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논 프라아티트의 며칠

자유란 짜오프라야 강변의 높게 솟은 벵갈나무의 짙은 그늘 아래 평상을 내어놓고 그 위에 앉아 몇일이고 강물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숨막히는 남국의 습기와 열기 속 일지라도, 살아가는 중에 며칠은 이렇게 잠잠한 강 가에서 새벽을 맞이하고 싶다.

아무런 이유는 없다. 강물을 바라보면, 자유란 철학스럽거나 보편스러운 것 따위와는 별개다. 강물의 흐름을 따라 아침의 싱그러움이 스며들었고, 열대 몬순의 시간이 지닌 넉넉함과 석양이 지면서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올 즈음엔, 턱을 괴고 강물을 바라보면 자유란 이런 것일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강은 끄룽텝 마하나콘, 즉 ‘천사의, 위대한, 영원한 보석의, 인드라 신의 난공불락의, 아홉 개의 고귀한 보석을 지닌 장대한 세계의 수도이자, 환생한 신이 다스리는 하늘 위에 있는 땅의 집을 닮은 왕궁으로 가득한 기쁨의 도시, 인드라가 점지하였고 비슈누카르마가 세운 도시’라는 무지막하게 긴 이름의 도시의 서쪽에서 서성이고 있다.

江은 흐르지 않고 신의 도시로 스며들었다가 빠져나간다. 짜오프라야 강으로 부터 도시로 스며들고 다시 짜오프라야로 합하는 강의 지류 틈의 마른 땅 위에 세워진 도시는 잔잔하게 낮고, 강물은 신의 도시를 언제라도 범람할 듯 찰랑거렸다.

강 건너편 삔까오 평야는 수풀들이 지평까지 낮게 포복하고 있지만, 저쪽 강안은 시선보다 높아보여 저쪽 강변의 강물이 자신 쪽으로 밀려드는 것 같다.

스몄다가 빠져나가는 강이라 하더라도 물이 빠져나가는 방향이 보인다. 강변에서 보면 아유타야 쪽으로 열려있는 상류 쪽의 강폭이 오히려 더 넓고 아득한 반면, 하류 쪽으로는 강심으로 고층건물이 밀려들어 강폭이 좁아짐에도 물살의 꼬이고 출렁대며 빠져나가는 힘의 방향은 뚜렷하게 감지됐다.

게다가 대여섯척 혹은 열척씩 고리를 지은 채 하류로 흘러내려가는 바지선들의 속도도 제법 빠른 것으로 보아 단지 강물 어디엔가는 흐름의 뼈와 마디가 있음이 틀림없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강 가에서 흘러내려가는 바지선을 보고 있으면 슬펐다. 연이어진 바지선의 고물에는 판자집들이 있다. 집들, 아니 선미마다 널린 빨래감들이 새벽의 박명 속에 펄럭이고, 엇댄 판자 사이로 상반신을 드러내놓고 양치질을 하는 사람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를 슬프게 하는 것은 바지선의 어느 판자집에서 새어나오는 밥짓는 연기였다.

밥짓는 연기가 왜 슬픈지 알 수 없다. 가슴 한켠에 가시지 않는 허기가 있는 것인지, 땅거미가 지는 춥고 고단한 들에 흩어지는 밥 짓는 연기를 보면, 슬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면 어둠이 맺혀가는 차가운 차창에 볼을 대고, 토해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간신히 삭혀내곤 했다. 그가 아는 자신의 삶으로부터는 퍼올릴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가뭇한 남의 생활을 바라보면 슬픔이나 외로움이 가슴에 저며왔다.

낮고 광활한 이곳의 새벽과 아침의 경계는 뚜렷하다. 지평선에 해가 뜨면 사원의 지붕은 황금빛으로 번쩍였고, 지평선으로 부터 시작하는 아침은 돌연히 밝는다.

