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i-xmmxix 나폴리

유로 자전거 나라에서 잡은 호텔이 살레르노의 해안가에 있는 줄 알았으나, 멀리 내륙에 있었던 모양이다. 아침 바람 속에 바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침에 폼페이로 간다. 폼페이는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산의 분출로 화산재에 묻혔다. 당시의 인구는 2만명이었고, 그 중 10% 정도가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상당히 내륙 쪽에 위치하고 있으나, 당시에는 성벽 옆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항구도시였다고 한다. 성문 역할을 하는 Porta Marina 옆에 부두라고 할만한 접안시설이 보인다.

폼페이의 ‘바실리카'(공회당). 바실리카는 나중에 예배당, 교회로 의미가 바뀐다

포르타 마리나를 지나 바실리카(Basilica) 자리에 선다. 공회당인 바실리카에서는 사람들을 모여 투표와 재판을 위하여 토론과 설전을 벌였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공회당의 대리석 기둥 안에 벽돌이 드러나 있다. 본래는 대리석 기둥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63년 2월에 대지진이 있었고 당시 파괴된 신전과 건물을 다시 짓기에 대리석이 턱없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래서 벽돌로 기둥 골조를 만들고, 시멘트를 바른 후, 대리석을 빻아 만든 가루를 시멘트 페이스트 등의 접착제로 붙여 겉면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그 시대에 인조대리석이라니 놀랍다.

대리석의 일부가 깨져나가 안의 벽돌이 드러남

현대에 생산되는 시멘트가 로마 때 사용하던 것에 비해 품질이 뒤떨어진다고 한다. 현대의 시멘트 건물을 예로 들면 응고되는데 백년, 이것이 다시 용해되는데 백년, 도합 200년 정도의 수명을 갖는다고 하는데, 돌과 시멘트로 지은 콜로세움은 아직도 끄떡없다. 부두 건설에 사용한 시멘트는 아직도 응고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길을 가다보니 도로의 포석(鋪石)에 손가락 두마디 깊이로 마차 바퀴 자국이 나 있다.

포로(Foro)로 간다. 쥬피터 신전과 원로원 건물과 비너스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시장(Foro)의 한 쪽 구석에는 화산재 속에 죽은 사람들과 개의 석고주형이 있다. 화산재 속에 죽은 시신이 사라진 텅빈 공간에 구멍을 뚫고 석고를 부어 캐스트해낸 것이라고 한다. 1861년 이 캐스팅 방법을 착안하기 이전에 폼페이 유적 밑에 텅빈 공간으로 사라진 사람과 동물들은 발굴과 동시에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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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의 포룸, 뒤로 베수비오 화산이 보인다.

목욕탕으로 간다. 목욕탕에는 체력단련을 하는 곳과 옷을 갈아입는 곳, 그 다음 냉탕 그리고 온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온탕의 경우 실내온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벽 사이로 온기를 불어넣었다고 한다.

목욕탕의 내부

욕탕을 나와서 파우노1파우노(Fauno)는 그리스의 판(Pan)으로 목신(牧神)이다.의 저택으로 갔다. 이 저택의 아트리움2Atrium : 중정이나 오픈 스페이스로 주위에 집이 세워지면서 마련된 중앙 정원으로 요리할 때 발생하는 연기를 바깥으로 내보내고 가정에서 허드렛물로 사용할 빗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에 파우노의 상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자 손님들과 심포지움3Symposium : 간단한 스낵과 함께 즐기는 술자리을 즐길 수 있는 건물이 있는데, 바닥에 미술교과서에 나오곤 하던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벌하는 모습’을 모자이크한 타일이 깔려있다.

파우노 저택의 아트리움, 그 위에 파우노상이 놓여 있다

파우노의 집을 나오자 아직도 물이 나오는 수도가 있고 수조가 있다. 산에 있는 물을 아피아 수도교를 통해 공급했다고 한다. 수도교는 1킬로미터에 3미터의 경사로 지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한강의 길이는 494Km, 한강은 태백시의 금대봉 북면에서 발원한다는 데, 금대봉의 높이는 1,418m이다. 

시장 역할을 하는 곳에 갔다. 2층으로 된 상점가였다고 하며, 벽에 물고기(어물전), 포목 따위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베이커리가 있는데 로마식 맷돌과 화덕이 있다. 당시 부자들은 집에서 취사와 식사를 했지만, 서민들은 집이 좁아 부엌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밖에서 음식을 사 먹어야 했다고 한다.

