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ii-xmmxix 안녕 로마

어제는 늦게 로마에 도착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할 일이나 갈 곳이 없다. 그래서 늦으막이 카타콤베로 간다. 버스는 남쪽으로 달렸다. 넓은 도로의 중앙선에 화단이 있고 거기에 로마소나무가 자란다. 아피아 가도같은 분위기다. 도로 주변으로 5층 짜리 아파트 단지가 늘어서 있다. 로마의 신시가지같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간다. 여행가이드에 나온 카타콤베는 문이 닫혔다. 좀더 가니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가 있다.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의 입구

로마라는 신성한 도시에 시신을 묻는 것은 불법이었다. 카이사르와 베스타 처녀들과 유서있는 가문에만 허용되었다. 그래서 로마로 향하는 길 가에 많은 무덤들이 들어선다.

카타콤베가 아피아 가도 주변에 산재되어 있는 것도, 로마의 가난했던 사람들은 그들 가족을 위한 무덤을 아피아 가도 옆에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땅을 파고 지하에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1세기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당시의 기독교인들 또한 가난했기에 지하무덤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은밀히 이곳에 모여들어 예배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았다고 말하는데, 박해를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살리기 위하여 동분서주했다. 예수를 죽이고자 한 자들은 바리새인과 극렬 수구 보수주의 유태인들이었다. 그들의 광기 아래에서는 베드로는 물론 다른 제자들도, 가족도, 막달라 마리아도 속수무책이었다. 본디오 빌라도 만이, 새벽부터 무도한 군중과 제사장들 앞에서, 예수가 무슨 죄를 지었으며, 너희가 고발한 일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그런 일이냐고 묻는다.

본래 빌라도가 거주하고 로마 병사들의 막사가 있던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해안도시이자, 헤롯이 건설한 항구인 가이사랴(Caesarea)였다. “유월절을 계기로 예루살렘에서 대규모 봉기가 있을 것이다”는 따끈한 첩보가 가이사랴에 도착한다.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는 백부장 휘하의 병력으로는 봉기를 차단할 수 없었다. 빌라도는 수리아(시리아)의 총독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한다. 한편 예루살렘의 동향을 살피고, 일이백명에 불과한 병사들을 진무하는 한편, 봉기 시에 대응 작전을 세우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관저에 와 있었다.

유월절을 둘러싼 상황은 일촉즉발이었고, 결국 제사장들과 군중들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끝까지 예수를 살리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한다.

빌라도와 같은 지성적인 품위와 남을 이해하려는 관대함은 당시 로마인들이 추구하는 덕이었고, 그것이 바로 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었다. 그들은 인종과 종교 따위에 배타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의 종교를 토착화하고 이집트의 비교에 깊은 호기심을 표하는 한편, 소아시아의 미트라교는 물론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까지 다 용납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기독교에 대해서만 왜 그토록 사박했던 것일까?

기독교인들은 유대의 전통적인 종교에 반발하고 일어난 신흥종교이자, 이들이 떠받드는 구세주라는 자는 십자가형을 받은 로마의 대역죄인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은밀하게 모여 ‘사람의 살과 피를 나눠 먹는다'(성체배수)고 한다. 게다가 이들을 지도자들 중 여성이 많고 남녀가 함께 모여 의식를 갖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의식은 성적 혼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관계 상 몹시 사악한 종교라는 편견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적시했듯이 죽음을 불사하는 이 자들의 종교적 광기는 합리적인 로마인들의 의구심을 부추겼다.

박해가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말은 나는 믿지 않는다. 신은 창조사역을 이루시고, 피조물인 인간이 신의 불완전한 창조사역을 구원사역을 통하여 완전하게 한다는 기독교 내에 함장(회교의 교리에도 이런 창조와 구원사역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된 모순 또한 믿지 않는다. 인간 세상에서 박해를 받고, 핍박을 가하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이유가 온당하며, 정의로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카타콤베의 어두운 공간의 어둡고 차고 눅눅한 공간이 전혀 성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의 길이는 26Km에 달한다고 한다. 로마의 카타콤베의 총연장은 900Km라는 말도 있다. 잘못하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가이드와 동반해야 한다. 관람시간은 약 25분이 걸린다. 지하 4층으로 되어 있다는 데, 첫층은 환기통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꽤 밝다. 첫층은 예배하는 장소와 각종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어 무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두번째 층 부터는 무덤들로 어둡고 깊다. 카타콤베의 골목마다, 벽에는 시신을 누일 사람 키 길이의 구멍들이 뚫려 있다.

