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즈 와이드 셧’과 함께 라캉을

How to read 라캉 – 3장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라는 이 부분은 위험하다. 지옥인 이웃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전에 미쳐버릴 수가 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며, 이해를 한단 말인가? 지젝 또한 프로이트와 라캉이 제 정신이 아니듯이 미쳤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미치게 하려고 이 부분을 쓴 것이 틀림없다.

⌈그럼 왜 타자(Other)는 대문자로 쓰는가? 물론 미쳤기 때문이다⌋로 이 장은 시작된다. 그렇다. 이 장은 소타자이던 대타자이던 간에 어떤 미친 것, 괴물들에 대해서 말하고, 주체인 내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다.

지젝은 대타자의 핵심적인 신비는 익명의 상징적 질서가 주체화되는 지점에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신성함이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인간의 삶보다 더 큰 인격, 모든 주체에게 초월한 존재로 다가오는 인격화된 대타자가 아닌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역사, 우리에게 필연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대의Cause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나와 다른 인간존재로서의 기이한 주체가 아니라, 어떤 제삼자, 현실적 개별 인간들의 상호작용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주체를 갖게 된다.

물론 여기에서 발생하는 치명적인 수수께끼는 ‘이 불가해한 주체가 내게서 무엇을 원할까‘하는 물음이다.⌋

타자, 지옥으로서의 이웃…

⌈”인간은 타자로서 욕망한다”라는 말은 무엇보다 인간의 욕망은 ‘탈중심화’된 대타자, 상징적 질서가 구조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대타자(이 안에는 소타자들도 있다) 즉, 이 불가해한 주체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묻고 나는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그 물음에 답을 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나의 욕망을 형성해 나간다. 아무도 자동차를 갖고 싶어하지 않으면, 나는 자동차를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 폭스바겐에서 내가 딱정벌레 한 마리 사주 길 욕망(광고)하기 때문에, 딱정벌레를 사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문장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주체(나)는 타자 자체를 욕망하는 존재로 경험하는 한에서만, 타자를 불가해한 욕망의 자리로 경험하는 한에서만, 불투명한 욕망이 그, 그녀(타자)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경험하는 한에서만 욕망한다. 타자는 수수께끼 같은 욕망으로 나에게 말을 걸 뿐 아니라,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 즉 내 욕망의 수수께끼를 나에게 직면시킨다⌋면서 미궁으로 나를 밀어넣는다. 한번 아래의 사례를 보자.

유혹과 스토킹의 사이

예쁜 ‘G’irl는 멋진 ‘B’oy로 부터 “사랑한다”는 말은 듣는다. 흥분되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폭력적이고 외상적이다.

  • 폭력적이라 함은, B라는 불가해한 이웃의 침입일 뿐 아니라, G는 자신과 자신 속에서 B의 사랑을 촉발한 불가해한 x 사이의 간극을 느끼게 되는 히스테리적 상황을 맞이했고, — B야! 사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녀자가 아니야.
  • 외상적이라 함은, G 자신이 부인하고 있던, 누군가에게 유혹받고 싶다는 (추잡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 그래, 나는 추잡하다. 어쩔래?
  •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폭력적이고 외상적인 침입이야말로 G를 짜릿하게 한다는 것이다. — 흥분이 되지 않는다면? B라는 그 자식은 스토커가 되고 마는 것이지.

욕망하는 존재‘인 B가 사랑한다고 자신의 ‘불투명한 욕망‘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G는 유혹받고 싶다는 야한 ‘자신의 욕망의 수수께끼‘에 직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웃은 그런 존재다. 지옥이거나, 아니면…

위의 예문을 통하여 이웃(B)은 나(G)를 히스테리화하는 불가해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존재의 핵은 이웃의 욕망, 나에게 뿐 만 아니라 이웃 자신에게도 수수께끼 같은 욕망이다.⌋ 이러한 이웃의 괴물성, 참을 수 없는 강도와 불가해함으로 다가오는 욕망의 궁극적인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라캉은 사물(Das Ding)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인간이 아닌 괴물 즉 사물들로 둘러싸인 이 세상에서 ⌈법의 궁극적인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잊지 않게 하는 것, 이웃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으로, 법은 이웃의 괴물성에 대한 일종의 방호벽⌋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사물로서의 타자가 지닌 이 심연을 맞이(회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당신은 내 아내입니다, 내 주인입니다. 내 친구다”라는 ‘정초적 말(founding word)’을 사용한다. 즉 어떤 이웃을 불가해한 이웃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하여 특정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에게 “당신은 나의 “아내다”, “주인이다”, “친구다”라고 부르고, 나는 아내, 주인, 친구로서 그들을 대하며,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나를 남편, 하인, 친구로 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다른 놈과 눈이 맞아 놀아난다거나, 주인이 품삯을 주지 않거나, 친구가 배신 때리기 놀이를 한다면… 그는 다시 인간이 아닌 것, 즉 사물로 되돌아가게 된다.

