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시경 오송역

KTX가 무정차역을 지난다 여객의 모습은 짙은 속도에 뭉개져 보이지 않는데…… 누구의 다급한 세상이기에 저렇게 가야만 하는 것인가 열차가 남으로 달려간 후햇빛이 길게 누운 선로 위에는집으로 돌아가는 막연한 정적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간다

모텔 하이눈이 보이는 다리

잠시 음란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자 오후가 온다 자전거를 타고 빨간 모텔이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 이르면 오후는 휘파람을 불며 방죽 사이에서 놀고, 수업을 파한 골목에는 아이도 비루먹은 개 한마리 조차 보이지 않는데 모텔 하이눈에선 객실 창문이 열린다 사랑의 미흡한 내용을 채우기 위하여 거울을 바라보며 얼굴을 그리거나 젊은 날을 보냈을 것이며, 정오의 驛舍가 아닌 노을 밑으로 저녁이…

섬과 안개

이 편지를 쓰지만 너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좋을 지 모르겠다. 너의 이름은 너무 단순하여 너를 포괄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너를 부르고 싶었다. 아주 길고 긴 이름. 네 이름을 부르다 보면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오르고, 때론 행복과 슬픔이 어우러지며, 그리움으로 변하는 그런 이름이 나에겐 간절하게 필요했어. 오늘은 더 그렇군. 어리석게도 사랑과 우정이 초라한 열정에…

아뭇 것도 아닌 자의 변

‘객지’를 읽은 것은 행운이다. 방랑이란 헤르만 헷세의 소설처럼 낭만적이고, 고독하며, 오랜 도보여행 끝에 깊은 침엽수 숲을 벗어나 호밀이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을 걸어가는 것인 줄 알았다. 고1 2학기가 끝나가고, 아무 것도 아닌 아이가 되어가고 있을 무렵, 책이라고는 교과서 외에 읽어본 적이 없다는, 친구 녀석의 팔 겨드랑이 사이로 혐오스럽게 뾰족이 나온 책 모서리를 보았다. “그것 모냐?”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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