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함께

요즘 도덕경을 읽는다. 無의 철학을 연 왕필의 노자 읽기(老子王弼注)를 읽는다.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촉촉히 젖어오는 것 같다.

도덕경을 처음 읽었을 때는 고등학교 2학년 첫학기가 시작할 때 였다. 싯다르타 이상의 책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도덕경을 읽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도덕경은 이른바 내적인 평화와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지만, 시험이나 성적과 같은 제도와 인위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도덕경을 읽은 후 성적은 나빠졌을지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아주 늙은 사람인 노자가 쓴 도덕경을 지금보다 잘 이해했던 것 같다. “아이야! 너 이런 것 아느냐?”하고 노인은 물었다. 공부를 하기 보다, 도덕경의 한 구절을 읽고 산보를 하거나 아니면 강변으로 나가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미루나무가 까맣게 타들어가는 하늘에 가로 걸쳐진 붉은 노을의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안다고 하더라도 어린 가슴에는 무의미했다. 노을이 지는 늦여름 저녁은 찬란했고 그 풍경 속에서 계절은 여물어갔다.

그때 나의 나이 열일곱, 혹은 열여덟이었다. 왕필은 그 나이에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노자주(老子王弼注)를 달고 스물셋의 나이로 요절한다. 반면 노자는 160살 혹은 200살까지 살았을 것이라고 사마천은 열전에 썼다.

봉건 周나라의 종법체제가 무너지고 열국이 일어나 철기라는 신무기체제로 서로가 패권을 차지하려는 오랜 전란통을 겪으며 늙은 노자는 인간의 욕심과 어거지로 하는 것(인위)의 병통의 치유법으로 ‘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함'(無爲自然)에 따를 것을 권유한다.

젊은 왕필은 漢나라가 무너지고 위 촉 오 삼국의 백년전쟁의 와중에 태어난다. 이 전쟁을 삼국지처럼 재미있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처참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인구가 1/3로 줄어들었다. 세상이 무너지고 불에 타고, 백성들이 조석을 잃고 창칼을 피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어린 왕필은 노자의 도덕경에 주석(注)을 단다.

이 주석을 놓고 사람들은 “왕필이 노자에 주를 단 것인지 노자가 왕필에 주를 단 것인지 모르겠다’고 탄식한다. 도덕경이 총 5,200자에 왕필의 주는 11,800자로 그의 주석은 간결하다. 하지만 읽다보면 왕필의 글이 주석이라고 하기에는 한 문장같기도 하고, 때론 도덕경의 다른 구절로 원문을 보충하기도 하며, 때론 전통적인 주석의 방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왕필은 한대의 경학 즉 훈고학의 자구 해석적이고 번잡함에 대하여, “근본을 높혀 지엽적인 것을 그치게 하는데”(崇本末息), “무를 근본으로 하는”(以無爲本) 해석체계를 세운다. 그러면서도 “간소함으로 번잡함을 다스리는”(以簡御繁) 심법을 사용하는 데, 여기에서의 간소함 또한 無이다. 번잡함 즉 일체의 有를 無로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런 왕필의 주가 달린 노자의 도덕경을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예전에 도덕경을 읽을 때는 無에서 有가 나오는 시절 즉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이라는 시기였지만, 이제는 부생을 접고 허무로 돌아가는 시기에 접어든 셈이다.

다시 한번 도덕경을 천천히 읽으며 산보를 하거나 노을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참고> 왕필의 노자 (원전총서)

This Post Has 4 Comments

  1. 마가진

    요즘 저는 쥘베른의 해저2만리를 읽고 있습니다. 어릴 적 클로버문고이던가..? 청소년 용으로 나온 책을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는지라 완역본으로 나온 것이 있어서 구입해 읽고 있습니다.
    십대의 나이에 도덕경을 읽고 감동을 받으셨다니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점점 아메바수준이 되어 그냥 재미로 읽는 위주의 독서를 하는지라.. ^^;;

    1. 旅인

      마가진님의 말씀에 동의못합니다.^^ 저도 해저2만리를 청소년소설선집인가에 나온 것을 읽었지요. 줄베르느는 80일간의 세계일주와 이것을 어른들을 위하여 썼을 겁니다. 암굴왕의 원작인 몬테크리스토백작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완역본을 읽는 것이 전혀 늦는다고 볼 수가 없지요. 우리가 읽었던 것은 단순한 다이제스트판이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춘 각색판이었을 테니까요.

      또 도덕경을 어렵다고만 볼 것이 아니라, 예전에 서당에 다닐 때, 천자문 – 동몽선습 – 소학 – 사서 – 삼경 이렇게 배울텐데, 사서에 들어가는 수준이라면 충분히 도덕경을 소화해낼 수 있는 단계라고 보입니다.

      과거 이조시대에 비하여 깊이는 없을 지 모르지만 독서량을 감안한다면, 고등학교 시절 도덕경을 읽는 것이 결코 빠르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2. 원영­­

    책 읽는 걸 즐겨, 이것저것(이래봐야, 주로 소설, 산문류지만) 참 많이도 읽어대곤 했었는데,
    지금은 어찌된 영문인지 한가함에도 통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최근 몇년 사이 이런저런 일들로 가벼운 에세이를 주로 읽다보니, 그런가 싶기도 하고..
    책장에 무게가 실리면 한 장 넘기는 게 천근만근입니다.
    여인님 뵈며, 독서라는 것에 관한 무언가가 살짝 마음에서 움찔거리기는 합니다.^^;

    1. 旅인

      소설과 산문 등의 책이 때론 웬만한 인문학 책보다 더 낫다는 것을 최근에야 좀 알 것 같습니다. 팩트와 지식만 있는 책보다는 마음이 함께 하는 글이 읽기도 편하고 느낌이 좋지요. 저는 자꾸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게 됩니다.

원영­­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