라캉은 ⌈우리는 실천적 안티 휴머니즘을 인정해야 한다고,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라고 부른 차원을 넘어서는 윤리, 인간성의 지극히 비인간적인 핵심과 대면하는 윤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잠재된 괴물성, 보통 ‘아우슈비츠’라는 단어로 포괄되는 현상들 속에서 폭발하는 악마적 차원을 두려움 없이 고려하는 윤리학을 의미한다.⌋

제 3의 차원 : 안 죽었거나 안 인간이거나…

   肯定(1차원)    He is dead.    He is human.
   否定(2차원)    He is not dead.    He is not human.
   不定(3차원)    He is undead.    He is unhuman.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이전에는 긍정과 부정(negative) 두가지 차원 만 있었다,

  • 죽었거나, 살았거나(죽지 않았거나),
  • 인간이거나, (인간이 아닌) 신이나 짐승이거나

칸트는 제 3의 차원을 연다, 정의할 수 없는(indefinite) 차원.

  • 안죽음 :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괴물과 같은 산 죽음(living dead)
  • 비인간 : 인간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인간 존재에 내재한 어떤 끔직한 과잉에 의해 표지된 인간

이로 인하여 ⌈칸트 이전의 세계에서 인간은 단지 이성적 존재, 동물적 정욕과 신적 광기의 과잉에 맞서 싸우는 이성의 존재였다. 하지만 칸트 이후 맞서 싸워야 할 과잉은 주체성 자체의 중핵 바로 그것에 내재해 있다.⌋ 결국 ⌈칸트와 함께 광기는 인간존재의 핵심 자체가 무제한적으로 폭발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 말을 이렇게 풀어보면 어떨까, 나(我)와 내가 아닌 타자(他我)이 있다. 그리고 제 3의 차원인 내가 아닌 나(非我)가 있다면? 위의 정의할 수 없는 차원의 ‘비인간’이란 단지 이웃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의 핵심 즉 나의 주체성 자체의 중핵 속에 있다는 것이 된다. 무의식의 주체인 나와 미쳐서 결코 내가 아닌 나와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쓸린 나, 바로 그것 아닌가?

환상과  무의식 그리고 주체…

이 끔찍한 타자의 심연이 과도하게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외상적 충격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우리는 타자의 욕망과 대면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안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환상이 타자의 수수께끼 같은 욕망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환상의 역할…

실재계의 외상에 대한 필터 역할, 욕망을 상연하는 스크린 역할을 함.

상연하는 욕망은 주체(나)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

욕망의 근원적 질문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또 근본적인 차원에서 환상은 내가 타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려준다.

환상은…

  • 주체의 인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 객관적이 아니다
  • 주체가 의식적으로 경험한 직관에 속하는 어떤 것, 즉 나의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 주관적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주관적이라는 범주

‘즉, 사물이 내가 보는 방식으로 보이지 않음에도 실제적이고 객관적으로 내게 보이는 방식’

따라서…

  • 환상의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 것은 무의식에 남게 됨

– 나의 가장 내밀한 주관적 체험 — 주관적인 것
– 사물이 실제로 나에게 보이는 모습 — 객관적인 것
– 내 존재의 핵심을 구성하고 보증하는 근원적 환상

  • 환상을 통하여 상징계에 진입함에 따라 의식할 수 있게 됨

<밑의 파란 글씨를 위의 표와 비교할 것>

아이는 딸기 케이크를 먹는(상연되는 욕망은) 동안 자기가 맛있게 먹는(자신의 욕망이) 걸 엄마 아빠가 만족스럽게 보고 있었다는(타자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점이다. (이를 통하여) 딸기 케이크를 먹는 환상은 실제로는 이와 같은 부모가 준 케이크를 맛있게 먹는 아이와의 동일성을 형성하려는 시도에 관한 것으로, 그것은 부모를 만족시켜서 자신을 그들의 욕망의 대상(근본적인 차원에서 내가 타인에게 어떤 존재인지를)으로 만들어준다(알려준다).