이 카타콤베에는 16명의 교황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카타콤베를 나와 아피아 가도를 찾아보려고 하다가, 길을 잃었다. 땡볕 아래에서 한 시간 가량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산 칼리스토를 돌아 아피아 가도를 달린다. 아피아 가도가 돌로 깔려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스팔트다. 로마 소나무는 도로 주변에 자라고 있다. 아피아 가도는 기원전 4세기에 세워졌으니, 당시의 소나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산처럼 나무둥치 위에만 솔잎이 자라는 로마 소나무는 야자나무처럼 이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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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아 가도, 1하지만 로마의 전역이 아피아 가도였다. 로마소나무가 높게 자랐다.

아피아 가도의 로마 소나무는 이 길을 지나는 로마병단과 나그네를 위하여 그늘을 드리우고 잠시 비를 그을 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숙소로 돌아가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로마에 땅거미가 진다

그리고 지친 다리를 끌고 로마의 야경을 보러 간다. 로마의 야경이 이상스럽게 슬프다. 베네치아 광장으로 가서 에마누엘레 2세 통일기념관의 옥상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본다.

베네치아 광장 옆 도로

로마의 건물과 크고 작은 성당의 돔 위로 10월의 지친 오후가 저물고 땅거미가 진다. 도로 위로 자동차들의 전조등이 하나 둘 씩 켜지고 상점과 창문에도 불빛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불빛들은 “우리에게는 은밀한 생활이 있다. 그래서 네가 서 있는 이 거리가 더욱 낯설고 고독할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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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때문에 트리야누스 시장이 연극무대처럼 보인다

통일기념관을 내려 와, 비눗방울처럼 꺼져버릴 것 같은 조명 속에 포로 트라이아노의 폐허를 보며 콜로세움까지 걸어갔다.

트라야누스 원주

어둠과 조명 속에 서 있는 콜로세움은 꼭 잔칫날 케이크처럼 보였다.

밤에는 콜로세움이 낮게 보인다

버스를 타고 베드로 광장으로 갔다. 광장의 중심부는 어둠 속에 텅 빈듯 했지만 베르니니 회랑과 베드로 성당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으로 광장의 바닥은 물결처럼 춤췄다.

베드로 광장에 불빛이 물결처럼 흐른다

광장에서 천사의 성까지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사람들도 드믈다. 천사의 성에 당도했고 나는 여행을 끝내기로 했다.

안녕, 로마

20191022

xxi-xmmxix 나폴리

유로 자전거 나라에서 잡은 호텔이 살레르노의 해안가에 있는 줄 알았으나, 멀리 내륙에 있었던 모양이다. 아침 바람 속에 바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침에 폼페이로 간다. 폼페이는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산의 분출로 화산재에 묻혔다. 당시의 인구는 2만명이었고, 그 중 10% 정도가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상당히 내륙 쪽에 위치하고 있으나, 당시에는 성벽 옆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항구도시였다고 한다. 성문 역할을 하는 Porta Marina 옆에 부두라고 할만한 접안시설이 보인다.

폼페이의 ‘바실리카'(공회당). 바실리카는 나중에 예배당, 교회로 의미가 바뀐다

포르타 마리나를 지나 바실리카(Basilica) 자리에 선다. 공회당인 바실리카에서는 사람들을 모여 투표와 재판을 위하여 토론과 설전을 벌였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공회당의 대리석 기둥 안에 벽돌이 드러나 있다. 본래는 대리석 기둥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63년 2월에 대지진이 있었고 당시 파괴된 신전과 건물을 다시 짓기에 대리석이 턱없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래서 벽돌로 기둥 골조를 만들고, 시멘트를 바른 후, 대리석을 빻아 만든 가루를 시멘트 페이스트 등의 접착제로 붙여 겉면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그 시대에 인조대리석이라니 놀랍다.

