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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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포스터에는 “사랑이냐? 허영이냐? 운명의 기로에 서서 방황하는 아내의 성도덕의…” (그 다음 글자는 포스터의 모퉁이가 찢어져서 알 수 없다)라고 쓰여있지만, 다른 포스터에는, “당신이 장태연교수라면 과실을 범한 아내에 대해서 어떻한 결정을 지으시겠읍니까?”라고 무성영화 시대에 변사가 극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읇던 “사랑에 죽고 돈에 울던 거시었던 거시었다.”식의 글귀가 있다.

1956년에 제작된 영화라는 것에 놀랐다. 1956년이라면 전란의 끝에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고, 이승만 말기 독재의 칼날은 서슬퍼렇고, 식민지 시대보다 희망이라는 것은 더 없던 시절이었다.

1956년은 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하지만 영화의 장면들은 당시의 상류층에 포커스를 맞춘 것인지 몰라도, 내가 보았던 1960년대 중반의 사대문 안보다 호화롭고 번화하다.

정비석의 값싼 신문연재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이제보면 아무런 교훈도 없다. 국한문 혼용시대라 그럴듯해보이기 위해서는 토씨빼고는 몽땅 한문인 포스터에 쓰인 과실이란 단어는 간통 혹은 불륜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영화에서 아내 오선영(신인인 김정림 분)은 호텔방까지만 가고 들통이 나는 바람에 간통 미수에 그친다. 그러니까 그저 그렇고 그런 영화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주목하게 되는 것은 자료적 가치이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중반까지의 서울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자료적 가치가 있다.

1. 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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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 북촌한옥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집들이 나온다. 지금의 삼청동일수도 있고 누상동,옥인동 등 서촌일수도 있다. 내가 주목하는 장면은 집보다는 대문 앞에 놓인 다리와 다리 밑을 흐르는 개울들이다.

개천은 내를 파낸다(開川)라는 뜻으로 조선조 태종 때부터 불리어 온 청계천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청계천은 일제강점기 이후 그렇게 불리웠다고 한다)

서울 경계 안에 있는 (지류를 제외한) 하천은 모두 35개이며, 총연장이 229.7Km라고 한다. 지류까지 포함한다면 좁아터진 서울 안에 거미줄처럼 개울이 흐르는 셈이다. 산업화와 함께 작은 하천들은 상당수 복개되었다. 강북지역의 경우 북악과 남산에서 흘러 내리던 청계천의 크고 작은 지류 14개 이상이 모두 복개되어 지금은 그 자취조차 파악할 수 없다. 이 말처럼 내가 어렸을 적에는 시내 곳곳에 개울이 흘렀다. 보기 좋았지만,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개울물은 시커멓게 변했고 쓰레기 더미들이 떠다녔다. 그 개울들이 콘크리트로 복개가 되고, 도로가 되었으며 결국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하얗게 지워져 버렸다.

이제 복개된 내를 다시 여는(開川) 개천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 집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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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집은 한 몇칸이나 될까? 영화 속의 이불장은 자개가 잘 살아있고, 옆은 오동나무로 잘짠 장이다. 앉은뱅이 책상과 도자기, 게다가 놋쇠화로 등은 지금 구하려면 돈이 얼마나 들어갈까?

남편이 대학교수니까 제법 살 것이겠지만, 아내가 치맛바람이 든 바람에 별로 분위기는 좋아보이지 않는다.

3. 뷰띠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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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tique, 이런 단어를 보면 뭐라고 발음을 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부티크? 뷰띠끄? 하지만 그 의미는 양품점이라고 한다. 양품점이란 또 값비싼 옷이나 선물을 파는 가게라고 한다. 참으로 어렵다.

저 가게의 유리창에는 거꾸로 양품점(○品店)이라고 쓰여있고, 옆에 큰 글씨로 빠리(巴里)…라고 쓰여있다.

그런데 양품점(洋品店)이란 사실 고급제품을 파는 곳이라기 보다 ‘서양제품판매점’ 혹은 ‘물 건너온 제품 판매점’이란 뜻 아닌가? 양행(洋行)이 외국과의 무역거래를 하는 회사를 뜻하듯.

당시에는 구제품과 양품 만 있었고 국산은 없었다. 국산이 있다고 해도 품질이 형편 없었다. 국산품 연필로 심에 침을 묻혀 글을 쓰면 글은 써지지 않고 갱지가 찢어졌다.

교수의 아내, 오선영은 양품을 취급하는 양품점에 취직을 하여 돈을 벌어 멋지게 살고자 했다. 그때의 양품이란 정식 수입품인지 아니면 밀수픔인지 알 수 없다. 혹 미 8군 담벼락 너머로 거래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때에는 <배 만 들어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하던 시절이니,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즉 미제는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이었다. 갓뎀잇!