⌈성적 향락은 실재적이다. 그것은 아찔한 강도 때문에 외상적인 어떤 것이며, 우리로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성관계가 작동하기 위해서 얼마간의 환상이 상연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외상에 대한 필터 역할)

결국 ⌈나는 내 가장 내밀한 주관적 체험, 사물이 ‘실제로 나에게 보이는’ 모습, 내 존재의 핵심을 구성하고 보증하는 근원적 환상을 빼앗기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그것을 의식적으로 경험하지도, 확신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환상의 너머, 의미의 세계(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한 무의식이다. 경험했지만(알지만) 나는 모르는(기표화되지 못한), 모르는 앎의 세계다.

무의식이란 :모르는 앎…

구분 안다
(인식)
모른다
(인식불능)
아는 것
(지식)
아는 것을 안다
(의식)
아는 것을 모른다
(무의식)
모르는 것
(무지)
모르는 것을 안다
(의식)
모르는 것을 모른다
(비의식)

환상을 통과(상연)하지 못한 관계로 ⌈경험(아는 것)을, 상징화하지 못한(모르는)⌋ 것이 무의식이다.

그리고 무의식에 남아 있는 것은,

  • 내 가장 내밀한 주관적 체험
  • 사물이 ‘실제로 나에게 보이는’ 모습
  • 내 존재의 핵심을 구성하고 보증하는 근원적 환상
  • 외상
  • 상연되지 아니한 욕망 등

⌈표준적인 관점에서, 주체성을 구성하는 차원은 현상학적 (자기) 체험의 차원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주체는 주체가 (자기) 체험하는 핵심 측면(그의 근원적 환상)이 그에게 접근 불가능하게 될 때, 원초적으로 억압될 때 출현한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무의식이란 접근 불가능한 현상이지 내 현상학적 체험을 규제하는 객관적인 메카니즘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실체가 우리의 내면적인 삶(외면적 행위로 소급될 수 없는 환상적 체험)의 징후를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주체를 만나게 된다는 통속적인 생각과 반대로, 인간의 주체성을 특징짓는 것은 그 둘을 분리하는 간극이라는 것, 환상이란 궁극적으로 주체에 접근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라캉이 말한 것처럼 이 접근 불가능성이 주체를 ‘텅 비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내적 상태를 통해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체험하는 주체라는 표준적인 관념을 완전히 뒤집는 어떤 관계성을 갖게 된다.

이 이상한 관계는 텅 빈, 비현상학적인 주체와 주체에게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는 현상들 간의 관계다. 다시 말해 정신분석은 주체 없는 역설적 현상학을 공식화시킨다. 즉, 주체의 현상이 아닌데 주체에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 말이다. 그렇다고 주체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주체는 정확히 배제의 양태로, 분리된 모습으로, 그, 그녀의 체험의 핵심을 받아들일 수 없는 대행자로서 거기 참여한다.⌋

주체에 대한 어쩌고 저쩌고…

지젝에게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현실적 개인의 ‘나’가 아니라, 부정성의 텅 빈 지점이다. 이 텅 빈 장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의 반대편, 모든 규정된 것들의 부정성이다.

지젝은 바로 여기, 아무런 내용물없는 텅 빈 장소에 주체를 위치시킨다. 즉 주체는 공백이다. 지젝은 코기토를 자기 자신에서 세계의 나머지 부분이 축출될 때 남게 되는 텅 빈 공간으로 설명한다.

–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중에서

나는 이 글을 이렇게 새긴다. 코기토 이전에는 실재계도 상징계도 없다.

Cogito(나는 생각한다)로 틈(간극)이 생기고 그 틈은 실재계와 상징계를 나눈다. 주체는 그 틈을 메우(표현, 사고 등)기 위하여 상징적 질서 즉 언어를 더듬는다. 하지만 상징적 질서(언어 등)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틈을 메우지만 결코 메워지지 않는다. 이것이 결여이며, 결여를 감당하는 것 또한 주체다.