대리석의 일부가 깨져나가 안의 벽돌이 드러남

현대에 생산되는 시멘트가 로마 때 사용하던 것에 비해 품질이 뒤떨어진다고 한다. 현대의 시멘트 건물을 예로 들면 응고되는데 백년, 이것이 다시 용해되는데 백년, 도합 200년 정도의 수명을 갖는다고 하는데, 돌과 시멘트로 지은 콜로세움은 아직도 끄떡없다. 부두 건설에 사용한 시멘트는 아직도 응고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길을 가다보니 도로의 포석(鋪石)에 손가락 두마디 깊이로 마차 바퀴 자국이 나 있다.

포로(Foro)로 간다. 쥬피터 신전과 원로원 건물과 비너스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시장(Foro)의 한 쪽 구석에는 화산재 속에 죽은 사람들과 개의 석고주형이 있다. 화산재 속에 죽은 시신이 사라진 텅빈 공간에 구멍을 뚫고 석고를 부어 캐스트해낸 것이라고 한다. 1861년 이 캐스팅 방법을 착안하기 이전에 폼페이 유적 밑에 텅빈 공간으로 사라진 사람과 동물들은 발굴과 동시에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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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의 포룸, 뒤로 베수비오 화산이 보인다.

목욕탕으로 간다. 목욕탕에는 체력단련을 하는 곳과 옷을 갈아입는 곳, 그 다음 냉탕 그리고 온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온탕의 경우 실내온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벽 사이로 온기를 불어넣었다고 한다.

목욕탕의 내부

욕탕을 나와서 파우노1파우노(Fauno)는 그리스의 판(Pan)으로 목신(牧神)이다.의 저택으로 갔다. 이 저택의 아트리움2Atrium : 중정이나 오픈 스페이스로 주위에 집이 세워지면서 마련된 중앙 정원으로 요리할 때 발생하는 연기를 바깥으로 내보내고 가정에서 허드렛물로 사용할 빗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에 파우노의 상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자 손님들과 심포지움3Symposium : 간단한 스낵과 함께 즐기는 술자리을 즐길 수 있는 건물이 있는데, 바닥에 미술교과서에 나오곤 하던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벌하는 모습’을 모자이크한 타일이 깔려있다.

파우노 저택의 아트리움, 그 위에 파우노상이 놓여 있다

파우노의 집을 나오자 아직도 물이 나오는 수도가 있고 수조가 있다. 산에 있는 물을 아피아 수도교를 통해 공급했다고 한다. 수도교는 1킬로미터에 3미터의 경사로 지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한강의 길이는 494Km, 한강은 태백시의 금대봉 북면에서 발원한다는 데, 금대봉의 높이는 1,418m이다. 

시장 역할을 하는 곳에 갔다. 2층으로 된 상점가였다고 하며, 벽에 물고기(어물전), 포목 따위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베이커리가 있는데 로마식 맷돌과 화덕이 있다. 당시 부자들은 집에서 취사와 식사를 했지만, 서민들은 집이 좁아 부엌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밖에서 음식을 사 먹어야 했다고 한다.

야외극장으로 간다. 아침에 나폴리에 입항한 크루즈선 여행객들이 폼페이로 몰려들었다. 서로 길을 양보해야 될 정도로 폼페이의 골목이 여행객들로 꽉 찼다.

야외극장

그리스와 로마의 야외극장이 구조가 같아 보이지만, 서로 다르다. 그리스는 야외극장은 산비탈에 세웠다. 비탈에 관객석을 놓고 그 밑에는 공연을 하는 바닥이 있다. 로마는 평지에 관객석을 세우고 무대를 마련했다. 그리스의 야외극장은 원형으로 만들 수 없지만, 로마의 야외극장 두개를 마주보게 세우면 콜로세움과 같은 원형경기장이 된다. 야외극장을 Teatro Grande라고 하는데, 원형경기장은 Anfiteatro라고 한다. 이는 Teatro 두개를 붙여놓았다는 것이다.

