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측정

광화문

ⓐ 일제에 의해 경복궁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져 있던 광화문은 6.25 때 소실된다. 1968.3.15일 기공식을 갖고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1968.12.11일에 완공된다.(금년 8.15일에 다시 복원한 광화문은 철근 콘크리트는 아니겠지?) → 나무의 잎들을 볼 때, 광화문이 완공된 1969년 봄 이후 일 것 같다.

ⓑ 정부종합청사는 1967.07.29일 착공하여 1970.12.11일 완공된다.(광화문 복원의 졸속에 비하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종합청사부지 내에 공사를 위한 가건물들이 있는 것으로 보면 아직도 건설 중인 것으로 보인다. → 1970.12월 이전이라고 추정할 수 있으나, 사진 상으로는 확실하지 않다.

ⓒ 현 세종문화회관인 시민회관에서는 1972.12.02일 MBC 개국 11주년 기념, 10대가수 시상식 겸 남녀가수청백전이 열린다. 공연이 끝날 즈음, 이층 조명장치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하고 만다.(사망 51명, 부상 76명) 불탄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란 것을 1974년에 착공, 1978년에 준공한다.  하지만 나는 시민회관이 좋다. 시민회관 때는 가정부를 하는 처녀와 청계천에서 고생하는 청년들을 위해서 남진과 나훈아가 노래대결을 벌였고, 서민을 위하여 값싼 공연이 많았고, 어린이를 위하여 영화를 저렴하게 상영했다. 하지만 세종문화회관으로 바뀌면서 서민과 어울리지 않는 문화공간이 되어버렸다. → 시민회관 건물이 보이는 것으로 볼 때, 이 사진은 1972.12월 이전인 것이 틀림없다.

ⓓ 이 건물이 있는 자리는 이제는 정부종합청사별관 앞의 주차장 자리로 바뀌었다. 1966년인가 67년 이 건물을 짓기 위하여 지하를 파고 있었는데, 폭우로 세종로일대가 무릎 높이로 잠겼고 건물의 지하도 침수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지하를 파면서도 울타리나 방호물이 없는 관계(당시 사람목숨이나 파리목슴이나 태어나고 죽는다는 면에서 다를 것이 없는 때였다)로 첨벙첨벙 물살을 가르며 집으로 가다가 그만 지하 웅덩이에 첨벙 빠지고야 말았다. 어른 한분이 머리꼭지를 보고 건져주지 않았다면 익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 건물은 내가 물에 빠진 이후인 1967년 혹은 1968년에 완공되었을 것이다. → 이 건물은 년대 측정에 별다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 충무공 동상은 1968.04.27일 건립되었다. 그러니 광화문이라는 년대 정보에 더해 줄 정보는 없는 셈이다. 벌써 42년 동안 저 곳에 서 있었던 관계로 올해 종합검진 겸 잠깐 휴식을 갖는단다.

ⓕ 예전에 이쪽 차선으로 전차가 다녔다. 전차는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안국동 쪽으로 갔고 좌회전하여 경복궁의 담벼락을 타고 궁정동까지 다녔다. 누나는 경복궁 영추문 앞에서 전차를 타고서 서울역을 지나 용산을 거쳐 원효로에 있는 학교(성심여중고)를 다녔다. 기록 상에는 1968.11.30일부로 시내의 전차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다고 하지만, 이 세종로를 지나는 전차는 그 이전에 운행이 중단되고 철거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전차선로가 없다는 것 또한 사진의 연대측정에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는 것이 없다.

이 사진은 1969년 봄에서 1970년 가을 사이인 것 같은데, 길게 잡자면 1972년 가을까지이다.