…이러니 사람이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가 쉽겠는가?

만약, 상징계가 실재계를 완전하게 재현한다면 : 자연상태 즉 생각이 없는 상태

  • 상징계도 실재계라는 경계는 없으며 : 실재계=상징계
  • 생각(Cogito)마저 없다
  • 그러므로 주체는 없다 :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계가 실재계를 불완전하고 재현하기 때문에 : 언어상태 즉 생각이라는 사태가 발생

  • 결여에 따른 생각의 발생 : 생각한다
  • 그러므로 주체가 출현 :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틈(주체)의 도표…

생각을 하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그 생각(틈을 메우는 방식)이 주체를 결정한다.

실재계 상징계
주체 여호와이다, 대타자 중 히나다, 나는 믿지 않는다,
이미 죽었다, 무당의 돈벌이 수단이다, 필요없다,
없으면 윤리가 무너진다.
에이즈 인류 타락에 대한 징벌이다, 면역결핍이라는 의학
과제다, 제약회사에서 만든 가짜다, 짐승들에게서
옮았다.
빨갱이 나라를 말아먹는 놈들이다, 이승만이 만든 가짜다,
김일성이를 숭배한다, 서로 증오하기 위한 단어다,
민족을 둘로 가르는 단어다.
  • 나(주체)는 신(실재)을 믿지 않는다(상징)
  • 나(주체)는 에이즈(실재)를 제약회사에서 만든 가짜(상징)라고 생각한다.
  • 나(주체)는 빨갱이(실재)가 서로 증오하기 위한 단어(상징)라고 생각한다.

즉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나(주체)이며, 빨갱이가 서로 증오하기 위한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주체)다. 그러나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는 모른다.

강간이란…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강간이 그토록 외상적인 충격을 주는 것은 단지 그것이 난폭한 외부적 폭력이어서가 아니라, 희생자 안에서 부인된 어떤 것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1. 페미니스트에게는…

  • 강간은 외부로부터 강제된 폭력이라는 최소한의 공리
  • 하지만 여성의 분열되고 히스테릭한 위치를 해소치 못함(성적으로 학대받고 착취당하는 것을 불평하면서도 그것을 원하고 남자의 유혹을 유도)

2. 정신분석가에게는… 

강간 피해자1 강간 피해자2
꿈은 거칠게 다루어지고 심지어
강간당하고 싶다.
남성 쇼비니스트 중심의 생각
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강하게 꿈을 부인한다. 부인할 꿈이 없다.
외상이 강하다 약하다

두 사람이 강간을 당했다고 할 때 ‘외부의’ 사회적 현실로 “그녀의 꿈 재료’를 실현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피해자1에게 훨씬 외상적이다.

 3. 강간범에게는…

이 놈들은 강간하는 것을 꿈꾸지 않는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신사의 환상을 갖는다. 강간은 자신의 무능함으로부터 실제 삶 속에서 그런 파트너의 발견으로의 폭력적인 이행이다.

꿈이란…

꿈과 현실의 대립에서 ⌈환상은 현실의 편에 있으며, 외상적인 실재와 대면하는 것은 바로 꿈에서 다. 이것은 꿈이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 자체가 자신의 꿈을(꿈 속에서 드러나는 실재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라캉, 마니차를 돌리다

How to read 라캉 – 2장

진짜와 가짜…

이번 장에서는 진짜가 만들어내는 허구와 가짜로 부터 울려나오는 진실의 변주를 보여준다. 

예전에 순풍산부인과를 보면 웃긴 장면이 나온다. 때에 맞춰 화면에서 웃음소리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대타자에게 웃긴 것을 알리기 위하여 힘들게 웃지 않아도 된다. 환상적이게도 TV가 나 대신 웃어주기(대타자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나의 감정 또한 TV가 대신한다.

 

상호작용…

상호작용을 상호능동성이라고 하자.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열심히 골프게임을 하고, 매일 페이스북을 하고, 짜릿한 야동을 보고, 김어준의 ‘다스뵈이다’를 유튜브로 킬킬거리며 본다. 이것이 바로 상호능동성이다. 하지만 정작 골프를 치러 가지 않고, 친구를 만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는다. 불의에 대한 저항은 다스뵈이다가 나 대신 한다. 즉 능동적일수록 나는 수동적이 된다. 이것이 상호능동성의 짝패인 상호수동성이다.