아침이 오면 강물은 누렇게 빛이 났고 하늘은 파랬다. 때로 강변에서 새벽 낚시를 하던 사람이 자신의 다리 길이만큼 큰 생선을 잡아 아가미에 줄을 꿰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웃었다. 잇빨이 그을은 얼굴 속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다.

그때 짐을 부린 바지선들이 상류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짐을 만재하여 뱃전에 물이 찰랑대던 바지선과 달리 텅빈 바지선은 일이층 높이로 높다. 상류로 거슬러 가는 바지선들은 텅빈 함지박들이 물 위에 떠가는 것 같다.

때론 수상버스가 선착장에 멈춰섰고 출근하기 위하여 한두사람이 배에서 타고 내렸고, 혹은 카오산 로드로 가는 배낭을 맨 서양인이 내리기도 한다. 심심한 그는 손을 흔들어본다.

하루종일하고 몇일동안 강 가에서 그런 강을 바라보았다. 때론 밤과 새벽 사이에 깨어나 강 건너편 삔까오로 부터 뻗어나간 평원, 수풀들의 그림자가 까맣게 포복하고 있는 지평선 위의 성근 별빛을 바라보기도 한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은 강뚝에 와서 부딪는 잔물결일 것이다.

평원의 수풀 사이로 한두군데, 불면하는 자의 주변을 밝히던 등불마저 꺼져버리는 그 시간이면, 펄펄 끓던 남국의 공기마저도 식어 잠잠하다.

하늘의 별자리를 바라보며, 생애의 어느 한 시점에 이 곳으로 와서 이유없이 잠깨고, 어둠 속에서 있지도 않을 희망을 더듬어보지만, 절실하게 바란 것도 없을 뿐 아니라, 지나간 나날들 속에 절망하거나 애통할 것 또한 없고, 한번도 절실한 순간을 맞이하거나 세상에 대한 열광으로 살아오지도 못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비극이라는 것을 간신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슬프거나, 조금 더 삶에 대한 갈증을 느낄 수 있을 것이지만, 자신의 생을 결정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비틀거리던 생애의 어느 날이 자신을 이끌고 이 곳으로 왔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를 즈음, 새벽은 아침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유없이 짤린 수면을 보충하고자 다시 잠자리로 돌아간다. 침대 옆에는 어느 젊었던 작가의 책이 놓여있다. 너무 읽은 책. 너무 읽어서 내용보다 풍경과 냄새 그리고 거리의 열기 만 기억에 남아있는 책. 젊었던 작가가 썼다고 하지만,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들어서도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때때로 읽던 줄을 놓치기 일쑤였지만, 그의 글이 언제나 좋았다.

젊었을 때 그의 글 속에 깃든 절망을 읽고 우울해했지만, 그 절망이 어디에서 오는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짜오프라야 강변에서 읽는 그의 글에는 더 이상 절망은 보이지 않고 대신 생에 대한 들끓는 열광으로 꽉차 있을 뿐이다.

작가란 젊다고 해도 겉늙어 있는 법이다. 인생에 대하여 아는 척 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나마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다르다.

그에게 있어서 生이란 쌓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낌없이 써버리기 위한 것. 앞날에 대하여 일말의 희망을 갖지 않은 채, 뚜렷한 열정으로, 이유없이 유배온 이 황량한 적지에서 그는 매일 자신의 왕국을 맞이하고 있었다.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나 비루한 희망같은 것을 간직하지 아니한 탓에 절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세계를 뜨겁게 껴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진부한 이야기를 그는 썼다. 가난과 고통이 초라한 골목을 뒤덮고 있음에도 그것들이 살아갈 이유가 되었고, 빛과 늦은 오후의 미적지근한 열기가 다시 그 위를 뒤덮곤 했다.

그도 작가의 어느 글의 한 장면처럼 담배연기를 한모금 빨아들인 뒤 토해내며 발코니의 식은 철제난간에 턱을 걸친 채 식어가는 남국의 저녁을 맞이했다. 그러면 자신의 볼을 타고 스미는 난간의 서늘함과 짜오프라야 강을 타고 바다 쪽으로 흘러가는 내륙풍 이런 것이 뒤섞이며, 자신의 그을은 피부에도 세계의 진실을 반영한 얼룩자국이 새겨진 듯한 뿌듯함이 밀려오곤 했다.

