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CIA 음모와 대결하다

How to read 라캉 – 1장

알맹이가 없는 텅 빈 제스처… 

 

이번 장은 말보다 말하는 행위에 깃든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온갖 감정을 다하여 너를 ‘사랑한다’고 썼을 때, 너(소타자)는 내가 쓴 ‘사랑한다’에 끄달려있는 그 다양한 감정들의 질감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복합적인 느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편지를 받은 네가 아니라, 나와 그(대타자)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고 쓰고 너에게 부쳐진 편지는, 정작 너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독백이거나, 그(대타자)에게 부쳐진 것이다.

네가 받은 편지는 그 내용보다 텅 빈 무게(현실 세계 속에 편지를 보낼 사람이 너 밖에 없다거나, 편지의 은밀한 내용을 함께 공유한다는 사이라는 정도의 하중)일 뿐이다.

하지만 편지의 텅빈 무게조차 내가 쓴 것이 아니라, 내가 알 지 못하는 나의 무의식이 네게 부친 것이다. 

…그녀에게 부쳤을 지도 모르는 편지

 

대타자란…

편지에서 괄호 안의 대타자는 ⌈주체(나)가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혹은 신, 조상)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이라고 한다. 즉 대타자는 어디에선가 늘 나를 지켜보면서 나의 감정과 생각, 기도를 다 이해할 뿐 아니라, 나의 착한 행동과 잘못한 점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그것을 낱낱이 어디엔가 기록한다고 내가 암암리에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神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론 상황에 따라 조국, 자유, 민주주의, 정의 등으로 이데올로기적 대의로 위상을 바꿔갈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보지 않았으나 거기에 대타자가 있기 때문에 나의 잘못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고, 열심히 한 자신을 뿌듯해 하기도 한다.

사이코패스 등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은 위와 같은 대타자를 염두에 둔 편지를 쓰지 못한다. 그들은 소타자인 타인과 자신의 1 대 1 관계의 형성에는 문제가 없으나, 대타자의 형성에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대타자에 대한 죄책감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위의 편지에 기재한 것처럼 그녀를 생각하는 순간들마다 그녀에 대한 생각과 감정(그 다양한 감정)들을 대타자와 나눌 수 없다. 그들의 사고는 어쩌면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기에 어쩌면 기능적으로 단순하고 효율적일 수 있다.

위키백과는 “사이코패스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에 속하며 공감 및 죄책감의 결여, 얕은 감정, 자기중심성, 남을 잘 속임을 특징으로 한다. 망상, 비합리적 사고 등의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신병과는 분명히 구분된다”고 한다. 

우리는 사회 혹은 신, 아버지(실제의 아버지가 아니다) 등의 대타자로 부터 언어(상징적 질서)를 받았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때, 나의 말이 사회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대타자에게 물어가며 대화한다. 사실 우리의 말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보다 “내 말을 저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말을 하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 만약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면 어떻게 하지?”등의 것들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우리는 내용을 전달하기 보다 오히려 너와 내가 서로 소통하고 있다(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소통(대화)한다. 친한 친구들이야 말로 아무 내용없는 말로 웃고 떠들며, 연인들의 밀어(蜜語)는 내용없이 끈적거린다. ⌈’인간 행동의 대부분은 상호 작용 자체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반사회적 이상 성격자의 언어 사용은 언어가 역설적으로 순수한 소통의 도구, 즉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라는 표준적인 언어관에 꼭 맞는다.⌋ 그래서 사이코패스야 말로 일반인에 비하여 더 합리적이며, 망상과 같은 것에 빠질 소지가 적다. 즉 서구의 합리주의가 지향하는 모델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고는 일반인보다 더 효율적이다. 그래서 어금니 아빠 이영학은 일반인보다 지능지수가 떨어짐에도 딸의 후원금 모집에서 아내의 사망과 여중생 살해에 이르기까지 그의 범행은 일반인에 비하여 월등히 지능적이었다. 

 

선언적 차원…

⌈주체가 변모하는 고유한 순간은 행위의 순간이 아니라 바로 선언의 순간이다. 선언의 반성적 계기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발화는 단지 어떤 내용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체(내)가 그 내용과 관계맺는 방식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선언적 차원이다.

선언적 차원 — 내용에는 변화가 없으나 그 내용을 선언함(명시적으로 밝힘)으로써 내용이 완전히 바뀌는 차원을 말한다. 

  • 자신을 프롤레타리아라고 선언 : 추후 프롤레타리아로 파업에 참여

파업에 참여해도 (선언하지 않으면) 프롤레타리아가 아닐 수 있다.
교회에 다녀도 (선언하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닐 수 있다.

