 갖은 오물들. 이것들로 영생의 자리에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단지 죽음이 오래된 동화가 아니기를 바랄 밖에요.

도시의 가냘픈 햇빛조차 두려워하는 어둔 골목 속에서 유쾌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살아가야 하는 것들이 부벼지고 닳아가는 좁다란 광장에는 어린아이들과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부지런한 노동의 땀 냄새와 밥 짖는 냄새로 가득 차 있고 때론 반 뼘의 땅으로부터 생기에 가득한 초목과 꽃이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것처럼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태어날 것에 대한 은총이며 죽어갈 것에 대한 축복이지요.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하더라도 그 금을 지나 가볼 때까지는 가봐야 하는 것이 온갖 생명에 부여된 의무이자 권리일 것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죽음을 부여했을 때, 드디어 우리는 신보다 위대한 그 무엇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은 스스로 죽음을 알 수 없으며, 썩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교만한 사유를 용서하소서. 용서합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