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은 도시의 랜드마크

지방을 전전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느 조그만 도시를 지나게 된다. 날은 이미 저물었다. 도시의 옆구리를 쑤시고 들어선 나는 제대로 된 도로와 이정표를 찾으려 했다. 두리번거리며 도로를 따라가자 갑자기 넓어지고 도로 한쪽으로 높은 건물이 늘어선다. 시청으로 가는 중앙통인데도 도로는 어둡기만 하다. 도로가 T자나 Y자로 갈라지는지, 도로의 끝에는 상아빛 불빛과 건물이 막아선다.

불빛이 막아선 곳은 24시간하는 사우나인지 찜질방이다. ‘비너스’라는 간판 아래로 상아빛 플라스틱 거푸집으로 만든 비너스의 부조가 젓가슴과 복부를 드러낸 자태로 서치라이트 앞에 서 있다. 낯선 도시의 어두운 밤 속에 밝게 드러난 비너스의 자태는 한 도시가 외설적이라는 것을 웅변하기에 충분했다.

도시의 중심부에 그 비너스상이 있어서는 안될 이유는 외설적인 탓이 아니라, 천박하다는 데 있다.

지나는 길에 얼핏 보긴 했지만, 비너스의 눈은 쌍꺼플 성형을 한 것 같고, 젖가슴은 약간 쳐지듯 봉긋한 것이 아니라 근육처럼 우뚝 융기했는데, 유두는 약간 바깥으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돌출되어 있다. 가슴에서 허리, 골반으로 내려가면서 36-24-36으로 굴곡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점차 넓어져 안정감을 높히는 동시에 시선을 음부 쪽으로 끌어당기는 ‘밀로의 비너스’ 특유의 비례를 답습하고 있지만, 비례는 어딘지 모르게 무너져 내리고 각은 흐려져 애매모호하다.

사우나탕에서 이 외설적인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비너스상의 천박성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조가 의도하려고 했던 그 외설성을 무화시키는 싸구려함과 유치찬란함으로 그 작은 도시를 함락시키고 있었다.

그 도시를 스쳐지난 이후, 도시의 이름도, 비너스상이 어느 곳에 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내가 지나쳐 온 무수한 도시의 어느 한 귀퉁이, 밤이 오면 말세가 둘러싼 도시의 한귀퉁이를 밝히고 있을 것이란 희망이 늘 내겐 있어 왔다. 생애의 어느 날 밤 다시 그 앞을 지나고, 그 통속성에 다시 한번 전율하기를 나는 줄곧 기대해 왔다.

그러다가 그저께 그 비너스상이 있는 곳을 마침내 알아내고야 말았다.

20110606

This Post Has 8 Comments

  1. 마가진

    여인님이 쓰신 소설인 줄 알았는데 사진을 보니 일상의 감상을 적으신 것 같습니다.
    다소 고단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자유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사진도 잘 보았습니다. 흐흐 ^^;;;

    1. 旅인

      제 글이 좀 오락가락하지요? 저 비너스상이 하남에 있을 줄은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주 먼 시골도시에 있었으리라 생각했는데, 거기가 바로 집 옆 도시일 줄이야…

  2. 원영­­

    저 비너스 상을 하남시 말고도 어디에선가 또 본 것만 같은데,
    제게도 풀어야할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여인님의 글은 읽기가 참 좋습니다.

    1. 旅인

      정말입니까? 아무래도 하남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보았으면서도, 저 비너스상이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하남에서 보았다고 착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 비너스상은 너무 커서 틀을 만들고 모양을 만들어 나가기가 매우 힘들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원영님의 글이 훨씬 좋습니다. 단정하면서도 힘이 있고…

  3. 위소보루

    자전거를 타고 가다보면 소소한 곳들이 눈에 들어와 좋습니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갈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들어오더라구요. 근데 자전거를 타다가 걸으면 또 더 소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와 무척 즐겁습니다. 느리게 가는 것이 왜 좋구나 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회비용을 항상 생각하곤 합니다. ^^;;

    1. 旅인

      전에 42번 국도인가 제한속도 이하로 속도를 낮추었을때 드디어 봄이 보이더군요.

      재촉받는 생활, 스피드가 선인 세상에서 잠깐 물러나 속도를 줄일 때, 산보와 같은 선물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스프린터로 자전거를 바꾸고 나니까 속력을 올리게 되는군요.

  4. firesuite

    예쁘지도 않으면서 길가에 대놓고 있으니, 조금 민망하네요.
    ‘마침내’ 라는 단어에서 노력이 느껴집니다. ^-^

    1. 旅인

      그런데 저 비너스상에 중독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니 말입니다.

      저런 건조물을 계속 찾아보고 싶습니다.

원영­­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