검투사의 연습장, 시설이 좋다.

그 다음에는 검투사들이 연습하는 곳으로 갔다. 검투사의 숙소는 2층으로 되어 있다.

두시간의 폼페이 유적 관람은 이것으로 끝났다.

파괴된 유적이지만, 이천년 전의 당시의 생활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보면 또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이고, 이것은 무엇이지 하는 의문은 더욱 커질 것 같다.

창공에 빛난 별 물 위에 어리어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폼페이를 떠나 나폴리의 산타루치아 항구로 간다.

가이드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해변의 피자전문점에서 점심으로 나온 피자 3판 모두 맛은 없고, 배만 부르다. 로마에서 먹었던 피자처럼 여기도 맛없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모짜렐라 치즈는 부두의 물기를 꽉 짜낸 식감에 쫀득하긴 했지만 맛없기는 마찬가지다.

식사를 마친 후, 계란성이라는 해변에서 좁은 교각으로 연결된 섬 위에 지어진 델로보 성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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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로보성

중세의 성채 느낌이 물씬난다. 성의 동쪽은 나폴리 내항이다. 크루즈 터미널에는 십만톤급 크루즈선박 3척이 입항해 있다. 각종 선박들이 엉켜있는 항구 너머로 베수비오 화산이 보인다. 성에서 화산까지 직선 거리는 13Km 남짓 매우 가까워보인다. 서쪽으로는 아득한 해변이 햇빛에 눈부시다.

나폴리 항구, 크루즈 선이 입항해 있다

이 성의 이상한 점은 바다를 향해 있어야 할 포대가 내륙을 향하고 있다. 북쪽 보루에만 포안과 대포가 배치되어 있는데, 포의 타격 중심은 섬과 연결된 교각 쪽으로 향해 있다. 이것이 나폴리의 역사를 대변한다.

델로보 성의 포대

나폴리는 로마가 되기 이전에는 쿠마의 무녀가 살던 곳, 그리스의 식민도시였다.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는 동고트 왕국, 비잔티움 제국, 노르만족의 시칠리아, 호엔슈타우펜 왕가, 아라곤 왕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나폴리-부르봉 왕조 순으로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 땅의 정복자들은 외부의 세력보다, 식민지 사람들의 반란이 두려웠다. 나폴리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면, 정복자들은 성으로 쫓겨와 대포를 해변의 다리를 향해 걸쳐 놓고 다리를 건너는 반란군을 기다렸을 것이다.

오랜 식민지 지배 탓인지 나폴리 방언은 이탈리아어와 다르며, 나폴리어라고 말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탈리아 영화 ‘웰컴 투 사우스‘를 보면, 북부에 사는 이탈리아 사람의 남부 사람들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코미디 형식으로 보여준다. 무지의 정도는 영남과 호남의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라오스에 대해 갖고 있는 무지의 수준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북부 사람인 알베르토는 남쪽 사람들은 도둑들이며, 마구잡이로 총질이나 해댈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탄조끼를 구해 입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남쪽 바다와 태양 아래에서 만난 순박한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편견과 무지를 깨트리고, 즐거운 이웃이 되는 코믹한 과정을 보여준다. 무대는 나폴리의 남쪽 살레르노에서도 한참 더 남쪽 바닷가 깡촌마을 카스텔라바테라고 한다. 이 영화의 경우 나폴리 사투리를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했다. 어떤 사람은 거부감을 느꼈다지만 어떤 면에서는 절묘한 번역인 것 같다.

“여기에서 외지인은 두번 운다. 처음 왔을 때 (있기 싫어서) 울고, 떠날 때 (떠나기 싫어서) 운다.”

델로보성에서 내려와 나폴리의 중심지라는 언덕 위로 올라간다. 언덕을 올라가자 동쪽으로 항구가 품에 안겼다.

