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야스퍼스의 글의 번역에서…

아래에 두 글은 야스퍼스가 쓴 글의 번역 중 일부이다. 둘을 비교해보면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불타의 가르침, 용어, 사고방식, 행위에는 특히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다. 벌써 고행자가 있었고, 고행집단이 있었고 그리고 교단생활의 수행이 있었다. 숲 속에 은둔하는 자는 어느 계급 출신이든지 상관이 없었다. 그들의 유서(由緖)의 여하와는 관계없이 성자로 인정되었다. 대각(大覺)에 의한 해탈도 벌써 있었고 명상의 제 단계를 밟아가는 요가수행도 있었다.”

‘야스퍼스의 불교관’ 60쪽/ 정병조 역, 한국학술정보(주) 간

“석가의 교리, 전문 어휘, 사고 형태, 개념, 행위에서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금욕, 금욕적인 단체, 수도원의 생활방식은 오래전부터 인도에 존재해왔다. 숲 속의 은둔자들은 모든 계급에서 나왔고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존경을 받아왔다. 깨달음을 통한 해탈이라는 개념도 이미 요가의 명상 과정에 있었다.”

‘위대한 사상가들’ 81쪽/권영경 역, 책과 함께 간

이 두 글을 보면, 번역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학자나 문인들이 좋은 글과 이론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 나라의 석학들의 글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여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그것 이상이다. 특히 우리는 더욱 그렇다.

정씨의 글을 읽다보면, 번역에 앞서서 그가 국어조차 제대로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씨 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번역한 글을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읽는다면? 이해란 아예 물 건너가는 것이다.

권영경씨의 글은 지금의 어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쉽다. 또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번역을 해야겠다는 흔적을 주석에서 엿볼 수 있다.

정병조 역 권영경 역
불타의 가르침, 용어, 사고방식, 행위에는 특히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다. 석가의 교리, 전문 어휘, 사고 형태, 개념, 행위에서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벌써 고행자가 있었고, 고행집단이 있었고 그리고 교단생활의 수행이 있었다. 금욕, 금욕적인 단체, 수도원의 생활방식은 오래전부터 인도에 존재해왔다.
숲 속에 은둔하는 자는 어느 계급 출신이든지 상관이 없었다. 그들의 유서(由緖)의 여하와는 관계없이 성자로 인정되었다. 숲 속의 은둔자들은 모든 계급에서 나왔고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존경을 받아왔다.
대각(大覺)에 의한 해탈도 벌써 있었고 명상의 제 단계를 밟아가는 요가수행도 있었다. 깨달음을 통한 해탈이라는 개념도 이미 요가의 명상 과정에 있었다.

정씨의 번역은 중언부언하면서도, 유서라든지 대각이라는 이해할 수 없고 곰팡내나는 단어로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독자의 이해에 테러를 가한다. 마지막 문장은 두사람의 말이 완전히 다르다. 해탈(moksa)이라는 개념이 요가와 별개로 존재한다고 번역한 정씨보다 명상과정 속에 궁극의 목표로 자리잡고 있다고 풀이한 권씨의 번역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a. 잘못 번역된 경우의 문제점, 즉 정병조씨의 번역을 읽으며 느낀 점

  1. 문장이 거칠어서 읽기가 피로하다. 문맥을 자꾸 놓치게 된다.
  2. 앞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니 뒷문장 또한 이해가 안된다.
  3. 특히, 벌써 등의 부사가 글의 흐름을 방해한다. 없는 것이 났다.
  4. 유서라든가 대각 등의 단어로 독자들이 간신히 유지해오던 이해의 맥을 싹뚝 자른다.
  5. 짧고 간략하게 번역할 수 있는 글이, 무지 길고 지루하다.
  6. 이를 악물고 인내심으로 책을 읽게 만든다.

b. 이런 글이 끼치는 해악은 매국노와 역적에 준한다.

  1. 외국의 사상은 어렵다. 불교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선입견을 만든다.
  2.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야 함에도 시간 및 에너지를 낭비한다. 이는 국력을 낭비하는 일이다.
  3. 이해가 안되어 다른 책을 읽게 하는 만큼, 금전적으로도 낭비를 초래한다.
  4. 이해에 정력을 쏟게 함으로써, 새로운 아이디어 개발에 투여될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5. 글의 품질에 대한 인식을 실종시키고, 우리 글의 전반적인 품질저하를 초래한다.
  6. 책을 읽는 환경을 해치고 오히려 우리의 지적수준을 퇴행시키는 역할을 한다.