가: 저 건물은 국제전신전화국인가 하는 곳이었다. 나는 미대사관과 저 건물 사이로 학교를 다녔는데, 저 건물에 사람들이 드나들거나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잿빛건물은 음산했다. 하지만 이 곳에서 건널목도 없는 넓은 대로를 가로지르기에는 시민회관까지 까마득히 멀었다. 그래서 이 곳에서 잠시 쉬곤했는데, 그때 학교에서 몰래 가져온 백묵으로 건물의 한쪽 구석에 무엇인가 썼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KT박물관으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

나: 옆의 하얀 건물이 동아일보 건물이다. 당시만 해도 동아일보가 시대의 양심이자 정론지인줄 알았다. 저 소방소의 탑과 같이 생긴 것은 지금 청계천 시발점 건너에 있던 소방서가 맞을 것이다. 비각에서 건널목을 건너면 사람들이 신문사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들은 신문사벽 철망 안에 게시된 당일자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들에게 넘치는 것은 시간이었지만, 신문 한부 사 볼 돈조차 없이 그들은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다: 국회의사당(일제시대의 부민관, 즉 경성부민회관)이다. 그때의 국회가 여의도 1번지로 이사간 국회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의도로 이사가고 난 후엔 공회당 비슷하게 썼는데, 때론 연극을 하거나 승공응변대회, 때론 이곳을 빌려서 학예회같은 것도 한 것 같다. 이 건물 바로 뒤가 성공회이다.

이 사진을 보면서 시간을 가늠하다보니, 1968년이라는 시간이 지금의 서울과 우리나라의 현재의 모습을 틀 지우는 중요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박정희 재선 2년차, 삼선개헌 준비 시작, 경부고속도로 착공, 경인고속도로 완공,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2년차, 한일국교정상화(1965년)를 통한 차관도입, 월남파병(1964년)을 통한 미국으로 부터의 신인도 확보 등의 난제를 해결하고 경제개발 및 독재의 기반을 다진 해이기 때문일지 모르나, 이 해는 모든 금지된 것을 금지한다는 불란서의 5월 혁명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This Post Has 5 Comments

  1. 플로라

    이 사진을 보고 아버지께서 살던 동네를 찾아봤어요. 여러번 들었는데도 자꾸 잊어버리던 동네이름이 중학동인가 봅니다^^ 몇 달전 그 앞을 지나다보니 거대한 빌딩이 들어서던데, 그 동네에 있던 큰기와집이 지금도 남아있는가 모르겠어요.
    저 사진은 어디서 난 것인데 연도 추적을 하고 계신가요?

    1. 旅인

      중학동이면 참 좋은 곳에 사셨네요. 제가 지금은 종로구청인 된 수송국민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조금은 아는데, 중학동은 동십자각 건너편 에전 한국일보 건물과 그 아랫편이며 수송동의 윗편이 되지요. 중학동의 고려 조선조의 4부학당 중 중부학당 자리로 여기에서 소학과 사서를 가르켰다고 합니다. 15세가 되면 무슨 시험인가를 쳐서 성균관에 입학을 했다고 하는 만큼 터가 좋은 곳이지요.
      제가 그 곳에 살던 때만 하여도 한옥과 개량식 양옥이 섞여있었던 곳으로 지금처럼 대림산업 빌딩이나 리마빌딩이니 하는 그런 큰 건물이 없었습니다. 대체적으로 북촌한옥보다 큰 기와집들이 있기는 했지만 아주 크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어린 제가 본 것은 워낙 지엽적이어서 …

      요즘 지난 사진을 보는 재미를 좀 즐기고 있습니다.

  2. 마가진

    서울의 역사의 한 편을 확인하게 되네요.^^
    시민회관과 세종문화회관에는 그러한 일들도 있었군요.

    1. 旅인

      세종로, 태평로, 종로 2가, 인사동 등은 1971년까지 제 나와바리였고 그 이후로도 잘 알고 있다보니…
      지금 동화면세점이 된 국제극장 앞에 분수대가 철거되고 광화문 사거리 지하도가 만들어진 것도, 충무공 동상이 세워진 것도(당시 친일파가 동상을 만들어 칼을 거꾸로 잡고 있다는 말이 있었지요) 다 보았습니다.

  3. 旅인

    이 사진은 1969.6.26일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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