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x-xmmxix 로마 배회

아침에 일어나니 갈 곳이 막연하다. 그래서 우선 내일 남부 투어의 집합장소인 산타마리아 델라 마조레 성당으로 가 본다. 이 성당 부근에서 라오콘이 나왔다고 한다. 다음은 테르미니역 옆에 있는 공화국 광장을 간다.

공화국 광장

광장의 건너편, 마리아 델라 안젤라 성당으로 간다. 로마 대욕장을 고쳐 성당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폐허를 통해 들어가다보니 마치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지만, 안은 넓고 천장의 조명 탓에 현대에 지은 건물같다. 밖으로 나오면서 보니 검붉게 산화시킨 철문의 부조(浮彫 보다 半彫가 맞다)가 인상적이다.

성당의 정문, 대욕장의 입구를 살려 문을 만든 것 같다

디오클레치아노 로마국립박물관으로 간다. 이 또한 로마 대욕장 ‘테르메 디오클레치아노’에 세워졌다고 한다. 로마의 중앙역인 테르미니역의 이름도 욕장(Thermae)에서 왔다고 한다. 대욕장이 테르미니역까지 였다고 하니 규모가 엄청나다.(120.000m²이니 바티칸의 1/4 규모다)

이 디아클레치아노가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44~311년)다. 로마의 쇠퇴를 막아보고자 동서방에 각각 정제(正帝, Augustus)와 부제(副帝, Caeser)를 두는 사두정치(Tetrarchia) 체제를 만들었다. 당시 그는 동방의 정제였으며, 서방의 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였다.

또 기독교를 강력하게 탄압(305~309년)한 것으로 유명한 황제다. 303년 2월 그는 기독교 탄압을 위한 칙령을 발표하고 기독교 교회와 성물, 성전을 파괴하고 기독교인의 모임을 불허한다고 공표했다. 이에 따라 ‘대박해시대’가 시작된다. 기독교 측의 자료에 의하면 이 기간동안 약 3,000 ~ 3,500명이 순교했다고 한다. 일부 연구자는 순교자가 너무 적다고 하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의 글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육신으로 부터 당장이라도 풀려나 소멸될 수 있는 해탈의 각오가 되어 있는 영혼은 얼마나 칭송할 만한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각오는 반드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순간의 결단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어야지, 그리스도교처럼 법관의 명령도 무시하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오는 것이면 안된다. 심사숙고해야 하며, 품위가 있어야 하며, 타인에게 신념을 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들처럼 영웅적, 극적 제스처를 써서는 아니된다.”

이 글을 보면, 기독교인들의 순교(죽음)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현제 아우렐리우스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대박해시대 중에도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이 아니라, 동방의 소아시아 지역 사람들이었다.

대박해와 함께 디아클레티아누스는 성물, 성전의 파괴와 함께 기존에 있던 경전들을 불태워버렸다. 구약의 경우 셉추아진타로 결집된 것이 오랫동안 있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신약의 텍스트의 경우는 이본도 많고, 분서도 된 관계 상, 기독교 공인 이후 산재된 경전을 모으고 편집하여 정경화(Canonize)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 정경화 작업은 유세비우스가 초대 교회에서 신뢰성에 논쟁이 되는 성경의 책들을 언급하면서 시작되었다. 키릴루스는 이 중에서 ‘경전성에 의심이 없는 문서’1Homolo-goumena : 4복음서, 바울의 편지, 베드로가 보낸 첫째 편지, 요한이 보낸 첫째 편지와 ‘경전성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서’2antilegomena : 베드로가 보낸 둘째 편지, 요한의 둘째, 셋째 편지, 유다의 편지, 야고보의 편지를 합쳐 26권의 목록을 만든다. 이는 라오디케아 공의회(363년)에서 추인되며 현재의 신약성서 모습을 갖춘다. 여기에 ‘경전성 인정은 어려우나, 잘 알려진 문서’3Nota : 베드로 묵시록, 요한계시록, 디다케, 바나바의 편지, 헤르마스의 목자 등로 분류했던 요한계시록을 ‘경전성에 의심이 없는 문서’로 보아야 한다고 하여 27권으로 된 신약성서의 구성은 382년 로마 공의회에서 확정된다. 그러니까 지금의 성서가 축자영감설4逐字靈感說 : 성서는 글자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단 한 글자도 한 문장도 틀림이 없으며, 이로 인해 오류가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성경관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주교와 사제라는 교회의 이익을 대변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해 분류되고 판단된 결과라는 것이다. 무수한 이본에 이본이 쌓이고 섞인 필사본들 가운데, ‘어느 것이 진본이냐’하는 판단은 주교와 사제들에게 맡겨졌다. 그때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지 이미 350년(AD382)이 지난 시점이었다.

