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동으로 부터 육조, 한성으로

어린 시절 부산에서 올라와 사대문 안, 그것도 바로 임금님이 사시던 법궁(경복궁) 옆에 살다보니 때때로 서울지도를 보다보면 흥미롭기도 하고, 내가 살았던 그 시기가 벌써 반세기가 다 되어간다는 생각에 미치면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나 싶기도 하다.

이웃분이 아버님의 본가이신듯 중학동을 묻길래, 수송국민학교를 다녔던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해주었으나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포스트를 올린다.

중학동은 수송동의 북쪽이며 지금의 동십자각의 동남쪽 대각선에 있는 곳이다. 중학동은 고려시대를 이어 조선조의 중등 관학인 4부학당(동·서·남·중) 중 중부학당이 있던 곳이다. 이 학당들은 각각 교수 2인 훈도 2인이 정원 백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양인 8세 이상이 입교할 수 있으며, 소학과 사서를 주로 배웠다. 15세에 승보시에 합격하면 성균관 유생이 될 수 있었다.

이 중학동의 서편으로 중학천이 흘렀고 다리가 있어서 중학다릿골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동십자각에서 안국동 로타리로 넘어가는 솔재(송현)에는 소나무가 많았고 동네가 다락처럼 깊숙하다고 하여 다락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도 이 곳은 참으로 조용하고 한가했다.

예전에 수송국민학교에 다닐 때 이 곳을 보면, 한옥과 적산양옥 등이 섞여 있었는데, 한옥은 북촌처럼 개량한옥이 아니라 연대가 좀더 올라가는 것 같았다.

이 중학동에서 중학천을 건너면 이조시대의 관부인 육조가 광화문 앞 좌우로 늘어서 있다.

육조의 위치

위의 육조거리 그림을 보면,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은 의정부 자리이며, 문광부와 미대사관은 예조, 이조와 호조, KT광화문지사는 한성부, 교보문고는 기로소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세종로(육조거리) 건너편에 있었던 삼군부와 중추부는 정부종합청사, 사헌부는 종합청사 별관으로 병조와 형조는 세종문화회관, 공조자리에는 잡다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관부의 위치는 늘상 바뀌는 것이어서 영조 때의 지도를 보면, 광화문의 좌측으로 議(의정부), 吏(이조), 漢(한성부), 戶(호조)로 늘어서 있고, 우측으로 禮(예조), 樞(중추원), 憲(사헌부), 兵(병조), 刑(형조), 工(공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서쪽 인왕산에서 지금의 자하문길과 도렴동길을 따라 흐르는 개울과 동쪽 북악산에서 대궐의 옆을 따라 흘러 운종가로 빠지는 중학천이 대궐 및 육조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로소 아래 지금의 비각이 있는데, 오른편으로 돌면 육의전이 있던 운종가가 시작된다.

이 그림은 대한제국의 아문(관아의 문으로 관청을 뜻함)들의 위치을 볼 수 있다.

경복궁 영추문 옆 의통방이 보인다. 이 의통방이 후일 통의동이 되고 나는 국민학교 내내 거기에서 살았다.

통상 대궐이 전조후침(前朝後寢)으로 앞쪽은 조정, 뒷쪽은 왕이 생활하는 공간인 내원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육조 등 관부가 대궐(조정) 안에 있는 것으로 알지만 대부분의 관부는 밖에 있다. 이 그림을 보면 궁에서 쓰는 미곡 ·포목 ·잡화 및 노비 등을 관리하고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內需寺) 마저 궐의 바깥에 있었다.(지금의 종로구 내수동 자리)

참고로 좌조우사(左祖右社:종묘사직)라고 법궁인 경복궁의 좌측에 종묘(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가 있고 우측으로는 사직(사직공원)이 벌려져 있다.

1979년 십이륙 당시, 채홍사(대통령의 여자를 안가에 배달하던 청와대의 의전과장 박선호)가 가수 심수봉과 모델 미스 신을 픽업했던 내자호텔 자리인 내자동은, 궁중에서 쓰는 여러 식품과 직조(織造) 및 궁중연회 등을 맡은 내자시(內資寺)가 있던 자리다.