야외극장으로 간다. 아침에 나폴리에 입항한 크루즈선 여행객들이 폼페이로 몰려들었다. 서로 길을 양보해야 될 정도로 폼페이의 골목이 여행객들로 꽉 찼다.

야외극장

그리스와 로마의 야외극장이 구조가 같아 보이지만, 서로 다르다. 그리스는 야외극장은 산비탈에 세웠다. 비탈에 관객석을 놓고 그 밑에는 공연을 하는 바닥이 있다. 로마는 평지에 관객석을 세우고 무대를 마련했다. 그리스의 야외극장은 원형으로 만들 수 없지만, 로마의 야외극장 두개를 마주보게 세우면 콜로세움과 같은 원형경기장이 된다. 야외극장을 Teatro Grande라고 하는데, 원형경기장은 Anfiteatro라고 한다. 이는 Teatro 두개를 붙여놓았다는 것이다.

검투사의 연습장, 시설이 좋다.

그 다음에는 검투사들이 연습하는 곳으로 갔다. 검투사의 숙소는 2층으로 되어 있다.

두시간의 폼페이 유적 관람은 이것으로 끝났다.

파괴된 유적이지만, 이천년 전의 당시의 생활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보면 또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이고, 이것은 무엇이지 하는 의문은 더욱 커질 것 같다.

창공에 빛난 별 물 위에 어리어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폼페이를 떠나 나폴리의 산타루치아 항구로 간다.

가이드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해변의 피자전문점에서 점심으로 나온 피자 3판 모두 맛은 없고, 배만 부르다. 로마에서 먹었던 피자처럼 여기도 맛없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모짜렐라 치즈는 부두의 물기를 꽉 짜낸 식감에 쫀득하긴 했지만 맛없기는 마찬가지다.

식사를 마친 후, 계란성이라는 해변에서 좁은 교각으로 연결된 섬 위에 지어진 델로보 성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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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로보성

중세의 성채 느낌이 물씬난다. 성의 동쪽은 나폴리 내항이다. 크루즈 터미널에는 십만톤급 크루즈선박 3척이 입항해 있다. 각종 선박들이 엉켜있는 항구 너머로 베수비오 화산이 보인다. 성에서 화산까지 직선 거리는 13Km 남짓 매우 가까워보인다. 서쪽으로는 아득한 해변이 햇빛에 눈부시다.

나폴리 항구, 크루즈 선이 입항해 있다

이 성의 이상한 점은 바다를 향해 있어야 할 포대가 내륙을 향하고 있다. 북쪽 보루에만 포안과 대포가 배치되어 있는데, 포의 타격 중심은 섬과 연결된 교각 쪽으로 향해 있다. 이것이 나폴리의 역사를 대변한다.

델로보 성의 포대

나폴리는 로마가 되기 이전에는 쿠마의 무녀가 살던 곳, 그리스의 식민도시였다.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는 동고트 왕국, 비잔티움 제국, 노르만족의 시칠리아, 호엔슈타우펜 왕가, 아라곤 왕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나폴리-부르봉 왕조 순으로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 땅의 정복자들은 외부의 세력보다, 식민지 사람들의 반란이 두려웠다. 나폴리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면, 정복자들은 성으로 쫓겨와 대포를 해변의 다리를 향해 걸쳐 놓고 다리를 건너는 반란군을 기다렸을 것이다.

오랜 식민지 지배 탓인지 나폴리 방언은 이탈리아어와 다르며, 나폴리어라고 말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탈리아 영화 ‘웰컴 투 사우스‘를 보면, 북부에 사는 이탈리아 사람의 남부 사람들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코미디 형식으로 보여준다. 무지의 정도는 영남과 호남의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라오스에 대해 갖고 있는 무지의 수준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북부 사람인 알베르토는 남쪽 사람들은 도둑들이며, 마구잡이로 총질이나 해댈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탄조끼를 구해 입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남쪽 바다와 태양 아래에서 만난 순박한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편견과 무지를 깨트리고, 즐거운 이웃이 되는 코믹한 과정을 보여준다. 무대는 나폴리의 남쪽 살레르노에서도 한참 더 남쪽 바닷가 깡촌마을 카스텔라바테라고 한다. 이 영화의 경우 나폴리 사투리를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했다. 어떤 사람은 거부감을 느꼈다지만 어떤 면에서는 절묘한 번역인 것 같다.