상호수동성/상호능동성 = 어떤 일/가짜 활동 = 예정설의 역설

역으로 상호수동성은 이렇다. 티벳의 (통을 돌림으로써 기도를 대신해주는) 마니차, 중국에 있었던 (상가집에서 상주 대신 울어주는) 곡비(哭卑), 80년대의 (드라마를 대신 봐 주는) 비디오 테입 등이 상호수동성의 장치다. 오늘 한 장사의 이문을 따지면서 경문이 들어있는 마니차는 돌림으로써 기도를 할 수 있다. 곡비가 우는 동안 유산상속이나 장지를 마련하는 등의 중요한 일에 몰두할 수 있다. 비디오 테이프가 일일 드라마를 보는 동안 나는 잔무를 처리할 수 있다. 게다가 마니차의 기도는 잡다한 생각들로 지저분한 나의 기도보다 더욱 순수하다. 곡비의 애절한 울음소리에 돌아가신 망자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칠 수도 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된 드라마를 볼 생각을 하면서 흐뭇하다.

여기에서 잠시 생각할 꺼리가 있다. 티벳의 마니차가 나 대신 기도를 해주 것에 대하여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반면 우리는 주일의 연봇돈이나 사찰에 꼬라박는 시줏돈이 우리의 믿음의 크기라고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다. 믿음의 파이 또한 가난한 사람에게는 돌아갈 것이 없다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서 우리는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지젝은 가짜활동이라는 강박신경증자의 전략을 거론한다. ⌈어떤 폭발 직전의 긴장상태에 있는 집단에서 강박적으로 행해지는 항상 어색한 침묵 상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그 침묵 상태가 참석자들에게 잠재된 긴장을 대면할 수 있도록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치료 중 강박신경증자는 분석가에게 끊임없이 사건 사고, 꿈, 자기 인식의 말들을 쏟아낸다. 분석가가 진실로 문제 되는 것을 물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분석가를 꼼짝 못하게 하려고 말을 한다.⌋ 즉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강박적으로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예정설이 어떻게 역사 상 가장 생산적인 활동을 촉발한 자본주의 시스템을 지탱하는지 보여준다. 사태는 이미 정해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멸망이 일어나지 않도록(대타자의 고정불변을 지탱하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끊임없이 활동한다.

 

과거의 기원적 진실로의 회귀…

앞의 장의 편지에서 보듯이 나의 감정과 생각, 순풍산부인과를 보면서 느낀 ⌈우리의 내밀한 감정과 태도가 타자의 형상으로 전치되는 현상은 라캉의 대타자가 지닌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이 현상은 믿음이나 지식의 경우에도 발생하는데 주체(나)의 지식이 타인에게 전치되는 현상을 지시하기 위하여 ‘안다고 가정된 주체(subject supposed to know)’란 개념을 사용한다. 예전 TV극의 형사 콜롬보는 어찌된 셈인지, 시청자들이 본 살해 사건의 진상을 다 안다. 진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 어떻게 용의자에게 증명할 것인가 하는 점만 그에게 남는다. 이것은 중세교부 철학에서 신의 논증과 닮아 있다.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는 우선 신을 믿고, 그 믿음을 기반으로 신념의 진실성을 입증할 증거를 따진다. 