인테넷이 잘 안되어 부근을 한참 찾아다닌 후에 겨우 박물관에 들어간다. 로마에서 가장 방대한 고고학 유물이 있다고 하지만, 박물관은 한적했다. 대욕장은 마리아 델라 안젤라 성당의 벽 뒤에 흔적만 있다. 토요일인데 성당 벽에서 성가가 울려나왔다. 욕장 옆 회랑에는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흉상이 있다. 황제라기에는 너무 편안한 인상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흉상

고고학 박물관이라고 하지만, 전시된 유물들이 콜로세움이나 포로 로마노에서 불과 몇백년 거슬러 올라가는 탓에 고고학적 유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있다면 고대 라티움 지역의 발전에 대한 전시물을 자세히 보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에 세워졌다고 한다. 로물루스(Romulus)가 레무스(Remus)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테베강 건너편 아벤티노 언덕에 레마(Rema)가 세워졌을 것이라고 한다. 이후 244년간 7명의 왕이 왕정체제를 유지했다. 왕정이라고는 하지만, 도시의 한쪽 귀퉁이에서 간신히 연명을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타르퀴니우스 왕가의 아들 세스투스(Sextus)가 루크레티아를 강간한 일로 타르퀴니우스를 왕좌에서 몰아내고 기원전 509년 공화정을 이룬다. 지금 우리가 쓰는 공화국(共和國, republic)이란 말은, ‘res publica’에서 온 것이다. ‘공공의 것’이란 뜻이겠지만, 키케로가 이를 ‘res populi’ 즉 ‘인민의 것’으로 풀이했다. 로마를 상징하는 S.P.Q.R도 Senatus Populus Que Romanus(the Senate and the People of Rome)로 로마공화정을 상징하는 데서 로마제국의 상징이 된다. 

로마를 상징

하지만 Republic을 일본인이 번역하여 만든 共和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모두가 화합한다는 뜻이겠지만, 연원은 멀리 주나라 여왕까지 올라간다. 여왕의 폭정으로 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이려 하자, 여왕은 도망을 간다. 왕의 자리가 비어 주 정공과 소 목공이 함께 조정을 다스린 이때를 공화시대라고 한다. 이와 달리 당시 제후들에게 추대된 공백(共伯) 화(和)라는 자가 왕을 대신해 정무를 맡았는데 이것이 공화제의 유래라는 의견도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 때(공화)부터 무력에 의한 정치가 횡행하여 강자는 약자를 괴롭혔고, 군대 동원령은 천자의 재가를 요청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왕의 손자인 유왕 때 ‘포사의 난’으로 서주(서안)에서 동주(낙양)로 천도를 하게 되고, 왕으로서 제후들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따라서 역사적인 의미에서도 공화의 의미는 그다지 좋지 않다.

민주주의공화국 보다 민국 또는 인민국으로 쓰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사우디 아라비아 전제주의 왕국’이라면 ‘대한 민주주의 민국’ 또는 ‘대한 민주주의 인민국’으로 쓰면 공화국에 비하여 주권재민(주권이 국민에게 있다)의 느낌이 팍 살아난다.

잠시 국민, 인민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의 민국은 ‘국민의 나라’이고, 국민은 ‘나라의 국민’이다. 이를 한번 더 펼치면 ‘나라의 국민의 나라’이고 ‘나라의 나라의 국민’이다. 즉 국민의 민은 속격으로 주체가 될 수 없다. 나라가 없으면 국민은 없다. 하지만 나라가 망해도 사람은 산다. 따라서 국민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이다. 특히 황국신민이라는 단어로 부터 국민이라는 단어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갑자기 토착왜구가 된 듯한 느낌이다.

북한과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있어서 쓰지 못하게 된 낱말이 ‘인민’과 친구의 우리말인 ‘동무’다. 그래서 인민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느껴진다. 유시민은 그의 책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조선왕조실록에는 ‘국민’이 163회, ‘백성’이 1,718회 등장하는 반면, ‘인민’은 2,504회 등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루소의 자유주의가 일본을 통해 동아시아로 유입될 때 ‘인민’은 국가에 대립하여 존재하는 자유로운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317쪽)고 한다. 이 구절의 뒤로도 “이데올로기를 이유로 거부하기에는 ‘인민’이 민주주의, 민권과 관련하여 뿌리깊고 소중한 우리말 개념어”라고 그는 말한다.