“여기에서 외지인은 두번 운다. 처음 왔을 때 (있기 싫어서) 울고, 떠날 때 (떠나기 싫어서) 운다.”

델로보성에서 내려와 나폴리의 중심지라는 언덕 위로 올라간다. 언덕을 올라가자 동쪽으로 항구가 품에 안겼다.

“나폴리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아침마다 만(灣)을 굽어보는 플로리디아나 장원(莊園)을 찾아가서 정오의 시계가 칠 때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이리저리 거닐곤 했다. 그 한가로운 무위의 시간들은 파리에서의 열에 들뜬 듯한 시간들보다도 더 내 가슴을 가득하게 해주었다. 이같이 가슴 깊이 파고드는 풍경 속에서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데만 골몰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4장 그르니에의 ‘섬’ 중 103쪽

플리비시토 광장과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성당

언덕 위의 플레비시토 광장은 터무니없이 넓다. 광장의 서쪽 경사면으로는 판테온을 모티브로 만든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성당이 있다. 성당의 정면 파사드 옆으로 회랑이 있는데,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의 베르니니 회랑을 중간에서 잘라낸 모습으로 광장을 안고 있다.

맞은 편에는 레알레 왕궁과 그 옆으로 이탈리아 오페라 3대 극장 중 하나인 산 카를로 극장이 있다.

레알레 왕궁

‘갈레리아 움베르토 I’ 입구

1860년에 문을 열었다는 카페 감브리누스에서 커피를 한 잔했다. 서너 티스픈 정도 밖에 안되었지만 향신료 때문에 기침이 나올 뻔 했다. 맛은 강렬하면서도 쓴, 그러면서도 단 맛이 자꾸 올라왔다.

나폴리 서민들의 생활을 엿보기 위하여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차 한대 지나기 힘든 좁은 골목, 그 위로 5~6층 짜리 집들이 있다. 지붕 끝에 간신히 당도한 햇빛 아래 숨결마저 그늘 진 창문, 왜 사느냐? 결국 나는 타인의 생활을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길 가로 문이 열려있는 집 안을 들여다 보면, 문 쪽으로 개수대와 주방가구가 허물어질 듯 놓여 있고, 식탁으로 쓸 탁자가 있으며, 한쪽에는 침대가 있다. 골목과 골목을 지나며 엿본 서민의 생활은 그러했다.

나폴리의 골목

장 그르니에는 “나폴리 만의 부드러운 해안선은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해서, 인간이 그 앞에 서면 웬일인지 스스로 불편해짐을 느낀다”고 쓴다. 하지만 ‘불편해짐’을 ‘무력해짐’이라고 바꿔야 한다. 진선미와 전능과 위대함과 영원같은 것들 앞에 사람은 불편한 동시에 굴복하고 무력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빈틈을, 공기 구멍 하나를, 숨을 내쉴 수 있고,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그 빈틈을 찾아내지 못한다.”5본문의 따옴표는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 중 88~89쪽에서 따옴 그래서 장 그르니에는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언제나 우리 내부의 신비를 감추고 있는 연약하고 얇은 막이 터지는 순간을 위해서만 살자. 그 슬픔의 밑바닥에서, 노래 한 가락이 터져 나올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과소평가하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처럼, 가난과 질병과 고독과 낯설음에 내몰렸을 때, 영원성은 우리에게 또렷이 모습을 나타낸다.”6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 중 89쪽

고독과 낯설음의 끝에 영원성이 나타날 것으로 나는 믿지 않는다. 장 그르니에조차도 영원성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나폴리가 존재의 불변을, 그 단일성에서 비롯한 영원(시간)과 무한(공간)을 주장하던 엘레아7웰컴 투 사우스의 무대인 카스텔라바테에서 조금 더 남쪽에 있는 벨리아가 예전에 그리스의 식민도시 엘레아다. 학파가 살던 옆 동네라고 하더라도, 영원이란 사고실험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우리는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들만 볼 수 있다. 찬란한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우리가 힘을 다하여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순간이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에 아득해지는 것이다.

소설가 한강8채식주의자로 맨 부커상을 받은 한강은 시인으로 먼저 등단(1993년)했고, 다음해 신춘문예에 소설가로 등단한다은 자신의 시에 이렇게 쓴다.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9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중 일부

나폴리의 바다도, 좁은 골목 속의 그늘 진 생활도, 매 순간마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폴리 사람들은 햇빛과 바다, 사랑하는 가족, 즐거운 식사와 진실한 믿음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20191021

xx-xmmxix 아말피에서

드디어 아말피로 간다. 열아홉살의 열병이 사그라 들던 스무살에 우연하게 ‘지상의 양식’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나라가 가난하여 해외여행 자유화를 할 수 없었던 그때, 완행열차와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초라한 소읍과 낡은 도시로 옮겨가며 그 책을 읽었다.