그림에 의통방 옆에 매동이라고 있는데 이 동네는 1914년 창의동(창의궁), 서문동, 대동, 장동, 매동 등이 통의동으로 통합된다. 예전에 통의동은 흰소나무골(백송나무), 매짓골(매동), 띳골(대동) 등으로 불리웠다고 하며, 통의동 35번지가 창의궁 자리며, 7번지가 관상감 자리이자 김정희 생가터라고 한다. 이제 매동이라는 이름은 사직공원 위 필운동의 매동초등학교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어렸을 적 동네 친구들은 대부분이 매동을 다녔는데, 우리 집만 수송을 다녔다.

이 매동 옆에 금천교가 보이는데, 지금 경복궁역 2번 출구 옆의 재래시장이 바로 금천교시장이다. 사람들이 통인시장, 적선시장이라고 하나 통인시장은 북쪽 통인동 쪽에 있으며, 적선시장은 없다.

적선방이 경복궁의 서남쪽 모서리에 보이는데, “착한 일을 쌓는 집 안에 반드시 경사스런 일이 넘치리라”(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주역 곤괘 문언전에서 나온 명칭이다. 하지만 그 뒷구절이 살벌하다. “착하지 아니한 일을 저지르는 집 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넘칠 것이니, 신하가 임금을 쥑이고, 자식이 애비를 쥑이는 일은 하루 아침 저녁 나절의 일 때문이 아니다. 그 유래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일은 애초에는 시비꺼리조차 못된다.”(積不善之家 必有餘殃 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漸矣 由辯之不早辯也)라고 되어 있다. 왕실이 스스로 경계하라는 뜻으로 주역의 곤괘의 방향, 즉 경복궁의 서남방에 적선방이라는 동네를 두었을지도 모른다. 아님 말고.

그러니까 박정희가 김재규한테 총 맞아 죽은 것(臣弑其君)은 못된 짓을 많이 했기(積不善) 때문이라고 내자동(내자호텔) 옆의 적선동은 경고하고 있다.

이 그림에도 중학동의 자리가 보인다.

통의동 주변

위의 그림은 영조 때의 지도라고 한다. 왜란 시 소손된 경복궁이 중건이 안되어 전각이 몇채 안되고 나무가 우거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도 내가 살던 통의동은 의통방으로 되어 있다. 당시 한성은 5부 52방으로 되어 있었는데, 동부 12방, 서부 11방, 남부 11방, 중부 8방, 북부 10방이다. 의통방은 북부 10방 중의 하나로 광화방, 양덕방, 준수방, 가회방, 안국방 등 지금의 북촌과 서촌이라고 부르는 곳이 포함된다. 이 의통방은 1894년 갑오개혁 때 5부가 5서로 바뀌면서 동네 이름이 통의방으로 바뀌고 지금에 이른다. 중학방은 중부에 속한다.

통의동 7번지에 사재감터(그림의 점선으로된 원 안)가 있었다고 하는데, 궁궐에 어류·고기·소금·땔나무, 횃불(싸리나무로 만듦) 등을 공급하던 관청이다. 후일 이 부근에 매동소학교가 들어섰다가 사직공원 위로 이전했다는 것으로 보아 매동은 틍의동의 일부였던 것 같다.

우리집은 통의동에서 백송나무가 있는 곳 근처였는데, 그 자리는 영조의 사위이자,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의 집터(서울 장동)라고 유추할 수도 있다. 영조가 이뻐한 둘째딸 화순옹주와 사위가 살던 이 집 앞에 백송나무를 심어주었다고 한다. 백송이 자라는 것이 몹씨 더딘 것을 감안하여 수령이 이미 2~3백년 된 것을 이식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1993년 죽은 백송나무는 수령이 600살을 넘었다고 하니까 말이다.

이 백송나무는 때때로 허물을 벗었는데 수피가 몹시 얇고 하얗다. 껍질이 벗어진 자리에 회색 얼룩이 져서 백피송 혹은 호피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사진을 보면 예산 추사고택의 백송처럼 높이 자랐는데, 내가 어렸을 적에 본 백송나무는 늙고 힘이 없는 관계로 나무둥치는 갈라지고 옆으로 넓게 퍼져 있었고 솔잎도 듬성듬성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백송이 늙어죽는 것이 아닐까 걱정을 하곤 했다.

