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i-xmmxix 도서관에서

오늘 파리로 간다.

아침에 일어나 영국도서관으로 갔다. 고색창연할 줄 알았는데 신식건물이었다. 도서관에 들어서자 정면에 건물 높이의 사각의 유리탑 안에 원목으로 단단하게 만든 서가가 있고, 서가 안에 정장된 오랜된 책들이 꽂혀 있다.

유리탑 왼쪽 옆에 고서를 전시한 방이 있어 들어섰다.

…코덱스 시나이티쿠스 4세기 중반, 팔레스타인에서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희랍어본. 온전한 신약을 포함하고 있는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필사본이며, 희랍어 구약 판본(셉추아진타)으로 보아도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참조본이다. 시나이산의 캐서린 수도원에 있었기 때문에 시나이본(the book from Sinai)라고 한다. 참고로 신약이 4세기 후반부터 정경화되는데, 이 판본은 그보다 한세기 이상 빠르며, 4세기 초반의 디아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제작된 판본이다. 히브리 구약 단편인 사해두루마리도 늦은 것은 4세기라고 하니, 본 시나이 코덱스보다 그다지 빠르지 않다. 양피지로 만든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가공했는지 모르겠지만, 비단같이 얇다.

먼저 헨델, 바흐, 모짜르트, 드뷔시의 악보가 있다. 말러의 악보는 마치 마인드 맵처럼 보였다. 또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가 ‘예스터데이’를 작사한 노트가 있다. 지도들과 코덱스들, 유태문서들, 그리고 마그나 카르타의 원문. 오래된, 읽을 수조차 없는 도서들 사이에서 황홀해 있는 사이, 문득 1시간 30분이 지났다.

도서관 옆의 세인트 판크라스역에서 파리로 가는 티켓을 끊고, 피카딜리 서커스로 가서 앵거스 스테이크에서 점심을 먹었다. 8온스 짜리 스테이크를 시켰더니 점원이 적을 것이라고 한다. 서양사람들이 먹는 만큼 양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괜찮다며 웰던을 시켰다. 소스는 머슈롬을 시켰다. 점원은 다른 것은 필요없냐고 한다. 기네스 맥주를 주문했다. 풍미가 서울의 기네스와 달랐다. 거품도 풍성하고 서울처럼 쓰지 않다. 맥주가 걸쭉하여 꼭 씹는 느낌이 든다. 맛있다. 스테이크는 점원의 말처럼 양이 너무 적다. 웰던이라 퍽퍽했으나, 소스가 맛있어서 먹을 만 했다.

식사 후 피카딜리 서커스 부근을 다니다가 숙소로 돌아가 짐을 들고 역으로 갔다. 오이스터 카드의 잔액을 환불(GBP15.5)을 받고, 판크라스역에서 먹을 것을 사고 남은 파운드를 유로로 환전을 하니 다름아닌 환전은행의 환율이 도둑이다.

16:31분 기차를 15:00에 개찰하고 짐 수색을 했다. ‘스위스 아미’ 접는 칼을 빼앗겼다. 수색하는 여자가 한숨을 쉬는 나에게 빼앗은 칼들이 가득 든 통을 보여주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합실에서 한시간 반을 어슬렁거리다 16:30분에 탑승, 16:41분 열차는 출발한다.

열차가 시속 334.7Km로 달린다는 전광판이 보인다. 영-불 간 해저터널의 길이는 50.45Km이며, 바다 밑 75m에 있다고 한다.

프랑스로 넘어와서도 스마트폰 시간이 바뀌지 않아 껐다 켠다. 시간이 한시간 동쪽으로 건너왔다.

당초 오후 7:47분 도착 예정이었으나, 유로스타는 8시를 넘어서 파리북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낡고 지저분한 지하철을 타고 예약된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자마자 피곤하여 위스키를 한 잔하고 잠이 든다.

20191008

vii-xmmxix 바닷가에서

…세븐 시스터즈 중 하나, 석회암 절벽은 바닷물에 삭아 무너진다. 절벽 아래는 무너져 부서진 석회암 조각 투성이다.