참, 저 양품점의 사장은 가게가 여럿이고 무지하게 부자였던 모양으로 링컨컨티넨탈을 타고 다닌다. 그런데 1950년대의 링컨컨티넨탈은 정말 미제답게 생겼다.

4.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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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면의 남자는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라는 김동원씨다. 그는 극중에서 양품점의 점원이자 교수의 아내인 오여사를 꼬시기 위해서 전전긍긍하는 양품점 등을 거느린 사장으로 나온다. 하지만 신인으로 당시로서는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소설, 자유부인의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되기에는 전혀 미인이 아니다. 내 눈이 잘못되었나?

이들은 바야흐로 호텔방에서 짝짓기 준비 중이다.

하지만 이들의 짝짓기는 사장 와이프가 오여사의 남편 장교수에게 일러바쳤기 때문에 불발로 끝난다.

이 영화를 보면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차마 보여주지 못해서 서로의 볼을 비비는 것으로 입맞춤을 대신한다.(위의 포스터 참조) 이런 전통 속에서 철수씨 날 자바바요 하고 영희가 달리면, 여어엉희~하고 철수가 뒤쫓아가다가 영희를 잡을 즈음에 갑자기 짱돌 등장. 두 사람이 함께 넘어지고 나면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둘 사이의 아이가 태어나는 드라마틱한 장면들이 연출되게 마련이다.

5. 동영상…

이 동영상을 보면, 여성의 자유와 권위를 위한 굉장히 나이브한 곗꾼들의 논리가 나온다. 돈이다. 그 논리는 명료하며, 항상 명료한 것이 진리인 법이다. 하지만 진리에 도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니까 이 영화는 진리(돈)를 위하여 종사하다가 자멸하는 인간 군상을 그리고 있다.

화면에서 두 여자는 지금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하고 있다. 요즘은 중국집 또는 짱깨집이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청요리집이라고 했다. 미국이나 유럽 등의 중화요리집은 대부분 복건성이나 광동성 출신이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만 특이하게도 중화요리집은 산동성 출신이, 지금은 한국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산동성을 대표하는 술은 청도맥주, 공자의 고향 곡부의 공부가주가 있겠지만, 산동사람들은 빼갈을 잘마신다고 했다. 빼갈은 바이갈(百乾兒)이다. 백주의 일종이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량주라고 알고 있다. 대표적인 술은 얼고토(二鍋頭)주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중국 술의 족보를 잘모르겠다.

왜 장황하게 빼갈에 대해서 말하냐 하면, 위의 화면 속에 빼갈 도쿠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탁자 위에 실험실의 프라스크 혹은 식초를 넣어두는 것 같은 빈병이 보이는데, 그것이 도쿠리다. 이 여자분들께서는 46도 짜리 빼갈을 도쿠리째로 세병이나 마셨으니 술이 보통은 넘는 정도가 아니라 당시로서는 살림살이고 뭐고 막가자는 판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중국집에 가면 늘 방이 있느냐고 물었고, 방에 들어가  짜장면, 짬뽕은 기본으로 깔고 돈 있으면 탕수육, 없으면 야키만두라도 시킨 후 빼갈을 시켰다. 그 투명한 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목구멍이 타오를듯한 그 화끈함. 화끈함 이후의 나른함. 그리고 세상의 느긋함을 즐겼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이후 중국집에서는 더 이상 빼갈을 팔지 않았고 대신 시큼한 냄새가 나는 고량주를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지난 후 중국에서 수입한 이과두주를 팔기 시작했는데, 이것 마시고 머리가 두쪽 나는줄 알았다.

6. 추가 사진…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득한 옛날의 사진을 한번 보자.

Gwanghwamoon1/photos

이 사진은 1950년대에 중앙청 정문(광화문 자리)에서 찍은 세종로다. 아직 미국대사관이 보이지 않고,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인 시민회관도 보이지 않는다. 도로가 좁아보이겠지만 도로와 보도 사이의 가로수를 없앤다면 지금의 도로폭이다. 나는 국민학교 2학년 때까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길을 건너 지금 종로구청 자리에 있는 수송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때에는 시민회관도 미국대사관도 있었고 도로와 보도 사이의 가로수는 치워져 있었다. 국민학교 저학년인 나에게 도로 이편에서 건너편까지 까마득하게 멀었다. 그때 도로 위에는 짚차와 시발택시가 다녔고 간헐적으로 우마차나 나귀가 끄는 수레가 지나치기도 했다.