월성위와 화순옹주는 자손을 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기에 추사의 할아버지 김이주가 월성위의 양자가 되고, 추사는 다시 손이 없이 죽은 큰 아버지 김노영의 양자가 되어 월성위의 증손이자 봉사손이 되어 어렸을 적부터 이 월성위궁에서 경화거족으로 자라났다.

의통방에서 조금 내려가면 창의궁(彰義宮)이 있는데, 여기는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머물던 잠저이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경조 5부(거의 지금의 서울)를 다 말할 수는 없고 사대문안을 잠시 보고 가자. 이 그림은 고산자의 여지도 중 도성도(한양지도)인 것 같다.

사대문은 흥인지문(동) 돈의문(서) 숭례문(남) 숙정문(북)
사소문은 혜화문(동소문), 광희문(시구문), 소의문(서소문), 창의문(자하문)

이 중 광희문과 소의문은 시체를 옮길 수 있는 문이다. 광희문의 별칭은 시구문(屍口門:시체가 나가는 문)으로 도성 내 시신은 이 문을 통하여 나가 망우리 등의 언덕에 묻혔다고 한다. 서소문을 지나 조금가면 아현고개가 나오는데, 아현(阿峴)은 아이현(阿耳峴)의 축자이며, 우리 말로는 애오개 즉 아이고개다. 영아사망율이 높은 당시라 그런지 애오개 고개마루, 신촌 와우산 등에 아이들을 묻었다고 한다.

도성의 문들은 저녁 10시경에 28번 종을 친 후 닫고, 새벽 4시경(인경)에 종을 33번 타종한 뒤, 문을 열어 사람들이 통행을 할 수 있었으나, 숙정문과 창의문 등 북문은 지맥이 상서롭지 못하고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하여 문을 닫아걸고 통행을 금지했다. 인조반정 시에는 홍제원(홍제동)에서 반군이 집결, 창의문을 열고 창덕궁을 범궐한다. 상서롭지 않은 문을 열고 정권을 찬탈한 탓인지 그 후 오랑캐들이 이 강토를 유린했고 그는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다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세번 절하고 대가리를 아홉번 땅에 쳐박는) 신하의 예를 올린다.

내가 어렸을 적엔 지금의 부암동이나 흥선대원군의 별서인 석파정, 세검정 일대를 자하문(창의문) 밖이라고 잠박이라고 불렀고 잠박엔 앵두가 유명했다.

이들 북문은 오행에서 물(水)을 뜻하는 까닭에 숙정문과 창의문에서 왕이 기우제를 지낸 기록을 볼 수 있다. 반면 비가 많이 올 경우 임금께서 남대문인 숭례문까지 몸소 나서 기청제를 올렸다.

청계천의 시발은 인왕산 북부 창의문 옆 백운동(현 청운동)에서 흘러내린 개울에 옥류동(현 옥인동)의 개울이 합류하여 남행하다 서쪽으로 흘러갈 즈음에, 북악산 옆 숙정문 아래에서 흘러내린 개울은 삼청동을 지나 십자교, 중학교, 혜정교 밑을 지나 모전교에서 청계천에 합류한다. 목멱산(남산)의 개울은 회현방에서 시작하여 몇개의 개울과 뒤섞이면서 광통교 앞에서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 흥인지문(동대문)과 수구문 사이에 있는 오간수문으로 빠져나가 인창방을 지나 사근동(한양대 부근) 살곶이다리를 지나 중랑천과 합류한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산 곳이 사근동이니까 청계천 끄트머리에 산 셈이다.

조금더 말하자면, 경복궁의 서북쪽의 선희궁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사당이다. 선희궁의 동북쪽 북악산 아래에 육상궁이 있다. 이곳이 바로 영조의 어머니 동이(숙빈 최씨)를 봉사한 묘이다. 이 묘는 숙빈묘, 육상묘, 육상궁으로 승격된다. 이 육상궁에 왕을 낳았지만 왕비가 못된 후궁 6분의 위패를 더 모심으로써 칠궁(七宮)이 된다.

북한산에서 발원하고 있는 지금의 홍제천은 당시에는 모래내(沙川)라고 불리웠던 모양이다. 모래가 많아 개울이 모래 밑으로 흐른다고 모래내라고 했는데, 이 하천은 홍지동, 홍제동, 가좌동을 거쳐 망원동과 난지도 사이를 지나 한강 하구에 합한다. 홍제천이라고 불리우게 된 것은 중국의 사신과 관리들이 머물던 홍제원이 모래내의 유역에 있다고 홍제원천으로 불리다가 홍제천이 되었다.