“나폴리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아침마다 만(灣)을 굽어보는 플로리디아나 장원(莊園)을 찾아가서 정오의 시계가 칠 때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이리저리 거닐곤 했다. 그 한가로운 무위의 시간들은 파리에서의 열에 들뜬 듯한 시간들보다도 더 내 가슴을 가득하게 해주었다. 이같이 가슴 깊이 파고드는 풍경 속에서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데만 골몰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4장 그르니에의 ‘섬’ 중 103쪽

플리비시토 광장과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성당

언덕 위의 플레비시토 광장은 터무니없이 넓다. 광장의 서쪽 경사면으로는 판테온을 모티브로 만든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성당이 있다. 성당의 정면 파사드 옆으로 회랑이 있는데,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의 베르니니 회랑을 중간에서 잘라낸 모습으로 광장을 안고 있다.

맞은 편에는 레알레 왕궁과 그 옆으로 이탈리아 오페라 3대 극장 중 하나인 산 카를로 극장이 있다.

레알레 왕궁

‘갈레리아 움베르토 I’ 입구

1860년에 문을 열었다는 카페 감브리누스에서 커피를 한 잔했다. 서너 티스픈 정도 밖에 안되었지만 향신료 때문에 기침이 나올 뻔 했다. 맛은 강렬하면서도 쓴, 그러면서도 단 맛이 자꾸 올라왔다.

나폴리 서민들의 생활을 엿보기 위하여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차 한대 지나기 힘든 좁은 골목, 그 위로 5~6층 짜리 집들이 있다. 지붕 끝에 간신히 당도한 햇빛 아래 숨결마저 그늘 진 창문, 왜 사느냐? 결국 나는 타인의 생활을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길 가로 문이 열려있는 집 안을 들여다 보면, 문 쪽으로 개수대와 주방가구가 허물어질 듯 놓여 있고, 식탁으로 쓸 탁자가 있으며, 한쪽에는 침대가 있다. 골목과 골목을 지나며 엿본 서민의 생활은 그러했다.

나폴리의 골목

장 그르니에는 “나폴리 만의 부드러운 해안선은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해서, 인간이 그 앞에 서면 웬일인지 스스로 불편해짐을 느낀다”고 쓴다. 하지만 ‘불편해짐’을 ‘무력해짐’이라고 바꿔야 한다. 진선미와 전능과 위대함과 영원같은 것들 앞에 사람은 불편한 동시에 굴복하고 무력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빈틈을, 공기 구멍 하나를, 숨을 내쉴 수 있고,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그 빈틈을 찾아내지 못한다.”5본문의 따옴표는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 중 88~89쪽에서 따옴 그래서 장 그르니에는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언제나 우리 내부의 신비를 감추고 있는 연약하고 얇은 막이 터지는 순간을 위해서만 살자. 그 슬픔의 밑바닥에서, 노래 한 가락이 터져 나올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과소평가하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처럼, 가난과 질병과 고독과 낯설음에 내몰렸을 때, 영원성은 우리에게 또렷이 모습을 나타낸다.”6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 중 89쪽

고독과 낯설음의 끝에 영원성이 나타날 것으로 나는 믿지 않는다. 장 그르니에조차도 영원성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나폴리가 존재의 불변을, 그 단일성에서 비롯한 영원(시간)과 무한(공간)을 주장하던 엘레아7웰컴 투 사우스의 무대인 카스텔라바테에서 조금 더 남쪽에 있는 벨리아가 예전에 그리스의 식민도시 엘레아다. 학파가 살던 옆 동네라고 하더라도, 영원이란 사고실험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우리는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들만 볼 수 있다. 찬란한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우리가 힘을 다하여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순간이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에 아득해지는 것이다.

소설가 한강8채식주의자로 맨 부커상을 받은 한강은 시인으로 먼저 등단(1993년)했고, 다음해 신춘문예에 소설가로 등단한다은 자신의 시에 이렇게 쓴다.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9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중 일부

나폴리의 바다도, 좁은 골목 속의 그늘 진 생활도, 매 순간마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폴리 사람들은 햇빛과 바다, 사랑하는 가족, 즐거운 식사와 진실한 믿음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2019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