소렌토로의 해안도로 옆에 있는 저택 1‘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노래는 못사는 소렌토로를 떠난 이웃 친척들에게 편지를 부칠 우체국이 없어서 지어진 노래라고 한다.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던 그때 나에게, 아말피란 북아프리카나 중동의 이정표 조차 없는 어느 곳. 혹은 앙드레 지드가 여행 중에 지명을 잊어 아말피라고 하자고 접어 둔 갈피이거나, 차라리 상상의 지점이었다. 세상에 없을 것 같아서 더욱 가고 싶었다. 얼마 전에야 나폴리에서 소렌토를 지나 소렌토 반도의 살레르노까지 이어지는 바닷가 높은 해안도로 아래, 바위 틈에 서식하고 있는 마을들이 아말피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내가 매료된 것은 무지 탓이다. 알았다면 매료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말피 공국의 항구 중 하나였던 포지타노

짙푸른 지중해의 높은 벼랑 위에 도로가 바다를 내려다보며 달리고 있고, 푸른 색칠을 한 창가에는 갖가지 색으로 꽃들이 자란다. 벼랑 위에 지어진 탓에 모든 집들과 상점들의 문은 도로를 면하고 바다 쪽으로 창문이 열린다.

포지타노 마을 도로

햇빛을 피할 수 없어서 온 동네가 빛으로 술렁대는 하오, 마을에 깃든 여행자들은 상점의 차일 그늘 밑에서 맥주를 마시거나, 헐거운 아마포로 지은 옷에 샌들을 신고 바닷가로 갈 수도 있다. 10월이지만, 지중해의 바다는 미적지근하다. 마을의 가장 낮은 곳인 해변에 서서 고개를 돌리면, 파스텔 상자를 연 것 같은 색으로 차곡차곡 그려진 마을이 보인다.

그 마을이 포지타노다.

월요일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과 목요일도 도무지 생각날 것 같지 않는 마을. 금요일 오후에 시작한 한 주는 샌들을 신고 휘파람을 불며 토요일과 일요일을 지나더니 금요일 저녁으로 다시 이어지는 느긋한 풍경이 불현듯 슬퍼졌다. 주어진 휴일을 다 써버린 여행자인 나는, 첫 입맞춤 때 기쁨 끝에 슬픔을 느낀 어린 아이처럼 포지타노를 천천히 누볐다.

포지타노 해변, 자갈해변이다.
Steps of Positano 듣기…

 

한낮의 기온은 27℃, 태양은 작열한다. 점심을 해안의 절벽에 있는 식당의 차양 아래에서 먹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부두에서 배를 기다린다.  

오후 3시 30분 아말피로 가는 배가 출항했다.

포지타노에서 부터 해안의 암벽 사이 사이로 박혀있는 마을과 마을들. 바다와 산으로 막힌 마을들은 자그마해서 외로워 보였다. 생활이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 바다 위 절벽과 바위 틈서리에 층층이 집과 집을 쌓고 서로 이어 바닷 쪽으로 창을 내어놓고 살게 하는지, 아득할 뿐이었다. 

포지타노에서 출항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바다는 닫힌다.   

마레 클라우숨(Mare Clausum : 닫힌 바다)은 고대부터 지중해가 폐쇄되는 시기를 말한다. 11월12일부터 겨울 폭풍이 시작되고 거친 날씨가 계속되면서 하늘의 별자리가 보이지 않는 관계로 항해를 금지했다고 한다. 이듬 해 3월 10일이 되어서야 바다가 다시 열렸다. 지금도 11월이 되면 배들은 내항에 닻을 내리고 여객터미널의 매표소도 문을 닫는다고 한다.2여행에서 돌아오고, 11월 중순이 되자 날씨는 급변했고 이탈리아 전역이 침수가 될 정도로 비가 내렸다.