그러면 숙소에서 내려가 뚝뚝이나 다니는 한가한 도로 건너편, 짜디짠 향내가 풍기는 타이국수를 사서 보도의 턱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후루룩 면발을 들이키곤 했다.

저녁이 도로 위에 내리기 시작했고 서쪽 지평선에 붉은 노을이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밤이 익어가는 풍경 저편에서 코끼리가 울거나 새들이 마지막 남은 빛을 향하여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강을 따라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d08071103

Phra Athit 선착장(080711)

註 보기…

방콕의 공식적인 이름. ‘Krung Thep Mahanakhon Amon Rattanakosin Mahinthara Yuthaya Mahadilok Phop Noppharat Ratchathani Burirom Udomratchaniwet Mahasathan Amon Phiman Awatan Sathit Sakkathattiya Witsanukam Prasit'(กรุงเทพมหานคร อมรรัตนโกสินทร์ มหินทรายุทธยา มหาดิลกภพ นพรัตนราชธานีบุรีรมย์ อุดมราชนิเวศน์มหาสถาน อมรพิมานอวตารสถิต สักกะทัตติยะวิษณุกรรมประสิทธิ์)이지만, 이 이름은 수도라는 의미의 krung 외에는 모두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로 부터 왔다고 한다. 태국인들조차 이 이름의 뜻을 잘모른다고 한다.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바꿔보면, ‘Krung-dēvamahānagara amararatanakosindra mahindrāyudhyā mahātilakabhava navaratanarājadhānī purīramya uttamarājanivēsana mahāsthāna amaravimāna avatārasthitya shakrasdattiya vishnukarmaprasiddhi’이다.

14 thoughts on “타논 프라아티트의 며칠

  1. 방콕에 가셨을 때 어느 문학작품을 떠올리신 것인가요?
    기억과 현실, 회상과 감상을 오고가는 듯 합니다. ^^;

  2.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갖지 않고 생을 아낌 없이 써버리는것.. 앙드레 지드가 떠올라요.
    열광적인 삶을 살고 싶어요!

    1. 지상의 양식이 아니라… 앙드레 지드의 집에서 한동안 기거했던 젊은 작가의 글입니다. 그리고 지상의 양식이 북아프리카의 기행에서 이루어진 글이라면, 이 작가의 글 또한 북아프리카의 어느 도시의 가난한 골목을 무대로 합니다.

      지상의 양식에서 풍요로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갈증이었는데 갈증없이는 지상에 넘치는 풍요로움도, 어느 마을에 솟아오르는 샘물의 감미로움도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 작가는 가난과 절망 속에서 조차 희망없이 갈증 그것 하나만으로 살아갈 수 있노라고 하는 젊은이입니다.

      그의 이름은 알베르, 까뮈입니다.

      http://yeeryu.com/172

  3. 남국의 후덥지근한 공기를 뒤집어 쓰고 강가에 서 있는 나무의 그늘에 앉아 하루종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결을 바라보는 기분은 어떨지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무엇을 느낄까 궁금해지네요.

    현상에 대해 파악하고 그 현상에 안주하려는 요즈음 무언가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을 느낀 적이 없어 그 갈증이, 그 불씨가 무척이나 높게 다가옵니다. 요새 간혹 나는 걸어가지 않고 서 있는 것은 아닌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1. 우리는 늘 변화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배웠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때론 멈춰서서 지내는 시간들도 필요할 지 모릅니다.

    2.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제가 요새 필립 판이 쓴 마오의 제국 (원제 Out of Mao`s shadow) 에서 다루는 천안문 사태에 대해 흥미롭게 보고 있어서 정체된 지금 모습이 싫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조나단 D.스펜서의 ‘천안문’을 읽던 대학 시절과는 또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새롭습니다.