조선 때까지 모래내라고 부르던 개천명이 홍제천이 된 것은 일제가 우리가 중국과 조공무역을 했으며 주체적이지 못하고 사대주의를 했다는 것을 은연 중에 심어주기 위하여 홍제원을 들먹인 것 아닌가 싶다.

이 홍제원에서 무악재를 넘으면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이 있었는데, 이 자리를 허물고 독립문을 세웠다. 그리고 영은문 뒤에 짱꼴라 전용 호텔 모화관이라는 것을 지었는데, 이름이 드럽다. 이 또한 독립협회 사무실로 쓰이다가 사라져버렸다.

This Post Has 16 Comments

  1. 플로라

    떠가고 싶은 글이네요^^
    아버지 친구들이 다 수송국민학교 동창인데, 이제 여러분이 돌아가셨네요..
    지금 새로짓는 빌딩에 붙어있는 기와집이일 것 같아요. 그 집이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굉장히 오래 전에 가족들이 경복궁에 갔었다가 아버지 고향이라고 길건너 동네엘 갔던 적이 있어요. 중앙청 담을 들락거리며 놀던 이야기, 개천이야기도 하셨던 거 같구요, 4.19때 이야기도 하셨네요. 그 이상의 이야기는 저희 어머니를 통해 들게 되네요. 제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주 오랜 후라서요. 원래는 양주군이 본적지고 몇 대조 전에는 여주였죠. 본관지역이니까요. 할아버지 때 친척이 있는 중학동으로 왔다 들었어요. 토토로를 너무 재미있게 보시면서 다다미 이야기를 하셨으니, 아마도 적산가옥에 사셨나봐요. 그것도 알아봐야겠군요^^ 도로 확장하면서 다른 동네로 이사하게 되었으니, 저에겐 중학동은 기억에 없는 곳이지만, 단 한번 가족과의 방문덕에 깊이 새겨진 동네죠. 아버지 안계시고 옛 수송국민학교 자리에도 가봤구요. 필운동에서 조계사 거쳐 인사동은 어린 시절 데이트코스이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저 글들이 눈에 쏙 들어옵니다^^

    1. 旅인

      떠가고 싶으시다면 네이버로 옮겨놓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림들이네요.

      아버님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께서 1961년부터 수송에서 교편을 잡으셨습니다. 그 당시에 수송을 다니시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삼청동에서 경복궁 담을 따라 흐르는 개울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있습니다.

      저도 중앙청 담의 기둥 사이로 들락거리곤 했는데,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머리가 커져서 들락거리질 못하게 되더군요. 중앙청 소사(그때는 경비를 소사라고 했지요)에게 걸려 야단도 맞고 했습니다.

  2. 플로라

    39년 생이십니다^^

    1. 旅인

      그러시면 광복하자마자 수송에 들어가셨겠네요. 그리고 6.25, 4.19, 5.16… 난리란 난리는 다 겪으셨겠네요?

  3. 플로라

    6.25때는 장남이라 피난보낸 것이 오히려 북쪽(양주)으로 가셨으니, 중앙청앞이 더 리얼했는지, 황마름이 더 리얼했는지 알 수가 없네요. 그걸 기억하실 분도 안계시고…이런 궁금함도 5,6년 전 쯤부터 시작된 것이니, 이제는 알수 있는 방법이 없네요^^ 당시의 서울, 그것도 중심부에서 일어난 부역과 관계된 일들, 저도 궁금하긴 한데, 알 방법이 없네요. 피난가선 나무하러가셨다가 푹격할 때 엎드리셨는데, 옆의 친구가 죽어ㅆ다는 이야기 정도 들었구요. 중학동을 떠난 것이 그 동네 길을 확장하면서 집이 길로 들어가서였으니, 그게 몇 년도일지 모르겠어요. 어째거나 저의 출생지는 그래서 동대문구가 되었답니다.

