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가을이 문턱을 넘어오는 것 같아요

산문

저에게는 늘 늦게 찾아오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가을이 온 모양입니다.

오늘 눈부시게 햇빛은 밝았고
도로 위에는 은행잎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산문을 지나
자신의 나이를 먹으며 자라나는 오래된 은행나무를 바라봅니다.

산사의 풍경이 가을바람에 땡그렁 울려도
은행나무는 가을 햇볕 밑에 조는지 잎을 떨구기를 잊었습니다.

대신 햇살이 떨어져내릴 뿐이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비밀을 하나 알려드릴까요?

조안리의 강변을 따라 난 오래된 6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팔당댐 옆을 스쳐지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늘 막히는 길이었지만, 옆에 큰 도로가 새로 난 후에는 도로 위로는 심심한 햇빛만 뒹구는 신세가 되었지요.

오늘같이 볕이 맑은 날이며 도로 한쪽 구석에 멍석을 펴고 고추라도 널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팔당댐을 지나자 중앙선 철로가 놓인 이층 높이의 시멘트 축대가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습니다. 축대는 오래 전 증기기관차가 내뿜은 연기 탓인지 새카맣게 그을러 있습니다.

문득 보니 축대의 한쪽 구석에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목동에 사는 정순X야, ♡”

그 글 뿐이 아닙니다. 그을은 축대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글들은 누구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누가 사랑하는지는 알 수 없는, 주어가 없는 동사와 목적어만 있는 외짝 글이었습니다.

혹은 짝사랑하는 X혜가 이 한적한 도로를 지나가다 자신이 사랑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인지, “정O는 X혜를 사랑한다”는 글도 보입니다.

차마 말로 못하고 가슴 속에 여며두어야 했던 사랑하는 이름을 한적한 시골 도로 옆 축대에 몰래 몰래 써야만 했던 사람들의 울먹임이 이 가을에 제 가슴을 아련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렇게 살아있고 사랑한다는 그 말을 더듬거릴 수는 있지만…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것을 제 가슴이 기억하기에는 한참을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This Post Has 10 Comments

  1. 최근 들어 소위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라 칭할 만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자연을 파괴하면서까지 거대하게 세워지는 사찰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여인님의 사진과 글을 접하니 수종사라는 곳은 조금은 위안을 삼을 수도 있을 법한 산속에 있는 조용하고 고즈넉한 사찰같지 않을까 하네요. 🙂
    말씀처럼 가을입니다. 같은 은행나무라도 어떤 나무는 온통 노랗게 물들었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아직도 푸른 기가 더 많이 남아 있어 붉은 단풍잎과 어우러져 나무들은 지금 한창 색깔의 향연을 벌이고 있어요.
    쌉싸롬한 공기 냄새가 그 어떤 향기보다 기분을 좋게 해 주고, 문득 언젠가의 가을저녁이 어렴풋한 기억으로 살아납니다.
    가을 산행, 가을 여행…. 수많은 사람들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가을 나들이의 행렬을 보면서 저도 저의 가을나들이를 한번씩 추억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오랜만에 와서 여인님의 글과 사진으로 감상적이 된 듯 해요. 이름없는 가을의 저녁을 여전히 떠올리는 제 마음을 알 수가 없네요.

    1. 旅인

      사찰들이 자연경관을 파괴하면서 세워지는 것도 그러하지만, 몇백년된 사찰은 고건축물이기 때문에 고미술품 복원하듯 살살다뤄야 함에도 스님들 스스로 단청불사다 개보수다 증축이다 하며 파괴하는 것이 더 안타깝습니다.

      수종사는 양수리를 지나 북한강변 운길산 중턱에 있는 오래된 절이라 팔당호수가 눈 앞에 펼쳐집니다. 이 곳의 6백년된 은행나무를 찍으러 출사들도 오는 모양입니다.

      이 절은 두물머리에 있는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과 지근거리로 다산이 해남에서 해배되어 여유당으로 돌아왔을때, 제자인 초의선사가 다산을 보기 위하여 올 때 이곳에서 묵었던 모양입니다.

