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상 20100928

1. 광화문 사거리 침수

추석 전날인가 광화문 사거리가 침수된 뉴스를 보았다. 그 풍경을 보면서 내가 국민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만난 그 홍수가 떠올랐다.
집이 통의동이고 학교가 지금 중구청이 된 수송국민학교였던 나는,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까마득하게 넓은 도로를 건너 미대사관을 지나 등교를 했다.
여름방학 전인지 방학 후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엄청난 비가 내렸다. 하교길이었고 학교에서 미대사관 앞에 이르렀을 때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고 있었고 광화문으로 부터 밀려 온 물이 개울을 이루며 세종로 위를 흐르고 있었다.
국민학교 1~2학년의 몸으로 그 넓은 개울을 넘기에는 무리가 있어 친구들과 손에 손을 마주잡고 어른들의 뒤를 따라 도로를 건넜는데 물이 거의 엉덩이까지 차올랐던 것 같다.
무사히 길을 건넌 후, 내가 생각한 것은 밤에도 다음날 아침에도 비가 와서 제발 학교를 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런 철없는 생각을 하며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옆의 공터를 가로지르다가 그만 깊은 웅덩이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때는 서울 곳곳을 아무렇게나 파헤치고 있었고 떼거리로 굶어죽어가는 판에 한두사람 사고로 죽는 것 쯤이야 그러려니 하는 시절이었다. 내가 빠진 곳은 주의표시나 철책도 없이 새로 들어설 건물의 지하를 파고 있던 한 길이 넘는 깊은 큰 웅덩이였던 셈이다. 다행이 옆에 어른이 있어서 웅덩이에 꼴딱 빠진 꼬마를 건져냈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젖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대문 옆의 수채에서는 물이 역류했다.밤이 되자 비는 그쳤다.

다음날 등교하자 친구들이 비가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집 마당으로 하늘에서 물고기가 떨어졌어.”
“거짓부렁 마!”
“맞아! 우리집 마당에도 팔뚝보다 더 큰 물고기들이 떨어졌는걸.”
“울 엄마가 그러는데…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래… 믿어져?”

나는 믿을 수 없는 동무들의 이야기를 집으로 끌고가 엄마에게 물었다.

“그렇다는구나 글쎄. 물고기가 하늘에서 느닷없이 떨어졌다는구나.”

하지만 우마차가 세종로의 한쪽 구석을 어슬렁거리며 굴러가던 시절과 2010년 오늘은 다르다. 나는 40년이 지난 그 옛날, 하늘에서 물고기가 서울 한복판으로 떨어져내렸다는 사실보다도 추석 전 날 광화문 사거리가 물에 잠겼다는 사실이 더욱 믿어지지 않는다.

2. 오디오 단상

본가에 맡겨두었던 쿼드앰프를 들고 세번째 수리점에 갔다 온 날은 추석 연휴가 시작하는 금요일 저녁이었다.
중고인 이 앰프를 샀을 때, 소리의 한쪽이 어긋나 있었지만, 감지못한 채 그냥 샀고 몇번 소리를 들은 끝에 만족하지 못한 까닭에 앰프를 본가에 쳐박아두었다.
수리를 마치자 앰프에서는 쿼드 특유의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아무런 특색없이 원음에 충실하다는 그 소리. 그래서인지 소리는 맑고 떨림은 길다.
추석 연휴 내내 KBS 제1 FM을 켜놓고 보냈다.
이상한 것은 같은  CD를 틀어도 라디오의 음악소리가 더 좋다.
낡은 스피커가 그런 소리를 낸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후 오디오용 케이블을 만드는 사람의 블로그에서 전기에 대한 글을 읽었다. 한 60편에 달하는 그의 전기에 대한 글은 오디오의 세계에 범람하는 미신과 요설들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을 정도로 쉽고 명료했고 깊이가 있었다. 그는 전류(I)와 전압(V), 저항(Ω) 그리고 출력(W)이 지니는 의미를 물리학적 음향학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글에는 철자법이 틀린 곳이 많음에도, 딱딱한 전기전자를 이야기함에도 충분히 문학적이고 자신의 인생의 한쪽 끝이 묻어나왔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기술자가 아닌 장인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는 말한다. 음향은 소리(음)와 떨림(향)이다. 디지털시대로 들어오면서 소리를 잡는 기술은 극대화된 반면 이제 떨림은 사라졌다. 소리를 재생하는데 아이팟은 과거보다 훌륭하지만, 떨림을 잡아내기에는 아이팟은 너무 작다. 알든 모르든 디지털 세계에서 잃어버린 떨림을 다시 찾고자 아날로그 세계로 복귀하는 자들이 바로 빈티지 매니아다.