인민을 고대의 용어에서 보면, 人(사람)은 왕(천자)∙공(임금)∙경∙대부 따위의 지배계급을 지칭한다. 民(백성 : 고대에는 노예를 뜻함)은 사민(四民) 즉 士(조선에서 처럼 선비가 아니라 하급무사 즉 상∙중∙하사의 사)∙農(농민)∙工(공인)∙商(상인)으로 피지배계급을 말한다. 공자도 하급무사 집 안에서 태어나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지배계급으로 올라서기 위하여 유세를 한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의 최고의 꿈이란 장원급제하여 출육(다른 급제자보다 몇급 높은 정육품으로 입궐)하면, 떼어 놓은 당상(당상관 : 당에 올라가 정사를 논할 수 있는 정삼품 이상의 품계)이 되어 지배계급이자 백성이 아닌 대부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인민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모두 아우른다는 뜻이다.

반면 국민에서 민은 국에 의하여 지배되는 피지배계급의 의미를 함유한다. 여기에서 국은 나라가 되겠지만, 이 추상적인 나라라는 개념을 확대하고 구체화하면 정부와 대통령 이하 정부를 구성하는 자들이 지배계급이 된다는 의미이다. 물론 현실정치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권력은 인민이 아니라, 이들에게 있다. 선거 때나 촛불집회 경우에나 주권은 재민한다.

박물관의 로마의 유물들은 우리의 삼국시대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지만, 몇백년 밖에 안된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유물들은 아득하다. 첨성대처럼 “천문을 본다는 데, 어떻게 보았을까” 혹은 어떤 유물을 보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무슨 용도일까”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많다. 이천년 전 로마의 역사는 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어렵고 아득한 것인지…

박물관을 나와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 간다. 조그마한 성당이지만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성당이다. 16세기의 아빌라의 테레사 수녀을 기리기 위한 성당이라고 한다. ‘아폴로와 다프네’로 유명한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 수녀 조각이 있다. 수녀의 환상 속에 천사가 자신의 심장을 화살로 꿰뚫는다. 그 순간 엑스터시(悅樂)에 빠진다. 수녀의 눈은 견딜 수 없는 희열 때문에 몰아에 빠진 듯하다. 조각상의 이름을 피에타(Pieta : 비탄)에 대하여 죠이야(Gioia : 열락)라고 해도 될 듯하다. 역시 베르니니의 조각은 표정이 압권이다. 이 조각의 표정 역시 그렇지만 성당 안에 있기에는 너무 관능적이라는 평이다. 그리고 어두운 성당 안에서 이 조각상 위로 내려 앉는 빛의 표현 또한 강렬하다.

볼만한 오페라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오페라 극장(Teatro Dell’Opera)에 갔으나, 볼만한 것은 내년에 공연이 있다.

로마 오페라 극장, 이탈리아 3대 극장이라고 하는데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다

베네토 거리에서 점심을 사 먹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나중에 계산서를 보니, 거의 사기 수준이다. 하지만 맛은 있었다.

보르게세 공원으로 간다. 로마에서 가장 큰 공원이라고 하는데, 관리가 허술하다. 하지만 휴일에 와서 산보를 하기에는 좋다. 공원의 높은 곳에 연못이 있다. 연못에 섬이 있고, 섬에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이 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

조금 더 가자, 공원이 끝난다. 공원이 끝나는 무로 토르토(고대의 성벽) 위로 인도교가 있고, 건너면 핀초 언덕으로 이어진다.

무로 토르토 밑을 지나는 도로

핀쵸 언덕의 끝은 문득 끊어져 허공에 닿는다. 허공과 언덕을 가르는 테라스 아래는 포플로 광장이다.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 이렇게 쓴다.

“내가 앉아 있는 돌의자에서는 나에게 피로감을 주던 로마의 시가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보르게즈의 동산이 내려다보여 멀리 우람한 소나무들이 밑에서 하늘로 뻗쳐 나의 발과 같은 높이까지 다다라 있었다. 오오, 테라스여, 거기서 공간이 뻗어 나가고 있는 테라스여! 오! 공중의 항해……”6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67~68쪽

핀초언덕의 테라스에서 내려다 본 포플로 광장

그 공중은 포로 로마노까지 오후의 햇빛 아래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코르소 거리가 된 플라미니오 가도이다. 가도가 시작되는 포플로 광장에는 플라미니오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기원전 13세기 람세스 2세 때 헬리오폴리스 태양의 신전에 세었던 방첨탑을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키르쿠스 막시무스(대전차 경기장)에 옮겼고, 16세기말이 세 조각이 난 것을 발견하여 이곳으로 옮겨왔다.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24m, 기단에서 첨탑의 위의 십자가까지는 36.5m에 달한다. 핀쵸 언덕에서 높다란 계단을 내려와, 오벨리스크 그늘 아래에서 오후의 폭양을 피할 즈음, 광장에는 휴일을 맞은 사람들이 느긋하게 오후를 즐기고 있다.

3200년 이상된 오벨리스크

다시 낡은 아우구스투스의 영묘를 지나, 베네치아 광장으로 가서 포로 로마노의 건너편에 있는 포로 트라이아노로 간다.