세븐시스터즈(Seven Sisters Cliff)와 브라이턴(Brighton)을 갔다 왔다.

세븐시스터즈는 석회암 절벽과 완만하고 넓은 구릉과 언덕 위로 소와 말, 양떼가 풀을 뜯는 목가적인 분위기 외에는 볼 것 없는 곳이다. 지금도 바닷물에 석회암이 용해되며 무너지고 깎이고 있는 하얀 석회암 절벽, 영국해협의 바다 위로 무너져내린 석회암이 파도에 부서지고 바닷물에 녹아 해변의 바닥이 하얗다. 밀려오는 파도 또한 석회석이 녹아있는 것처럼 거품이 걸쭉하다.

이곳은 영국사람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잘모르고 한국관광객에게만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혼자오면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잘 모르고, 교통편도 막연하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리자 등대가 보이는 언덕의 끝까지 갔다.

이 곳의 풍경은 약간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덕 밑의 도로로 달려온 차가 마치 내 목을 돌아 어깨 저쪽으로 흘러가고, 구릉지 저 쪽의 방목하는 소들이 나의 손 끝을 스치며 지나치는 것 같은, 왜곡된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것 같은 풍경이다.

…석회암이 침식되어 형성된 구릉으로 사과를 떨어뜨리면 어느 쪽으로 떨어질 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

등대는 등대라기보다 자연석과 시멘트로 견고하게 지은 3층짜리 가정집같다. 수직과 수평을 가늠할 수 없는 풍경을 헤치고 등대번호와 광파표지, 광달거리 등을 써놓은 등대표지판을 찾기 위해 등대의 뒷면으로 돌아갔다. 등대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었지만, 표지판은 없다. 대신 2층의 창 커튼 옆에서 한 사람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 사람 뒤로 샹드리에의 노란 불빛이 보였다. 불빛을 보자, 불현듯 그 창 가에서 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내려다 본 내 모습은 약간은 누추하고 피로한 모습이었다.

…등대의 입구 반대쪽이다. GPS의 세대에 불 밝히는 등대가 있다는 것은 아직 아날로그 세계가 디지털 블랙 홀 속으로 빨려들지 않았다는 증거인 것 같다.

언덕을 내려오며 본 세븐시스터즈의 절벽들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발광을 하며 서쪽 끝까지 바다에 발을 드리우고 있다.

현지 여행사에서 준비한 라면과 김밥을 먹고 브라이턴으로 갔다.

…브라이턴의 비 오기 전 시내 전경

어촌에서 휴양지가 된 곳이라고 한다. 어촌인 만큼 당연히 ‘피쉬 앤 칩스’를 먹어야 할 곳이라고 했지만, 혼자 먹기에는 많다고 하여 먹기를 포기했다. 브라이턴에는 조지4세가 지은 유치한 궁전이 있고, 바닷가에는 놀이기구가 있었지만 어쩐지 철지난 느낌에 을씬년스러웠다. 엔틱 상점이 골목골목 있었지만, 쓸 만한 것이 없었다.

골목을 돌아다니던 중 비가 왔다. 허기가 졌고 바에 들어가 맥주와 간단한 스낵을 먹었다. 맥주는 맛이 괜찮았다.

추운 날씨에 뭘 먹은 것이 좋지 않았는지, 아마 점심 때 매운 신(컵)라면을 먹고 비를 맞은 뒤 맥주를 한 탓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 내내 속이 불편했다. ‘런던소풍’의 가이드는 일행들을 위하여 런던시내의 쇼핑할 곳과 먹거리를 소개했다. 오는 길 내내 “심각하게 맛있다”는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를 들으면 배가 더 불편했다. 아이폰에 담아 간 음악을 들으며 배앓이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영국에 와서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한 것 같다.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와 얼 그레이 茶 한 잔, 그리고 숙소의 여자 호스트가 ‘불금’이라며 데려간 Pub 외엔 남는 것이 없는 빈한한 여행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간 후에 또 뭔가 조사하고 생각하며 정리를 해 나갈 것이다.

2019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