안젤무스의 논증

  1. 신은 정의상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 큰 존재다.(가장 큰 존재다.)
  2. 실제로도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크다.(상상<실재)
  3. 따라서 신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상상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크지 않기 때문이다.(상상된 가장 큰 존재 보다 더 큰 실재 존재가 존재하지 않으면 상상될 수 있는 존재보다 클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논리다. 상상은 시공을 뛰어넘는다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 정신분석가가 치료 과정에서 갖게 되는 기능을 보자. 환자는 절대적 확신 속에서 분석가가 자신의 비밀을 안다고 생각한다. 사실 정신분석가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환자의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확신을 체현하는 역할 만 한다. 그러면 ⌈환자가 이미 무의식 속에서 알고 있는 것을 분석가라는 인물에게 전가시키는 이 현상을 치료 중에 일어나는 전이 현상의 핵심으로 지적한다. 분석가가 이미 내 증상의 의미를 안다고 가정하면 (환자인) 나는 내 증상의 무의식적 의미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치료가 되었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또 환자가 도달한 증상의 무의식적 의미 또한 진실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있었을 것으로 가정된 과거(the past supposed to have been)의 기원적 진실로의 회귀’라는 것에 대입해 보자.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루터는 기독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을 수행했는데, 그때 그는 자신이 단지 수 세기에 걸친 카톨릭의 타락 때문에 가려진 진실을 드러낼 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루터는 중세 이전 과거에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 결과, 개신교를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수입되고 여기에 부흥목사의 신앙 간증 두 큰술과 빤쓰 서너장을 섞어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개독교라는 변종을 만든다. 스코틀랜드 스커트도 19세기 무렵에 나타난 예전에 없었던 복고풍 패션일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과거의 기원적 진실로의 회귀라는 것은 우리의 추억에도 적용된다. 남자의 나이 스물에 미팅에 나가서 어떤 여자아이를 만났을 수 있다. 서로 사랑하기에는 남자가 그렇듯이 여자 또한 아주 평범했다. 하지만 둘의 구태의연한 만남은 계속되었다. 서로 좋아해서 라기보다,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미지근한 만남 끝에 결국 둘은 헤어진다. 그리고 시간이 가고 해가 가고 세월이 간다. 남자는 문득 자신의 인생이 허전하다고 느낀다. 그러다가 그녀와 열렬히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과거의 기원적 진실을 떠올린다. 자신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좀 괜찮은 파편을 모으고 그럴 듯한 대화와 멋진 장면(이삼십년 전의 기억은 허구에 가깝다)을 가미하여 애정소설 한편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추억은 애잔하고 아름답게 각색된다. 회귀 자체가 (실재하지 않았던) 사랑을 구성하는 것이고, 과거의 기원적 진실이란 허구다. 지금의 현실이 아무 내용이 없다면, 되씹어볼 젊은 시절의 사랑 동화가 더욱 요청되는 법이다.

여기에서 리비도적인 실재를 분석해보자. 사랑했다(exsist)면 추억은 없다, 사랑했던 진실이 있을 뿐. 사랑하지 않았기(un-exsist) 때문에 사랑했다고 주장(insist)하는 것이 추억이다.(참고 : <에일리언> 관객으로서의 라캉)

⌈안다고 가정된 주체의 현상은 이차적인 현상이라는 것, 그것은 상징적 질서의 구성적 특질인 믿는다고 가정된 주체를 배경으로 해서만 출현한다⌋고 한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타인에게 전가한다. 즉 “나는 믿지 않지만, 우리의 조상(믿는다고 가정된 주체)은 믿었다”고 전가한다. 아이들이 믿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을 위하여 산타클로스 행새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믿는 척한다. ⌈”나는 실제로 믿지 않는다. 그것은 내 문화의 일부일 뿐이다”라는 태도는 우리 시대의 특징으로, 전치된 믿음의 전형적인 형태일 것이다. ‘문화’란 실제로 믿지 않고 진정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행하는 모든 것들에 붙인 이름이다. 이것이 우리가 근본주의자들을 ‘야만인’, ‘반문화인’, 문화의 파괴자라며 비난하는 이유다. 그들은 정말 자신들의 믿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을 보면 정말 야만적이지 아니한가?

파스칼은 비신자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무릎을 끓고 기도를 하시오. 믿는 듯이 행동하면 믿음이 저절로 올 것이오”

오래 전 나는 믿음을 갖고자 했을 때, 믿는 척하지 못했다. 믿음은 진실하며, ‘하는 척’하는 것은 거짓이기에, 진실과 거짓이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나는 기독교적 의례들을 거부했다.

하지만 믿음이 진실일까? 그러한 속단이 옳고 그른 것인지는 차치하고, 정작 나는 믿음보다 진실이 더 중요했던 것은 아닐까?

…파스칼의 이야기를 읽고 쓴 메모

결국 나는 믿음없는 자로 계속 남아있다.

 

진실은 허구의 구조를 지닌다…

블로그를 하면서 나는 현실의 나와 다른 가상의 인간을 꾸며나간다. 어쩌면 현실 생활에서의 자기가 자신의 추악한 내면을 은폐하는 가면이고, 역설적이게도 사이버공간에서 나는 진짜 자신을 표출하게 해주는 허구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이 허구가 쏟아내는 진실이다. 