포로 트라이아노

포로 트라이아노는 AD113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북쪽(사실은 동쪽) 도나우 강 가에서 타키아인을 상대로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 혼잡한 포로 로마노를 대신하기 위해서 포룸(시장)을 세웠다. 타키아인들을 몰아낸 도나우 강 가에 로마인들을 보내 살게 했는데, 지금의 루마니아(로마인의 땅)다.

콜로세움을 다시 보고 난 후 돌아온다.

20191019

viii-xmmxix 바티칸에서

바티칸 전일투어를 했다.

어제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로마를 다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바티칸을 보고서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바티칸 시국의 면적은 0.44 km2로 여의도 윤중로 제방 안쪽 면적의 1/6에 불과하다. 인구는 839명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세속적인 지배권이 미치는 유형의 영토인 교황령이 754년 피핀의 기증 때부터 1870년 이탈리아 왕국에 멸망, 합병되기 전까지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지역에 걸쳐 있었다. 1870년 사실 상 합병, 세속적인 지배권이 소멸되었으나, 1929년 무솔리니와 바티칸의 라테라노 궁전에서 조약을 맺음으로써 60년간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시국(市國)으로 나마 광복을 맞이한다. 이 조약에 의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탈리아 국교화와 교황청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한 바티칸 시의 완전한 독립이 확인되었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교육·결혼·자산·과세·주교임명 등의 여러 가지 특권이 인정되었다.

하지만 일개의 로마주교가 어떻게 소아시아의 총대주교들을 제압하고 교황의 권위를 구축했으며, 세속적인 지배권을 얻으려고 했는지는 이와 별도로 콘스탄틴의 증여(Donatio Constantini)라는 날조된 문서를 참고할 필요도 있다. 특히 피핀이 교황령을 증여한 시기와 콘스탄틴 황제가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로마교황)는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의 주교들을 관할하는 지상권(至上權)을 갖는다. 황제는 로마 주교와 라테라노 궁전의 후계자들에게 로마 시의 모든 교구는 물론, 이태리의 모든 주, 성, 도시 및 서방지역들을 기증한다. 그리고 황제인 나는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수장(首長)이 거하도록 정하신 곳에 세속정부가 권력을 가짐이 불편하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하노라”는 내용으로 날조된 ‘콘스탄틴의 증여’가 출현한 시기가 묘하게 비슷하다.

먼저 바티칸 미술관에서 출발했다.

중세의 화가들은 전문화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수도사였고, 그림에 대한 지식도 기능적인 역량 또한 부족했다. 그래서 교회에서 내려온 도상에 따라 성실히 그렸다면, 르네상스가 되자 단축법이나 원근법이 발전하고, 관찰에 의한 소묘가 발전함에 따라 중세는 예수나 성인을 크게 그렸다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모든 인간의 크기가 같아진다. 중세의 인물의 표정이 천편일률적(성인들의 표정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무덤덤하다)이라면, 르네상스 인물들의 표정은 생동감이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에도 위대한 인물들의 얼굴에는 나이가 없고 고통이 없다.(이는 나중에 피에타에서 이야기하겠다)

멜로쪼 다 포를리 作 ‘음악가의 천사 그룹’ 1프레스코 파편이며, 아래에서 위로 본 ‘단축법’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중세의 인물의 무표정함은 예술적 기교의 부족일 수도 있겠으나, 조르조 아감벤의 ‘벌거벗음’이라는 책 중 ‘영광스러운 몸'(천국에서 부활한 육체의 본성과 특징)에서 보자면, 중세의 신학자들은 영광스러운 몸의 네가지 특성을 무감각함, 미묘함, 민첩함, 명료함으로 보았다. 이 내용들을 종합하자면, ‘유령이란 어떤 형상인가’이다. 이 중 ‘무감각성’이란 육체의 완벽을 방해하던 무질서한 정념들에 육체가 더 이상 예속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성인(순교자)들이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무표정으로 죽어가는 것이야말로 ‘영광스러운 몸’으로 넘어가는 단계를 증거하는 것인지 모른다.

아울러 ‘미묘함’이란 극단적인 희박함이며, 축복받은 자들의 신체를 공기나 바람과 유사하게 만들어 다른 신체가 관통할 수 있게 한다. 즉 이들의 신체는 손으로 만지거나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숨결이나 정신과 구별되지 않는다.(벽이나 유리창을 지나다닐 수 있다) 그리고 ‘민첩함’이란 모든 움직임과 행동에서 그 신체는 영혼에 재빠르게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생각에 따라 순간이동이 가능하다) ‘명료함’은 축복받은 이들은 수정처럼 속이 비치도록 투명하지만 금처럼 빛이 그들의 몸을 투과하지는 못한다.(꼬마 유령 캐스퍼의 형상과 같다) 그러니까 유령이란 중세 신학자들의 발명품인 셈이다.