      책을 읽고 있자니 문득 2006년 중국에 지낼때의 그 냄새가 강하게 후각을 자극했습니다.

    3. 자스민 혁명 이후의 중국의 소요사태 때문에 다시 읽으시는 모양이네요. 스펜서처럼 외부 사람과 판(아마 중국인?)처럼 중국사람이 보는 사태의 원인과 본질은 확실히 틀릴 것 같습니다.
      게다가 판의 스킴은 더욱 크고 말입니다.
      이 댓글을 보다 보니 위소보루님이 멈춰서 있다기 보다 멈춰서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 느낌도 자신이 어느 한 쪽 구석에 쳐박혀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런지 모르겠습니다.

  4. 이 책은 자스민 혁명을 알기 전에 공항에서 일본으로 넘어오는 마지막 출장에 샀던 책입니다. 어떻게 우연히 자스민 혁명과도 연결이 되어 비슷한 맥락에서 더욱 감정을 이입시켜 글을 일게 되는 계기가 더해지긴 했습니다.

    판은 중국계 미국인으로 2000년부터 7년간 북경에서 기자생활을 하였으니 그를 중국인이라고 보기는 좀 힘들 것 같습니다. 글 도중에도 인터뷰이가 외국 기자와 대담을 하는 걸 부담스러워 한다고 서술하기까지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스펜서와 틀린점은 그 역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던 중국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료를 뽑았기 때문에 여인님께서 말씀하신 사태의 원인과 본질을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는 느낌이 강합니다.

    멈춰서 있는 것과 멈춰서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차이는 흐르는 대로 놔두는 것이 좋은지 꽈악 움켜쥐어야 하는게 좋은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처럼 아직까진 저한텐 애매하네요 ㅠ.ㅠ

    그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1. 허허 그렇게 사건과 일치하는 수가 있네요.
      때론 내 자신이 앞서 달려가기 보다, 멈춰 서서 냉철한 시선으로 달려가는 것들을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또 앞서 달려갈 수도 있고요.

  5. 마침 저도 바지선을 봤던 기억이 있는데,
    글과 사진으로 다시보니, 뭔가 새로운 느낌이에요.
    범상치 않은 글이다, 싶었는데 까뮈의 글이었군요.. ^-^

    1. 짐을 부린 바지선을 예인선이 끌고 가는 모습은 우습고 헐렁해보입니다. 짐을 실은 바지선과 천양지차였죠.

      이 글은 저의 기행문이고, 여행 중 읽었던 책이 까뮈의 글입니다.^^

  6. 누군가의 생각이나 글이 한동안 자신의 이념이 되어 갈림길에서마다 지표가 되어주는 것처럼 그 가치를 공유하고 싶어 하시는 그 마음이 베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본문과는 상관이 없는 말 조금만 할께요. 여인님께 감사하다는 말 해야할 것 같아서요.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멀리하면서 인터넷은 멀리하지 않았던 제가 많이 부끄러웠어요. 활자에 대한 피로도가 괜히 커진 느낌이랄지.. 집중력이 퇴보하는 느낌이랄지… 이러다보니 책과 점점 멀어지는거 같았어요. 가장 큰 문제는 어휘력이요. 단어에 대한 기억력이나 활용도가 예전보다 정말 현저히 떨어졌어요. ㅠ.ㅠ 중간중간 아..나 이러다 바보되는거 아냐…하는 느낌이 들 만큼 말이에요. 인터넷의 찰나성에 길들다 보니 메모리가 굉장히 잘개 쪼개진 느낌이랄까요?
    여인님 덕분에 경각심 좀 갖고 다시 책 좀 잡겠다고 몇달 전 읽다 말은 책 다시 집었어요. 짧지만 글쓰기도 꾸준히 하구요. 고마운 맘 꼭 표현하고 싶었어요. 🙂

    1. 저도 그렇습니다. 유리알유희를 다시 한번 읽어보려고 샀으나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닐 뿐 읽을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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