해양강국인 로마는 영해의 개념이 없었다. 모든 바다는 공해(公海)로 마레 리베룸(Mare Liberum : 자유의 바다)이었다. 특히 지중해는 어느 나라의 소유도 아닌 ‘우리의 바다'(Mare Nostrum)였다. 영해(領海)를 뜻하는 마레 클라우숨은 영국에서 비롯한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가 영국 근해에서 조업을 하자 영국은 바다에도 주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 네델란드는 당연히 마레 리베룸을 주장했지만, 결국 강자의 논리에 따라 세상의 모든 바다는 닫히게 된다.

지중해는 닫힐 때가 아직 먼 듯, 파도는 잔잔하다. 뱃전의 바람은 더위를 식혀주기에 적당했다.

오후 4시, 아말피에 하선.

아말피 항구. 여기에서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과 레반트로 출항했다

아말피 해안 마을들의 중심이자, 아말피 공국의 수도였다. 왕가와 가문의 문장이 수놓인 깃발을 휘날리며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십자군들이 콘스탄티노플과 레반트 지역으로 출항한 항구였다. 9세기에서 12세기까지 지중해 해안 상권을 잡고 있었다. 당시에는 콘스탄티노플, 다마스커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북아프리카, 그리스 등 지중해 모든 곳에 아말피 상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1세기가 되면서 북해를 떠돌던 노르만의 지배상태에 접어들고, 12세기에는 노르만과 피사의 약탈로 아말피의 해상 상권은 베네치아, 피사, 제노아로 넘어가고 만다. 14세기에는 해일로 마을들이 파괴되면서 옛 영광은 사라지고 조그만 어촌으로 연명하게 된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영국 상류층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게 된다. 지금도 아말피의 호텔의 경우 시즌의 경우 일박에 수백만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아말피에서 산 위로 올라가면 라벨로가 있다. 아말피의 귀족들이 살던 곳으로, 바그너가 그의 최후의 오페라 ‘파르지팔’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것을 기념하여 매년 음악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아말피는 유럽 최초로 나침판을 제작했고, 종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아말피의 두오모 성당

아말피에서도 성당이 두오모다. 두오모란 한 나라에 하나 밖에 없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각 도시마다 두오모가 있다는 것은 그 도시들이 왕국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아말피도 공국(Repubblica di Amalfi)이었다.

이 두오모에는 베드로의 동생이자 열두제자의 한 사람인 안드레아의 유해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유해를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천년동안 지어졌다고 하는데, 낡은 성당과 현재의 성당, 그리고 지하에 두 성당을 연결하는 기도실과 납골묘 같은 곳이 있다. 지하는 폐소침묵증을 불러 일으키는 곳이다. 밖에서 스며 든 빛이 어둠 위에 내려앉았고, 빛에 쫓겨 구석으로 물러 난 어둠의 옆구리를 성소를 밝힌 불빛이 찔렀다. 어둡지는 않았지만, 벽과 박공과 바닥은 밀려난 어둠으로 흥건했다. 성모상 아래로는 순례 온 수녀가 무릎을 꿇고 묵주를 입술에 댄 채 기도를 하고 있다. 나는 잠시 지하의 냉기 속에서 숨을 고르며 묵상과 같은 침묵에 젖어있었다.

두오모 성당의 지하

밖으로 나와 아말피의 좁은 골목을 걸었다.

아말피에서(밤)

   알지 못할 그 어떤 사랑을
   기다리는 밤들이 있다.
   바다를 굽어보는 조그만 방, 너무나 밝은 달빛이 잠을 깨웠다. 바다 위에 비치는 달빛이.  3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62쪽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아말피의 밤을 노래하지만, 늦은 오후에 온 나는 날이 저물기 전에 이 곳을 떠나야 한다.

아말피의 좁아터진 골목

사람들로 꽉 들어찬 좁은 골목에서 바라 본 아말피는 읍면동 단위도 안될 조그만 마을4아말피 인구 5,353명, 서산시 해미면 8,773명이다. 갑줄을 출렁이는 십자군 기사와 말, 병사들이 머물기에는 좁아터졌고, 비잔틴의 주교와 레반트에서 온 상인들이 묵을 자리도 없어보였다. 유리병이 예뻐서 조그만 리몬첼로를 두 병 샀다.

그리고 5시 50분. 다시 배를 타고 살레르노로 간다. 지중해에 노을이 진다. 해안 마을들 위로 붉은 기운이 서리더니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해가 지는 곶과 곶(岬) 사이에 아말피의 마을들이 이불을 덮고 저녁으로 들어설 것이다

살레르노에 배가 접안할 때, 항구에 불빛이 하나 둘 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말피 해안의 중심인 살레르노

2019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