라파엘의 그림이 있는 전시장에 들어섰다. 십대의 그림들은 스승을 따라가기에 바빴고, 이십대에는 네오나르도 다빈치의 영향으로 스푸마토와 공기원근법적인 특징을 보이며, 삼십대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보고 난 감동으로 바뀐 그림 스타일을 보여준다. 사십대의 경향을 보기에는 그는 이미 37살 나이로 죽었다. 그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표정이란 황홀경(엑스타시)에 빠져있는 표정들이다. 성스러운 그들은 속된 인간의 감정과 다른 감정을 가졌으며, 가져야만 한다.

라파엘의 ‘그리스도의 변용’

그 다음은 매너리즘으로 해석되는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작품들이 있다. 르네상스의 세 천재들을 능가할 수 없었던 화가들은 천재들의 기법을 따라하면서도 나름대로 왜곡을 통해 자신의 독특함을 드러낸다. 이 매너리즘 화가 중에 엘 그레코(스페인어로 그리스인, 본명은 ‘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이다)도 있다. 여기에는 없지만,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을 좋아한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낮이며 정적이라면, 틴토레토의 것은 저녁의 어둠이 깃들어 있으며, 만찬이 열린 마가의 다락방은 예수와 열두제자 외에도 만찬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천사들로 소란스럽다. 그 가운데에서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막 14:22)하시는 장면이 펼쳐진다.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는 있으나, 틴토레토의 것은 베니스에 있어서 볼 수 없었다.

다음은 바로크 화가들이다. 르네상스가 젊고∙잘 생기고∙거룩한 표정의 인물들을 그렸다면, 카라바죠의 경우 나이에 따라, 생긴대로, 두려움과 고통 앞에서 처절하고 시기심과 분노에 깃든 감정을 어둠 속에 그로데스크하게 그려내어 결국 인간이 신 앞에 무릎 꿇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매장’

중세는 도상에 따른 장미를, 르네상스 때는 아름다운 장미를, 바로크 시대에는 시들 수 밖에 없는 장미를 표현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아폴로상

점심으로 샐러드를 먹고,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의 팔각정원에서 조각들을 보았다. 아폴로상과 라오콘상을 보면 무거운 돌의 질량을 느낄 수 없다. 어쩐지 조각상의 인물들이 공중으로 떠 오르려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폴로상과 라오콘상의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다. 라오콘의 극적인 움직임과 사람들이 느끼는 처절한 고통을 표현하는 것과 신 아폴론의 완벽(피렌체의 다비드상에서 느낄 수 있는)함을 그려내는 것 중 어떤 쪽이 작가의 절제를 더 필요로 했을 것인가하는 문제인 것 같다. 단적으로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의 뮤즈의 방으로 들어가면 벨베데레의 토르소가 있다.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복원 요청에 거부하면서 “이 자체로 완벽한 작품”이라고 했다지만, 내가 보기에는 절제가 안되고 과도한 작품인 것 같다. 물론 이 작품이 나중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모델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토르소가 수준이 아폴로와 라오콘에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시 관저를 읽고 “즐거워도 난잡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슬퍼도 애가 끊어지지는 않는구나”(樂而不淫 哀而不傷) 한다. 이것이 우리의 정악(正樂)과 정가(正歌)가 취하는 중도(中道)이다. 논어의 이 문장을 가지고 삼국사기에서 우륵의 음악을 평하기를 “즐기면서도 휩쓸리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르다고 이를 만하다”(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고 한다. 정악(아악)과 정가(시조창)에 있어서 바르다(正)는 밖으로 넘치지도 않고 안으로 후벼파지도 않지만, 그 탓에 재미없고 심심하다. 때론 흥청망청 간혹은 창자가 끊어질 것 같기도 해야 한다. 그래서 복상지음(濮上之音)의 소리가 궁금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대의 악보란 없다. 특히 나라가 망할 정도의 음란한 고대 음악을 어찌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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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베데레의 토르소 2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의 몸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교해 볼 것