하지만 ⌈상징적 가면은 그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의 직접적 현실보다 중요하다. 이런 작동방식은 프로이트가 물신주의적 부인이라고 부르는 구조를 함축한다.⌋

倒錯症(paraphilia)의 두가지 문법 중

1… 물신주의적 否認의 문법

< 대타자가 알지 못하도록 부인하는 것, 실재 너머의 상징적 세계를 위해 날 것의 실재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최소한의 이상화에 참여하는 것 >

오이디푸스期의 주체가 상징적 아버지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에 따른 거세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가 팔루스의 대체물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머니가 거세되었다는 것(즉 어머니 또한 결여를 지닌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否認하는 주체다.

즉 알고 있지만, 그것을 부인하는 식의 행동을 한다.

  • 역겨운 냄새가 나지만, (이웃과 함께 살기 위하여) 냄새가 나지 않는 척 한다.
  • 판사가 무식한 늙은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법의 권위를 위하여)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거짓이 진실의 자리를 대신하지만, 이러한 상징적 허구는 실효성을 갖는다. 이러한 거짓 덕에 냄새나는 이웃과 싸우지 않고 함께 지낼 수 있으며, 무식한 법은 가까스로 권위를 지킨다. 바로 이것이 진실이다. 

…두번째 문법은 7장에서 참고하십시오

이와 같은 상징적 허구가 이웃과 마을을 형성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현실을 구성한다면, 상징적 거세라는 것은 나를 구성한다.

 

히스테리란…

⌈라캉이 “상징적 거세”라고 부른 것이 바로 즉각적인 심리적 정체성과 상징적 정체성(대타자 안에서 혹은 대타자에 대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내가 쓰고 있는 상징적 가면이나 타이틀) 사이의 간극이다. 그리고 남근은 이 상징적 거세의 기표다.⌋ 만약 상징적 거세라는 간극을 메우기 위하여 대두된 것이 남근(팔루스)이라면, 그것은 생식기관일 수는 없다. 남근은 기표이다. 그것은 상징물들로, 왕이 되기 위하여는 왕관과 왕좌로, 임원이라면 중역실과 명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외부의 부착물들이 바로 상징적 거세에 따른 잉여물이자, 남근이다. ⌈거세는 내가 상징적 질서에 포획되어 있다는 사실과 상징적 가면이나 타이틀을 받아들이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거세는 직접적인 존재로의 나와 나에게 어떤 지위나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적 타이틀 사이의 간극이다.⌋ 즉 나는 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아들이어야 하고, 아들과 딸의 아버지이며, 아내의 남편이자, 직장에서는 부장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마땅한 인격과 권위의 탈을 쓰고 억지로 연극을 해야 한다. 이것이 거세의 고통이다.

이러한 ⌈간극 때문에 주체는 결코 완전하게 자신의 상징적 가면이나 타이틀과 직접 동일화될 수 없다. 그의 상징적 타이틀에 대한 주체의 질문은 히스테리의 고유한 질문과 같다.⌋ 즉 주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와 자식으로서의 나, 아버지로서의 나, 남편으로서의 나, 직장인으로서의 나 사이에, 어디가 나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의 호명에 대하여 “왜 나는 네가 나라고 말하는 그 존재인가?”라고 물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히스테리는 주체가 자신의 상징적 동일성에 의문을 갖거나 그것을 불편하게 느낄 때 발생한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 부터 나를 보호하라”(Jenny Holzer)의 독법

  • 남성쇼비니스트 : 여성은 혼자 내버려두면 자기 파괴적인 광분(히스테리)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반드시 자애로운 남성 지배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여자들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내 속에 있는 과도한 자기 파괴적 욕망(히스테리)으로 부터 나를 보호하라”고 한다.
  • 이의 진상 :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의 욕망은 극단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들이 기대할 것을 욕망하며, 남자들에 의해 욕망받기를 욕망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 대안 : 내가 내 속에 있는 진정한 열망을 표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 내가 원하는 것은 이미 내가 원할 것을 알려주는 가부장적인 질서에 의해 부과된 것이다. (히스테리로 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기본조건은 욕망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고 자율적으로 욕망을 표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즉, 히스테리란 “왜 나는 (내가 아니고) 네가 나여야 한다고 말하는 그 존재여야 하는가?”하는 자기 실존에 대한 철학적 질문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