오디오에서 빈티지란 아날로그로 되돌아가는 지점에 있다. 이른바 음향기기가 만들어지고 CD가 보편화되기 이전까지 아날로그 음향기기에서 최대의 적은 바로 노이즈였다. 소리를 0과 1로 추상화한 디지털에서는 비정상적인 신호를 여과해내고 남은 신호를 소리로 환원시키면 잡음없는 소리가 된다. 그래서 아주 미세한 약전으로도 소리를 재생해낼 수가 있다. 하지만 아날로그의 세계에서는 작은 소리(주파수)를 큰 소리로 증폭시키는 기술 밖에 다른 것이 없다, 그래서 노이즈를 차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S/N(신호대 잡음)비에서 신호(Signal)를 잡음(Noize)에 비하여 크게 하면 된다. mV, μV인 잡음에 대하여 신호의 크기를 V단위로 크게 해주면 잡음이 소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소화된다. 이때 오디오에는 고전압과 고전류가 요구되며 엄청난 크기의 트랜스가 필요하고 회로는 그만큼 튼튼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필자는 디지털 신호를 소리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소리는 명료하고 뚜렷해지지만, 그것은 단순히 신호일 뿐이지, 결코 악기가 지닌 소리의 결을 잡아낼 수는 없다고 한다. 스트라디바리나 과르네리 바이올린이 지닌 소리결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나의 잡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잡음으로 얼룩진 아날로그 세계로 돌아온다고 한다.

하지만 빈티지 수요가들이 있음에도 음향기기업체에선 더 이상 아날로그 제품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CD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 이전의 오디오를 만들어내기에는 제조비용이 엄청나게 든다는 것이다.

장터에서 5~6만원 하는 70~80년대의 중고 인켈 앰프를 지금 제작한다면 몇백만원의 원가가 들수도 있다고 한다.

어제 인터케이블을 새로 갈고, 가지고 있던 굵은 스피커선에 말굽단자를 달아 스피커에 연결했다. 소리가 생경하다. 더 나빠진 것 같기도 하고 소리와 소리 사이에 틈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케이블에 에이징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케이블이 아니라 인간의 귀가 에이징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은 시력처럼 청력도 점차 약해지는 것 같다.

3. 가을날의 하늘

가을은 늘 그렇듯이 올해도 불현듯 왔다. 맥놓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하늘이 감싸고 있는 턱없이 아득한 대지를 느끼게 될 때, 하늘과 대지가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벌어져 마침내 그 틈사이로 세계와 자연의 비밀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공허가 꽉 들어차 있음을 느끼게 될 때, 한줄기의 서늘한 바람이 불고 대지 위에 떨어진 빛은 반짝이는데, 넓디 넓은 하늘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푸르기 보다 오히려 어두운듯하다.

20100928

This Post Has 6 Comments

  1. 흰돌고래

    음향이란 것이 ‘소리’와 ‘떨림’이었군요.
    단순하게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에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확실히 ‘떨림’이 필요한 것 같아요.

    여인님 오랜만이에요…T.T

    1. 旅인

      響이라는 것이 단순히 떨림이라기 하기에는 울림이라고도 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음은 시간적이며, 향은 공간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바쁜 모양이지요?^^

  2. 善水

    저도 우퍼에 등대고나 발갖다대고 듣곤하는데 그 떨림 (여인님께서 말씀하시는 떨림과는 다른듯허지만ㅋ) 이 좋아서.. it’s all gone pete tong (한국제목으로 x됐다 피트통?) 스페인 이비자클럽의 디제이 얘기인데 deaf에서 자신만의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 보시기에 좀 시끄러우실지도 모르겠지만서도 전 그걸 보고 말씀하신 소리와 떨림같은것에 정말 새로운 느낌… 좋았던 기억이 문득 나네요.

    사진은 구름이 생동감이 느껴지는것 같습니다, 꼭 3D같다는…

    1. 旅인

      떨림보다는 울림에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수님은 잘 아니까 그런데 저 필자는 마크레빈슨의 소리가 명료한 반면 질감 쪽에선 약하다는 의견이더군요. 저 글을 쓴 필자는 지금 70~80년대 즉 디지탈기기가 나오기 이전의 빈티지를 값싼 이 시점에 하나 사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의견입니다.

  3. 마가진

    아휴.. 위험하셨군요. 제 기억에도 아주 어릴 적 태풍이 몰아치고 나면 저희 집에서 밑으로 내려온 도로가 물에 잠기곤 했는데 한번은 형이랑 내려갔다가 넓은 하수구를 덮었던 철판이 사라지고 무시무시한 소용돌이가 치고 있어 겁을 집어먹고 옆의 트럭을 잡고 조심조심 건너던 것이 기억나네요.

    예전에 학생 때, 당시 커다란 대형 오디오를 갖고 싶어 몇 년을 벼르다 태광 에로이카 쾨헬 컴포넌트를 구입하고 좋아 했던 적이 있네요.^^

    1. 旅인

      그런 범람과 침수가 아주 오래 전 그리고 지방의 이야기인줄로 만 알았는데 수도의 중심부에서도 벌어졌다는 것에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다들 무사하셨다니 다행입니다.

      태광 에로이카 나올 때만 해도 하나 장만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죠. 저도 전축이 부서지고 나서 한동안 대형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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