여행을 오기 전에 재수가 좋다면, 어렸을 적 집에 있던 세계문화사대사전 안에 들어있던 사진 속의 토르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육면의 깨어진 돌덩이 위에 가슴과 배만 남아 있는 토르소였다. 깨어진 돌 위에는 새끼 손가락 반마디 깊이의 파인 부분이 있다. 파인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거기에서 돌이 스며나오고 있는 것 같다. 그 홈은 배꼽이다. 거기서 솟아난 복부의 근육과 살은 낮은 언덕과 구릉을 펼친다. 몸의 겉면은 목욕한 여인의 살처럼 매끈했지만, 간혹 충격에 표면이 긁혀나간 자국도 보였다. 언덕은 아랫배 속으로 잠시 스미는 듯 불두덩에서 낮게 떠오른다. 떠오른 곡면은 사타구니의 막다른 지점 쪽으로 깊숙히 당겨지다가 그만 돌 속으로 스며든다. 상행 곡면은 크게 융기되지 않은 채 낮은 신음을 내며 달리다가 유두 부분에 작은 흔적을 남기면서 어깨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다가 쇄골에 다다르기 전에 그만 깨져버렸다. 깨진 부위는 가슴이 어떤 에너지의 곡면으로 떨리고 있는지, 단면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곡면의 흐름은 가파르지 않고 낮게 굽이치며 여인의 벗은 몸을 숨막히게 연주해 냈다. 그 토르소보다 적은 돌을 덜어내어 여인의 숨가쁜 몸을 표현한 작품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 책을 잃어버린 뒤, 각종 화보집을 찾아보고 인테넷으로 찾아 보았으나 그 토르소를 찾을 수 없었다.

그 토르소가 매료시킨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단지 복부 위에 손을 올리고 그것이 살의 따스함을 간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돌의 차가움인지 피가 도는 따스함인지 알고 싶은 유혹에 몇번인가 대리석상에 손을 올려본 적이 있다. 뜨거운 내 손 탓에 촉감으로 차가움과 따스함을 구분할 수 없어 결국 입술을 대 보고서야 돌의 차가움을 확인하곤 했다.

그러면서 ‘보고 싶다’ 보다 ‘만지고 싶다’가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3입체파인 조르주 브라크가 나와 같은 갈증을 가지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해부학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라오콘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아버지인 라오콘의 오른팔은 없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고통 때문에 오른 팔을 하늘 쪽으로 펼치고 있었을 것으로 예측했으나, 미켈란젤로는 근육의 뒤틀림 등을 살펴보고 구부리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라오콘의 오른팔을 찾고 보니 미켈란젤로의 추측이 맞았다.

라오콘

촛불의 방과 지도의 회랑을 지나 라파엘의 방으로 들어가 벽화를 본다. 아테네 학당의 그림 옆의 기둥을 보면, 진짜가 아니다. 그리자유4Grisaille(gris는 회색)란 모노크롬으로 그린 단색화를 말한다. 장식에서는 렐리프(relief)안에 사물을 그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색은 일반적으로 회색, 갈색을 사용하는데 조금 다른 색을 넣기도 한다. 그리자유 회화는 모노크롬이라는 점에서 뎃생과 비슷하다. 기법으로 그린 환영이다. 벽은 있지만 기둥같은 것은 없다. 이러한 환상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라파엘과 그의 조수들은 벽에 기둥과 돋을새김을 그려낳았다. 이제는 이러한 ‘환영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에서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과 ‘팝 아트’와 같은 포스트 모더니즘 양식이 안출된다.

아테네 학당의 좌측 기둥 부분 5그리자유 기법으로 입체감을 표현했다. 아래의 아테네 학당 그림에서 기둥과 아치의 모서리 두면이 여기에서는 평면으로 펼쳐져 있다. 부조로 된 꽃과 사람 얼굴도 그림이다.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에는 르네상스 3대 거장(다빈치, 미켈란젤로, 본인 라파엘) 모두가 들어있다. 그 외에 58명의 철학자들이 나온다.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면 정작 그림을 감상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런 것을 이감6귀로 감상하다(耳鑑)라는 뜻이지만, 음악 감상과 같은 것이 아닌 주로 서화와 같이 눈으로 감상하는 것에 주로 적용된다. ‘몽계필담’ 중 ‘서화’편에 나오는 말로 “서예나 회화작품을 수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허망한 명성을 얻고자 하는 자가 많다. 종요나 왕희지, 혹은 고개지나 육탐미의 작품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다투어 찾아가 그것을 구입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이감(耳鑑)이라는 것이다”고 심괄은 말한다.이라고 한다. 그림의 크기와 그림을 바라볼 때의 느낌, 그런 것을 놓치게 된다. 아네테 학당은 가슴 높이 이상에서 바닥이 시작된다. 그래서 평행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고개를 쳐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무척 큰 빌딩의 로비에 들어선 느낌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야외같은 개방감과 밝아서 명랑한 느낌이다. 원근법을 이용하여 멋진 아테네 학당을 세운 것 같다. 하지만 로마식 아테네 학당이다.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 위의 사진과 본 그림의 우하단의 기둥부위를 비교해볼 것