  • 유용성은 유용성의 의미에 대한 주장(선언) : 대도시에 살면서 (시골이나 황무지에 필요한) 랜드로버를 타는 이유는, 이 따분한 도시를 떠나 야생으로 떠나고 싶어
  • 암묵리에 서로 알고 있는 바람 피운 사실을 남편이 고백(선언) : 바람피운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고백하지? 더 이상 나와 함께 살지 않겠다는 것인가?
  • 고문하지 않는다면서 고문의 필요성을 진술(선언)하는 정부 : 고문하지 않는다면서 일관성없이 고문이 필요하다는 것은 배후에 다른 목적이 있지 않을까?
  • 믿는 척 (선언)하는 것 : 믿는 행위로 전환(다음 장 참고)
  • 선언의 부정적 판본 : 어렸을 적에 골목을 지나는데 동생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 말한다. “엄마가 나 돈 안 줬다.”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다. 하지만 그 말로 엄마가 동생에게 돈을 주면서 “형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것을 안다.

이것들이야 말로 ⌈인간의 발화에 내재하는 언표 내용과 언표 행위 사이의 해소 블가능한 간극⌋의 예다.

2016년 10월 25일 박근혜는 최순실과 관련하여 TV를 통해 사과 발표를 한다. 15:43분 쯤 국민들은 “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하고 경악한다. 동시에 박근혜 정부는 바닥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탄핵된다. 한참 후 그 사과발표 내용을 읽어보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발표의 핵심적인 내용은 “아시다시피 선거 때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듣습니다. 최순실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전달됐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도 같은 맥락에서 표현 등에서 도움 받은 적 있습니다”는 것이었다. 내용은 별 것이 아니었으나, 박근혜 정부는 망했다.

몰락하게 된 것은 내용 때문이 아니다. 바로 선언적 차원에 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사과 발표가 있기 이전에 각종 보도매체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사이에 대하여 연일 보도했고, K-스포츠, 삼성 등의 승마 지원, 청와대 비서관들을 향해 최순실이 지시를 내리는 장면이 TV를 통해 날마다 방송됐다. 하지만 국민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계속 부인했다. 정부가 무너질까봐, 아무리 높게 쳐줘도 여염집 아녀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일개 최순실 따위가 권력을 좌지우지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대통령과 일부 친분관계는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국정을 논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부인한다. 즉 (왕의 권위가 무너질까 봐) 벌거벗고 있지 않은 것처럼 임금을 바라보고 있는 동화 속의 인물처럼 우리는 행동했다. 우리들이 부인한 탓에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바로 그 시점, 박근혜는 사실을 고백(선언)한다, “그래요, 최순실에게 도움을 받았어요”라고. 국민들은 더 이상 임금님이 옷을 입고 있는 척할 수 없게 되었다. 박근혜가 어린 아이처럼 임금님이 벌가벗고 있다는 것을 대타자에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는 진실이 가져온 거대한 파국을 감당해야만 했다.

지젝은 ⌈소통 행위의 내용 속에 소통 행위 자체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한다. 임금님이 발가벗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아이들이 발가벗었다고 소리쳐도 달라진 내용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내용을 부인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리가 되었다. 그리고 뭔가를 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소통 행위가 가진 내용이다.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How to read 라캉 – 0장

시작하면서…

한권의 책을 한달 내내 읽었다. 전에 이미 두세번인가 읽은 책이다. 번역이 난삽한 탓이라고 해야 만 위로가 될 정도로 나의 지적 수준은 책의 내용에 미치지 못했다. 책이 다루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추잡함(외설성)과 인간 주체성이 시작되는 텅빈 곳에서 울려나오는 비명을 감안한다면, 지적 수준이나 이해력이 부족하여 내용을 씹어서 소화하고 지적인 자양분으로 전환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다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하기엔 역부족인 책을 다시 펼쳤다. 한달동안 4~5번인가 읽었다. 읽을 때마다 줄을 쳤으며,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여백에 연필로 적었다. 다음에 읽을 때면 전에 적었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깨닫게 된 것을 적었다. 물론 다음에 지울 것이 틀림없기에 연필로 쓸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나의 독해력에 자신이 없었다. 그 사이에 책에는 손때가 새까맣게 묻었다.

읽는 것에 물렸지만, 반복강박에 사로잡힌듯 읽었다. 그리고 읽기를 잠정중단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한달동안 읽은 책이란 ‘HOW TO READ 라캉’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2005년에 썼다.

이 책을 읽으면서 숀 호머의 ‘라캉읽기’와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읽으며 적어놓았던 노트를 참고했지만, 이해하기(지식을) 위한 편집적 집착의 끝에 정신이 분열(편집적 분열증)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부끄럽지만 ‘프로이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라캉’의 책이 몇권 사긴 했지만 분명 읽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갖고 있는 라캉의 책을 펼쳐보니, 거기에는 형광펜 등으로 줄이 그어져 있고, 연필로 뭔가 그적거린 흔적이 있다. 분명 읽었다는 증거이지만, 전혀 이해를 못했던 탓에, 아무 것도 읽지 않은 것과 같았기에,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불구하고 프로이트와 라캉을 월반하고 나는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을 읽고 있다. 여기에서 ‘HOW TO READ’에는 두가지의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기술적인 방법론’ 즉 (라캉을 쉽게) 읽는(이해하는) 기술과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하나는 ‘어떤 관점(view point)을 가지고 읽을 것인가’일 수도 있다.