    1. 旅인

      황마름이라면 동두천이 아닌가요? 어쩌면 남쪽으로 피난간 것보다 훨씬 나았을지 모르겠습니다. 남쪽은 불길이 흘러가는 방향이고 북쪽은 이미 불이 나고 다 타버린 방향이니…

      중앙청 앞에 계셨다면 아무리 11살, 12살이라서 부역이니 그런 것은 없었겠지만, 먹을 것 잘 곳 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4. 플로라

    양주시였다가 동두천시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지요. 언제 서울로 돌아오셨는지, 서울에 남아계시지 않았을까 싶은 할머니할아버지와 고모들은 어찌사셨는지 아는바가 없답니다. 박완서의초기 책에 이시절 서울과 좌익이던 오빠의 이야기가 나와요. 산언덕에 올라서 바라보면 모든 종류의 군대가 다 지나가던 길목이던 곳이었나 봅니다. 제가 사는 이곳도 그런 곳이라 그 루트를 알아보려고하는데, 자료로 실려있는 군사작전지도를 볼 줄을 몰라서 추정할수가 없더군요…

    1. 旅인

      양주 황마름이 어딘가 했습니다. 양주하면 워낙 넓어서… 써놓으신 글을 읽어보아도 황마름이 어디인지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네이버로 찾아보니 동두천으로 되어 있고 제 외할아버지께서 교장으로 계신던 동두천여상(지금 동두천여중 자리)에서 소요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있는 곳이네요.

      어릴 적 길에 나오면 양키들의 찝차가 왔다리 갔다리 했지요. 늘 짜식들은 한쪽 다리를 본네트 위에 걸쳐놓고 껌을 씹어대며 도로가에 있는 저를 보고 씽긋 웃거나 윙크를 해대곤 했죠.

  5. 플로라

    제 글중에 황마름 할아버지 이야기가 있어요, 지난 추석때 가보고 쓴 이야기예요^^

    1. 旅인

      저는 박완서씨가 오빠에게 동조하는 식의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등단했던 70년대에는 오빠를 변호하기보다 자신은 보수라며 우익이라며 오빠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겁니다.

      과연 우리나라에 좌익이 있었을까요? 친일파들이 자신들에게 향한 눈을 돌리기 위하여 미군정을 향하여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며 “저들은 좌익이다.”한 것이고, 그것이 서로 아껴야할 사람들을 갈라서게 한 것이죠. “저들이 전라도다”라고 함으로써 호남과 영남이 갈라서게 된 것처럼 말이죠.

      몹시 우울한 담론 속에서 갇혀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밥그릇이 옳지 이념이 옳지는 않을 겁니다.

  6. 플로라

    황마름이 생연동인데, 거기에는 지금까지 세번 가봤구요, 주로 지금은 동두천중앙역이 된 어수동역에서 내려 걸어서 동두천문화회관근처에 있던 산소엘 갔지요.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이나 외곽에 있기 때문에 동두천이 미군부대가 있느 ㄴ곳인 줄은 몰랐어요. 언젠가 아마 중학교때? 대로를 지나가면서 영어간판으로 쓰인 가게들과 군인들을 보고 여기가 어디야? 했더 ㄴ기억이 있네요. 생연동에서 상패동으로 들어가는 외곽도로에 지금도 부대와 영어간판의 가게들이 모여있는 것 같더군요. 그때와는 달리 많이 쇠락해 보였구요. 아이구…MBC뉴스에 나오는군요^^

    1. 旅인

      동두천이 워낙 기지촌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외가가 동두천이라고 할 수도 없었지요.
      부산 화명동의 전답을 팔고 외할아버지께서 동두천으로 올라오시자 마자 고등학교에 다니던 막내이모는 서울 큰외삼촌집에 보냈고 방학 때가 되어 동두천에 가도 시내에는 못가게 해서 막내이모는 동두천 시내가 어떻게 생긴 줄 조차 모를 정도입니다. 저도 외가에 가긴 하여도 시내구경은 딱 한번 밖에 못했습니다.

  7. 마가진

    이렇게 서울의 옛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계시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1. 旅인

      통의동, 광화문통은 만 세살에 서울로 올라온 까닭에 제게는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자연 많이 알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재미있는 지도도 얻은 김에 인터넷 검색도 하고 해서 쓴 것입니다.

  8. 토종감자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는 어른이 홍제천쪽 사시는데, 늘 모래내라고 부르시거든요.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게 옛이름이었군요. ^^

    1. 旅인

      아직도 모래내라고 불리는 지명이 많습니다. 가좌역 부근의 모래내시장 등이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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