마침내 시스티나 소성당에 들어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기록하고 사색을 했던 사람이라면, 미켈란젤로는 3D에 대한 천부적인 구상력을 가지고 맨 땅에 헤딩해가며(하지만 돌파해나가기 위하여 깊은 사유를 했던) 위대함을 부조해 나가는 인간, 라파엘은 겸허한 천재라는 점을 시스티나 소성당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잇다. 학자였던 다빈치, 화가였던 라파엘,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 조각가가 이니었다면 시스티나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을 저렇게 그릴 수는 없다. 그는 조각을 그려냈고, 기둥을 새겨 그렸고, 둥근 천장을 끌과 망치 대신에 붓으로 조각해냈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의 오른쪽 대각선 아래가 ‘쿠마의 시빌’이다 7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다른 곳에서 가져 옴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천지창조)를 보면 고개가 아프다. 소성당에 들어선 입구가 천장화의 반대편인 탓인 것 같다. 반대편 출구쪽에서 ‘최후의 심판’ 쪽으로 걸어오며 보면 고개가 덜 아프다. 그리고 천장화를 다 보고 난 후 고개를 바로 하면, 죄의 무거움 탓에 연옥에서 지옥으로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운데에는 성모와 예수가 보인다. 예수께서는 손을 들어 그들을 심판하려 하고 늘어선 자들은 두려움에서 인지 예수의 손을 피하려 한 손으로 자신을 가로막으며 한 발자욱 뒤로 물러서려 한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8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다른 곳에서 가져 옴

두 작품을 보면 미케란젤로는 조각가이지 결코 화가가 아니다.

서구미술이 그리스에서 비롯한다고 치자. 헬레니즘의 예술은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과 퇴락한 벽화도 있겠지만, 압권은 역시 조각이다. 조각은 3차원이지만 오히려 공간을 차지한다. 신이나 사람, 동물 등 일정한 부피를 가진 것을 표현하는데는 장점이 있지만, 식물이나 구름 등 자연을 표현하는데 분명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는 산수화 등 자연에 시선이 멈췄던 동양(비단과 종이의 나라)과 달리 사람과 신에 집중하게 했다. 이후 예수와 성자 중심의 이콘(Icon : 聖畵와 聖像)에 집중하던 중세를 지나고, 르네상스에서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서구미술의 대상과 주제는 늘 사람이었다.

회화는 2차원의 평면 위에 연출되는 것이고, 그 평면은 벽과 나무판, 돛이 많았던 베네치아 같은 곳에서는 캔버스로 이루어져 있다. 벽에 그려지기도 하고 방이나 복도와 같은 회랑(galleria)에 그림이 걸리기도 한다. 조각이 공간을 잠식하는데 반하여, 그림이라는 평면은 오히려 환영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베누스의 탄생’을 예비하기 위해서는 보디첼리는 바다와 아득한 수평선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브루넬리스키가 선 원근법을 만들고 스푸마토 기법이 대기까지 그려내며 르네상스 미술이 공간을 창조하자, 그 공간 속으로 빛과 그림자가 스몄고9카라바죠나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어둠 속으로 빛이 스미면서 사람과 사물이 드러난다. 반면 루벤스나 바로크의 시작을 알리는 일 제수 성당의 천장화(Giovanni Battista Gaulli의 그리스도의 승천)를 보면 실명할 정도로 강렬한 빛으로 들끓는다., 바로크 시대를 연다. 16세기의 어느 누군가는 (플랑드르의 뛰어난 르네상스 미술을 폄하하기 위한 목적이어서 믿을 수는 없지만) 미켈란젤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플랑드르 화가들은 오로지 외적으로 눈을 속일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이런 플랑드르 미술은 벽돌과 반죽, 평원의 잔디와 나무 그림자, 다리와 강”과 같은 하찮은 것들만 취급하며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을 여기 저기 그려놓고, 그것을 풍경화라고 부른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와 북방(네델란드, 벨기에, 독일 등)의 르네상스 회화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북방에는 고대, 즉 그리스・로마 문화의 전통이 없었기에 오히려 인간과 자연 모두에 골고루 시선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그런 그림에 대하여 “합리성이나 기술도 없이, 대칭이나 균형도 없이, 취사선택도 없이” 그려졌으므로 천박한 것이라고 했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자연이란 합리적이거나 고상한 것은 아니다. 그냥 자연일 뿐이다. 하지만 이 고집스런 조각가의 의견과는 달리 서구의 회화는 조르지오네와 티치아노와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의 맑고 시원한 풍경 쪽으로 조금씩 옮겨가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두 작품에서 인물 뒤의 풍경은 화가들에 비하여 극히 취약하다. 화가가 아닌 그는 라파엘과 같은 멋진 풍경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인물들이라는 조각상이 위치해야 할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래서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들은 조각상이거나 아니면 뎃생으로 보는 것도 좋다. 천장화의 경우 그리자유 기법으로 천장 구조물을 그려 조각상이 위치할 공간을 마련하고 그 곳에 인물들을 배치했다. 그러니까 천장화의 대부분이 건축구조물과 인물이고 풍경은 성서의 스토리텔링을 위해서 조금 그렸을 뿐이다.