      절의 삼정헌이라는 곳에서 손님들에게 차 공양을 하고 있는데, 차를 얻어마시지 못하고 하산했습니다.

  2. 흰돌고래

    와 정말 가을느낌이 물~씬 나는 사진들이에요.

    ‘비밀’
    잘 보고 가요. 헤헤

    1. 旅인

      아직 남도에는 가을이 익기까지 아직 몇날의 햇볕이 필요한가보죠?

      평일날 하루를 쉬며 가을길을 둘러보니 햇볕이 너무 좋았습니다.

      비밀의 저 길은 한적하긴 해도 저의 집에서 십분 이십분이면 가는 길인데 그토록 많은 사연이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내일 그곳으로 가서 사연들을 전부 찍어 포스팅이나 해볼까 합니다.

  3. 마가진

    오래된 고택의 느낌이 물씬물씬 풍기네요.
    산사라 하심은 절인가 보네요.
    제가 모르는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 가을이 제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깊게 무르익고 있었군요.^^;

    1. 旅인

      저 고택은 경기도 능내에 있는 다산의 생가 <여유당>입니다.

      다산의 위로 8대가 옥당(홍문관 학사: 국립대학 교수)출신이라고, 저 집이 조선 최고의 명당이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병조참의를 지낸 5대조 정시윤이 저 곳으로 이사를 한 후, 다산의 고, 증, 조부 모두 벼슬 한자락 못했으며, 아버지 정재원이 과거없이 영조의 지시로 음사로 벼슬에 나가 진주목사까지 했지만, 이것이 자식들의 출사의 빌미가 되어 신유사옥으로 정약종이 죽고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죽고 막내 정약용 만 남는 등 멸문에 가까운 화를 당하니 그리 좋은 곳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여유당까지 한성에서 걸어가자면 하루나 이틀길이지만, 팔당댐이 놓이지 않았던 그때 지금의 용산 노들나루까지 뱃길로 한두시간이면 당도했던 것 같습니다.

      다산의 아들들과 친분이 있던 추사가 북청 유배 전 용산에 살던 때인가 아님 과천에 살 때, 양수리가는 배를 놓쳐 터덜터덜 돌아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4. IamHoya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먹먹하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주말만 되면 늘 숙취에 쓰러져있느라, 주말엔 조용하고 시원한 곳에 나들이를 다니면서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제 가슴이 기억하기에는 한참을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1. 旅인

      오늘 한번 나가볼까 했는데 그만 감기가 담뿍 들고 말았습니다.

      요즘에는 금요일에는 술을 안하고 목요일들 한다고 하던데… 술을 드셔도 양으로 즐기시지 말고 기분으로 즐기시길…

  5. 위소보루

    두번째 사진을 보곤 ‘아~수종사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행나무는 여전하네요 ^^
    오랜만에 보는 수종사의 고즈넉한 모습들은 참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다산 정약용 생가 근처의 능내는 제 기억 속에 아주 좋은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전 고등학교 시절 무심코 버스를 타고 나갔던 곳에서 나도 모르게 들어갔던 정원의 집 주인과 알게 되었고 아직도 연락을 하고 있거든요. 그곳은 예술가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여인님의 글을 읽고 있자니 사람들의 울먹임과 여인님의 담담함에 제 가슴이 요동질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불안정한 지금의 제 모습이 오버랩되서 그런 것일테죠. 이렇게 올해의 가을도 지나가나 봅니다 ㅎ

    아 저 내일 출국입니다. ^^; 드디어 가게 되었습니다 하하 잘 다녀오겠습니다. 물론 포스팅은 더 활발히 ㅋ 여인님도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1. 旅인

      올해 여름의 날씨에 고생을 많이 한듯 은행잎이 그저 노랗지만 않고 잎끝이 붉은 빛을 띄고 있어서 안타깝게 했습니다.

      햇볕이 아주 좋았습니다.

      아차 하는 사이에 감기가 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가시는군요.

      일본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위소보루님을 통해서 일본을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늘 몸조심하시고 먹는 것 잘 챙겨드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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