Cityhall/photos

이 사진은 1968년 시청 앞이다. 저기 보이는 하얀 건물은 아마도 지금의 프레지던트 호텔이거나 그 앞에 있는 건물일 것 같다. 그리고 정면으로 난 좁은 도로는 시청 앞에서 신세계 백화점이나 남산 1호 터널로 가는 소공동길이다. 초록색 차는 지금 남대문 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서울의 하늘이 넓다.

이 시절에는 교통정체라는 단어는 없었을 것 같다.

Cinema/photos

이 사진은 1969년의 아카데미 극장의 전경이다. 이 극장은 지금 조선일보 태평로 사옥이자, 코리아나 호텔이 들어서기 이전에 있던 극장이다. 몇발짝 옆에 떨어져 있던 국제극장(지금 동화면세점 자리)과 같은 개봉관은 아니고 당시 종로 2가의 골목에 있던 우미관처럼 재개봉관이었다. 그런데 극장 이름이 아카데미라는 것은 좀 어울리지 않지만, 극장에서도 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있다는 것과 플라톤이 그 자리에 보습학원을 차리기 이전인 아리스토파네스 시대에는 연극 연습을 하던 자그마한 숲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히려 영국의 피카딜리 서커스거리나 오페라을 하던 밀라노의 스카라극장에서 따온 극장 이름보다 훨씬 품격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정작 나의 눈에 띄는 것은 왼편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씨네마 극장이다.

종로 광화문 일대를 통털어 저기보다 형편없는 극장은 없었다. 부산이 자랑하는 동대신동의 서부창고(극장 꼬라지가 아니라고 창고라고 부른다)도 저기보다 나았다. 저 극장에서 돈내고 영화를 보았다면 동네에선 병신이라고 욕을 해도 할 말이 없는 영화관이었다.

저 영화관에서 본 영화 중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날씨가 좋은 여름날에 영화를 보다보면 사과궤짝에서 떼어낸 널판지로 덧댄 영화관의 벽틈 사이로 햇빛이 노랗게 줄을 그으며 스며들었고, 그 노란 줄을 타고 먼지들이 와글와글 떠다녔다. 때론 사람들이 극장 안의 열기를 피하고자 층계참으로 나가 극장문을 열어놓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열어논 문을 통하여 여름의 폭양이 극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영화자막을 읽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사람들은 아무 말 않고 영화를 보았다. 그들이 보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그 시절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단지 시간 뿐이었다. 시간이란 남아돌았고 사람들은 주체할 수 없었다. 영화 시네마천국을 볼 때마다, 저 씨네마극장이 늘 떠오른곤 했다.(참고: 시네마극장 )

참고> 자유부인

10 thoughts on “자유부인

  1. 우와.. 옛날 영화!

    경제적 자립……
    저 아주머니 표정과 말투가 굉장히 미워요.

    옛 사진들은 정겹습니다.
    마치 제가 저 시절을 살아보기라도 한듯이 말이에요. 헤헤

    1. 아마 저 아줌마의 물신주의, 배금주의 탓에 그런가 봅니다.

      벌써 54년전의 영화네요.

      저 영상을 보면 목소리나 옷입은 것 모두가 상당히 북한스럽죠?

      북한은 폐쇄 고립되어 예전의 말하는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개방되다보니 저런 모습이 생경해진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2. 친절한 복희씨를 읽어보면 저 당시 서울 분위기가 잘 묘사되고 있는데요, 박완서씨는 상류층이 아니었지만, 젊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전쟁 직후 풍경에 대해서 활기차게 그려냈던 것 같아요. 자유부인 영화는 안보았지만, 그 책이 묘사한 분위기과 닮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분은 70대가 넘어서야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시네요.
    그리고 정서도 볼 부비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이구요^^

    1. 그러고 보니 박완서씨의 소설을 한편도 읽어보지 못했네요. 누군가는 참 이야기꾼이라고 하던데…
      그러고 보면 토지도 안읽었으니 여성작가분의 글과는 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요즘 그 시절의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자꾸보면 아련하고 슬퍼집니다.

  3. 저는 이분이 서울에 살고 서울대 국문과를 나왔던 것이 그의 작품에서 어떻게 발현되고있는지 캐고 싶어요. 아주 미묘한 느낌인데, 최강엘리트여성이 지극히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면서 느낀 괴리감과 이질감이 언뜻 보일때도 있는데, 제가 그 쪽이 아니라서 딱히 그걸 집어내질 못하겠어요^^ 집안의 좌익문제는 엄마의말뚝과같은 시리즈로 다 풀어내신 듯한데, 고학력보수적중산층여성으로서 느끼는 사회적시각은 아직도 풀어내실 것이 많아보여요.