천장화에는 쿠마의 무녀가 나온다. 황무지의 에즈라 파운드를 위한 헌시에 나온 늙고 쭈그러들어 조롱 속에 갇힌 시빌(무녀)의 “죽고 싶어”라는 절망을 처음 읽고, 어렸던 나는 무슨 일인지 모르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CVMAEA의 무녀는 남자처럼 강건하고 검게 그을러 내가 가졌던 시빌에 대한 이미지를 팍 깨버린다.

이 소성당에서는 교황의 선종 후 새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댄 브라운의 소설 ‘천사와 악마’의 무대이다. 이 소설에는 반물질10빅뱅으로 無에서 우주가 탄생한다. 이것으로 천지창조는 설명될 수 있으나, 수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이 고안해낸 것이 +의 有(우주, 물질)가 나왔으니, -의 有(반물질)가 있다면 이 둘을 합하면 0(無)가 된다는 생각 아래 반물질을 찾아나선다. CERN(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입자가속기에서 빅뱅을 시뮬레이션하면서 마침내 반물질을 추출해낸다. 이 반물질은 등량의 물질과 반응하여 無(소멸)가 되는데, 극소량이라도 핵폭발에 버금가는 에너지가 나온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는 이 반물질을 가지고 죽은 교황의 궁무처장은 자신이 새로운 교황이 되려고 하는데, 로버트 랭던 교수가 초를 치고 만다. 하지만 이 반물질은 허구가 아니다. 실제로 추출된 바가 있다고 한다. 이렇다면 우리가 있는 +우주의 반대편 어딘가에 -우주가 있을 것이고, -의 나(我)도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이라는 재미있는 물질이 등장한다. 또 18세기까지만 해도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 데우스”(주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를 들을 수 있는 곳은 시스티나 성당 이곳 뿐이었다. 그것도 일년에 단 한번 성주간(聖週間) 때 뿐이었다. 그 시절 이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이 노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천상에서 흘러나온 음악 같았다.” “그 노래를 접하자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Miserere Mei Deus 듣기…

소성당에서 베드로 대성당으로 간다.

성 베드로 대성당, 세상에서 가장 큰 성당이 어떻게 이렇게 작아보일 수 있는지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성당은 없다고 한다. 이 성당도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졌다고 한다. 건축기술이 없었던 그는 판테온과 피렌체의 두오모를 공부하여 쿠풀라를 올려 세웠다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부 모습. 거룩함을 화려가 덮었다

성당에 들어가면 규모에 화려를 돋을새김한 탓에, 어쩔 수 없이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성당을 둘러본 후, 지하묘소를 보고, ‘거기에서는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피에타를 보았다. 안타깝게도 피에타는 파괴범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방탄유리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래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서 처럼 슬픔이 밀려오지는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11어쩐지 두 사람이 날아오를 것 같다. 예수를 저렇게 가볍게 안고 있을 수는 없다

이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스물네살 때 작품이다. 이 작품의 마리아는 서른세살의 아들이 있는 어머니라기 보다 마치 수태고지를 받던 소녀같다는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의 질문에 대하여 “순결한 여자들이 순결하지 않은 여자들보다 젊음을 더 잘 유지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티끌만큼도 추잡한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육체를 가진 동정녀라면 말할 것도 없고 말일세”라고 미켈란젤로는 말한다. 앞에서 말한 예술에 있어서의 르네상스적 사고를 미켈란젤로는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대성당의 쿠풀라

시간에 여유가 있을 것 같다고 하여 쿠풀라로 올라간다. 일부는 엘리베이터로 나머지는 계단으로 올라간 탓에 피렌체보다는 한결 수월했다. 쿠풀라에서 본 로마는 낮고 잔잔한 분지였다.

쿠풀라 위에서 본 로마, 내가 보는 분지가 라티움인지 모르겠다

쿠풀라를 올라간 후 시간에 쫓겨 허둥대다가 가이드를 놓쳤다. 시간은 이미 오후 5시가 넘었다. 가이드를 찾다가 안될 것 같아서 숙소로 돌아온다.

오는 길에 산탄젤로 성을 본다.

산탄젤로 성,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였다고 한다.

날이 저물어 들어가지는 않고 그 앞의 테베강을 보며 다리를 건넌다. 이천칠팔백년의 역사가 흘렀을 강은 개울처럼 강폭이 좁다.

저물녘의 테베강

한참을 걷다가 피자를 사먹었는데, 이탈리아 그것도 로마에서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피자를 먹게 되었다. 맛이 없어 절반도 먹지 못하고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발바닥이 얼얼하다.

2019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