라캉을 이해하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는데, 동유럽의 기적이자 라캉 정신분석학의 전도사로 불려지는 슬라보예 지젝은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을 통해 라캉을 설명하는 대신 ‘HOW TO READ 라캉’은 라캉을 이용하여 우리의 사회적, 리비도적 곤경을 설명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중립적인 판정을 내리는 대신 당파적인 독해에 참여할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분명 어떤 관점에서 읽을 것인가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러니까 기초문제도 풀지 못하는 나에게 심화과정으로 넘어간다고 하는 한편, 맘대로(당파적으로) 풀테니까 지적 수준이 안되어 따라오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일단 자크 라캉이라는 문제 인물에 대한 레이먼드 탤리스의 글을 보자,

제도의 탈을 쓰고 ‘이론’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사기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할 미래의 역사가들은 당연히 자크 라캉이라는 프랑스 정신분석가의 영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의 이론(痢論 theorrhoea 1theory(이론)과 diarrhoea(설사)가 합성된 신조어로 痢(설사 리)자를 사용하여 痢論(똥같은 논리)으로 표기 )을 적용하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들과 한계, 지워지지 않는 영역에 관한 증거없는 주장들을 뒤섞어 그들 나름의 인문학 판으로 짜 놓은 그물 한 가운데 있는 가장 살찐 거미 중 한 마리이다. 현대 이론의 중심에 있는 독단론 대부분이 그로 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다.

– 엘리자베스 루디네스코의 ‘라캉의 전기’에 대해
레이먼드 탤리스가 타임지 고등교육 부록에 게재한 서평 중 –

거의 악담이지만 레이먼트의 글에는 분명 진실이 있다. (프로이트와 함께) 라캉의 이론이 갖고 있는 외설성이야 말로 痢論(개똥같은 논리)의 배경이며, 라캉이 만든 ⌈실재계·상상계·상징계⌋는 공간적 좌표가 없는 가상계이기 때문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영역’이다. 이들 영역은 실재한다는 증거가 없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타자·거세·향락·환상·무의식 등의 낱말들을 재료로 가설(假設)되었을 뿐이다. 이 낱말들은 다시 이 허황한 세계(실재계·상상계·상징계) 위를 떠다니며, 우리의 내면과 이 시대의 증상들이 얼마나 착잡한가를 알려준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직면하는 번뇌의 실상이다.

假作眞時眞亦假   헛것이 참된 것을 만드는 때(시간)는 참된 것 역시 헛것이요
無爲有處有還無   없음이 있는 것이 되는 곳(공간)에서는 있음 또한 없음이라.

– 홍루몽 속의 누각 태허환경(太虛幻境 : 아무 것도 없는 꿈 속)의 주련 –

레이먼드의 라캉에 대한 비난은 정확히 태허환경의 주련과 일치한다. 즉, “너희들은 속고 있는 것이다. 라캉의 이론은 거짓이다.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가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가상에 기반을 둔 서구 문명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것인가? 라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캉이 구축한 가상의 세계(Virtual World)로 들어가야 한다. 라캉의 용어 대부분은 우리의 내면의 영역과 현상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내면을 설명하기 위하여 조작(발명)해 낸 세계이자 그 세계를 건설할 도구인 것이다. 그 세계는 미지이면서도 건설 중이며, 우리는 도구에 미숙할 뿐이다.

라캉이 구축한 가상의 세계가 개인의 내면과 현실 세계를 해석(이해)하는데 유효하다는 점에서, 특히 포스트 모던한 이 시대의 곤경을 해석하는 데 라캉만큼 유용한 도구가 없다는 점 때문에, 슬라보예 지젝같은 작자들이 라캉이 구축한 이런 것들을 이용하여 독단적인 인문학의 한 마당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세계를 설명하는데 유효하다고 과연 라캉과 지젝의 이론이 맞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될까. 라캉의 이론은 거짓되고 텅빈 것이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세상과 우리의 내면 또한 (서구의 합리주의에 기반하지 않고) 텅빈 곳에서 울려나오는 거짓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 진리나 진실이라면 이해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려운 것은 거짓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의 구조를 밝히고, 텅빈 것을 둘러싸고 있는 외양(베일)을 갈파해 내는 것이 아닐까? 지젝은 라캉을 이용하여 그 작업을 하고 있다. 거짓과 허구 속에 감추어진 좌표를 더듬어 진실의 성전에 당도하고, 세상의 껍질을 벗겨 그 안이 텅비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이 책은 불가피하게 어렵다.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기보다, 책을 읽기 위해 지식을 쌓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사색을 위한 독서보다, 독서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사색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역설과 반전을 경험하게 하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래서 이해를 넘어서 오해에 이르게 되고, 앞으로 가기 위하여 걸어온 길로 되돌아가야 했다. 본문이 불과 169쪽(16~184쪽)에 불과하지만,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을 읽는 것처럼 펼치는 쪽 마다 전혀 새로운 이해로 점철되는 이 책은 정신분석학에 해당되는 것인지, 예술비평, 문학, 정치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으면서도 아닌 것 같다.

책을 읽으며 필요한 지식을 모으고 사색을 하며, 여백과 메모지에 썼던 생각들을 챕터별로 기재한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하게 나만의 오독에 근거한다는 것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