    1. 박완서씨가 왜 서울대 국문과를 중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주부로 살면서 느낀 괴리감이 문단에 늦각이로 등단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집 안의 좌익문제 vs 고학력보수적중산층이라는 현실의 구도는 소설적으로는 재미있는 구성을 가져다 줄 것 같습니다.

  4. 마치…모든 한국인이 지지리궁상으로 산것은 아니다… 그때도 사랑은 있었고 젊음도 있었고 먹고 살기 위한 활력도 있었다고 외치느 ㄴ것 같아요. 여자들이 모두 희생만하고 산 것도 아니고, 그들도 욕망이 있고 숨겨둔 낭만도 있다고 말하는 듯해요. 말하자면 청계천 변의 판자집이 서울의 다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같기도 하구요. 제가 느끼는바로는요.

    1. 1950~1960년대까지의 시공간과 1970년대의 시공간은 뭔지 모르게 차별되는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1970년대는 쿠테타 세력이 자신들의 본질이 파쇼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시대이며,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점의 단초를 제공해주었을 뿐 아니라, 쿠테타 세력의 비리와 권력투쟁과 자기 모순 속에서 박정희가 총에 맞고 쓰러진 십년이었습니다.

      박정희는 69년의 삼선개헌에 따라 71년 7대 대통령이 되고 72년 10월 유신헌법으로 독재자의 죽음의 길을 예비합니다.

      60년대 수면 하에서 조용히 들끓던 공포정치의 맹아가 70년대 들어오면서 사법부가 행정부의 일개 기관으로 전락하고 언론은 유신체제 홍보기구화 되는 등 바글바글 끓기 시작하여 각종 긴급조치, 계엄에 또 계엄으로 이어진 반면,

      공포의 정치의 반대편에 욕망이라는 몹쓸 것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는 욕망의 정치를 펼쳤습니다. 60년대까지의 절대 빈곤에서 갓벗어난 국민들에게 이제 한번 못살게 되면 끝까지 못살게 될지도 모르며, 가난한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몹쓸 병과 같다는 것이라면서도 의도적으로 빈부를 가르는 것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건설업자와 정부의 짜고 치는 고스톱, 강남개발입니다. 강남개발에 한쪽 발을 들여놓지 않는 사람은 쪽박 그 반대편은 대박이고, 건설이 없이 재벌이 될 수 없다는 한탕주의가 판을 치게 되고, 1970년에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농촌마을을 해체시키면서 울산, 구미, 구로동 등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도시집중화를 심화시켰지만, 한편으로 양동, 종삼, 오팔팔, 미아리 등의 집장촌을 형성하고 우리 문화를 이토록 타락하게 만든 주범으로 작용합니다.

      어려서 잘모르지만, 1960년대의 가난함이 1970년대의 추악함보다는 풍요로운 것이 아닌가 싶으며, 70년대의 아파트와 담벼락보다 사람들과 이웃들이 골목으로 흘러나와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었던 시절이며, 용이 개천에서 나오는 시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5. 1960년대 안팎에 서울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고학력자들의 모습은 박완서씨와 상당히 비슷한 정서를 보여요. 그 그룹의 분들과 몇 달을 같이 지내면서 느낀것이 그분들은 상당히 장수를 누리실 듯하구요, 80년 대 이후를 보낸 세대와는 끝끝내 대립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쥐”라는 만화에서 아들쥐가 아버지쥐에게 느낀 이해할수 없는 정서를 저도 뼈저리게 느끼며 그들과의 마지막날이 매우 나빴거든요. 전쟁을 직접 겪기보다 손위형제를 통해 느끼고(직접 당사자와는 다른 정서…그들보다 더 강한 적대감을 갖고 있죠) 그래도 부유했기 때문에 동네에서는 나름들 유지였고 그래서 대학을 진학했고, 말씀하신대로 1970년대를 주도한 분들이죠. 전쟁과 근대화를 겪으며 그나마 정서적으로 남아있던 신분제가 완전히 붕괴했지만, 정서적인 신분제는 내면적으로 유지하고 있는…아주 독특한 세대예요.

    1. 아마 그것은 당시에는 부산이나 마산, 광주 등에서도 동일했을 겁니다.
      아마 플로라님께서 느낀 그런 느낌은 저희 어머니에게도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글을 못읽는 분들이 너무도 많고 먹을 것을 위해서 하루하루를 너무도 고달프고 험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신들은 그런 것들을 이해하려고 하여도 강건너 불구경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죠.
      국민학교 저학년이었던 저도, 우리 동네의 아주머니들과 우리 어머니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우리 동네에서 어머니와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할 수 있던 사람은 제 친구의 어머니였는데, 그분은 서울 장안에서 알아주던 기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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