→ 이런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안읽는다고 큰소리 친다.

이 글을 접어놓고 우선 글을 번역한 두 사람의 인적 사항을 보자.

정병조씨는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영남대학교를 지나 동국대학교 불교철학의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동국대학교 부총장까지 지냈다. 이 책이 출간된 2004년 8월 당시에는 한국불교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이었다. 그러니까 불교와 함께 평생을 살아간 사람이다.

권영경씨는 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0년간 독일에 수학했다고 한다. 약력으로는 독문학을 했지만 불교와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서구의 지성인들의 관심이 되는 불교가 중국, 일본, 동남아 등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기독교에 밀리고 특히 대졸자 등 인텔리겐차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스님들이 무식하기 떄문이다. 지성을 단지 제도권 교육의 가방끈 길이로 폄하할 생각은 없다. 내가 무식하다는 것은 스님들이 학벌에서 뿐만 아니라 경전에서조차 무식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들이 신도에게 제공할 서비스가 부재하다는 이야기다. 중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백일기도 좌판이나 열고 점이나 쳐주고 하는 것이다. 때론 염불도 한다. 즉 그들도 정병조씨의 번역서를 읽어 소화해나가야 하는데, 저런 책으로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으니 설법인들 제대로 하겠으며 설법을 하면 듣는 사람 가슴에 와닿겠느냐는 것이다.

만약 조계종이 교판(敎相判釋)에 따라 주요 경전을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표준한역판을 만들고 그에 따라 각종 논서를 번역해나간다면, 과거의 교세를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 진짜 악랄한 번역의 예 : 서비스 전략의 7가지 비밀

This Post Has 4 Comments

  1. 마가진

    예전 어릴 때, 조르주시므농의 “노란개”라는 추리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청소년을 대상으로 쉽게 번역해 놓은 이유도 있겠지만 제가 참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입니다.
    아마 열 번도 넘게 읽었을 듯 합니다. 주인공 메그레경감의 팬이 되기도 했구요.^^

    근데 얼마전에 노란개와 더불어 시므농의 메그레경감이 나오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어느 남자의 목”이 책으로 나와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구입해서 읽었는데, 아유.. 지겨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상황연결이 안되고 글 또한 번역초안처럼 거칠어서… ㅡㅡ

    그 책에는 “노란개”도 같이 실려있어서 그것도 읽어보았는데 뭐랄까.. 두 소설 모두 문장 하나하나가 따로 논다는 느낌이랄까요.
    아마 “노란개”를 이 책부터 보았더라면 아마 지겨운 소설로 남았을런지도 모릅니다.
    그 때, 번역이라는게 제 2의 창작이라더니 정말 맞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기억이 납니다.^^;

    1. 旅인

      우리나라의 학계를 보면 뭔가 잘못된 것이 있는데, 자신이 뭔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학생이나 독자에게 선심쓰듯 준다고 생각하고, 책같은 것 써서 돈 안번다하는 사고, 번역이란 싸구려 작업이라는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런 사고들이 저런 책을 만들어내고 때론 외국책을 토막내서 몇사람에게 장당 얼마에 번역을 의뢰하고 그 난잡한 쓰레기들을 교정도 없이 스테풀러로 묶어 자기의 이름만 가져다 붙이고 책을 팔아먹는 나쁜 놈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불량 중 가장 큰 불량은 그 내용인데, 내용을 트집잡아 반품할 수 없고 단지 파본이나 그런 것으로만 반품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문제입니다.

  2. 위소보루

    이러니 여인님께서 경전을 읽고자 한문을 공부하셨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1. 旅인

      일본의 불교관련 서적이나 논어 등의 번역서는 아주 치밀하게 잘되어 있을 겁니다.
      번역이나 번안으로 국민을 계몽하고 발전한 나라인 만큼 저따위의 개판역은 없을 겁니다.
      특히 한문번역에 있어서는 권위는 일본의 번역을 참고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이니…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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