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와 풍경

1.

아내가 살아갈 날들이 까마득하고 무섭다며 잠을 잃었다. 아내의 손을 잡아주었어야 하나 세상의 적적함이 노을처럼 가슴에 번졌고 어깨가 무거웠다.

세상이 적적하다는 것을 왜 우리는 모르고 살아왔을까?

아내의 자는 모습을 보면 새벽은 육중하고 침침했고, 이 가을에 귀뚜라미가 울지 않았던 전말을 알 것만 같다.

2.

어제는 하루종일 KBS 제1FM을 들었다. 오전 내내 비가 내렸고 오후 늦게야 비가 그쳤다.

1970년대 후반에 생산된 낡은 앰프의 손을 보고 나자, 집어던지고 싶도록 못생긴 스피커에서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난다.

바이올린 현의 떨림과 그 날카로움. 그리고 거문고 소리가 어둠 속 저 편에서 먼지처럼 묵은 냄새를 풀어내는 사연들…

3.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를 짖고 난 후, 武적벽과 文적벽 1소동파가 적벽부를 쓰고 난 후, 자신이 간 적벽이 적벽대전의 그 적벽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해 음력 10월 대전이 있었던 적벽으로 가서 후적벽부를 지었지만, 전적벽부의 여음이 길고 깊이가 아득하여 소동파가 처음으로 적벽부를 읊었던 곳을 문적벽이라 하고 조조와 주유의 싸움이 벌어진 적벽을 무적벽이라 부르게 된다. 이라는 두개의 적벽이 생기게 된다.

필화사건으로 호북성으로 귀양(1079년)을 간 소식은 땅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살았다. 자신이 농사를 짖던 곳을 동파(동쪽 언덕)라고 했다. 귀양 간 몇년 후인 원풍 5년(1082년) 음력 7월 밤에 지인과 함께 적벽으로 뱃놀이를 간다. 배끝이 천리를 이어지고, 정기가 삼엄했던 그 적벽에 이제는 달빛만 가득한 것을 보고, 일세의 영웅인 조조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今安在哉?)라고 물으며,

“변하는 쪽에서 본다면 천지도 일순간이고, 변하지 않는 측면에서 본다면 사물과 나 모두 다함이 없으니 부러워할 것이 어디있겠는가?”고 한 후, “하늘과 땅 사이에 온갖 것에 주인이 있어 내 것이 아니라면 터럭 한 끝조차 취하지 못할 것이로되, 오로지 강 위의 맑은 바람(淸風)과 산 속의 밝은 달(明月)은, 귀로 들으면 소리(聲)가 되고, 눈이 마주하여 풍경(色)을 이루니, 이를 가져도 아무도 막지 아니하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 세상을 만든 자(조물자)의 다함이 없는 곳간(무진장)이니라.”2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而又何羨乎.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 目寓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

이 문장을 보면, 청풍명월은 소리와 풍경으로 의역을 해도 좋을 것 같다.

나이가 이제 이 부를 썼을 때의 소식의 나이(45세)보다 많아서 인지, 명월은 흐릿하고 청풍은 먹먹하기만 하다.

4.

물빛의 화가. 김태균씨의 연작 전시회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인사동에서 열린다.

추석이 지난 후 시간이 있으시거나 인사동을 지나신다면 종로구 낙원동 283-38에 있는 Gallery M에 들러 부암동의 고요한 물빛에 비친 가을 하늘을 내려다봄은 어떠실지요?

This Post Has 8 Comments

  1. 저는 컴퓨터를 켜면 제일 먼저 FM을 듣기 위해 콩을 열어요. 콩은 컴퓨터로 라디오 FM을 들을 수 있어서요.
    제게도 작은 라디오가 있는데 지금은 벽장 어딘가에 처 박아 두었는데 꺼내 보아야 겠습니다. ^^

    그리고 청풍명월은 유독 가을에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올 가을에는 청풍명월을 더 많이 차지하여 부자가 되고 싶네요. ^^

    1. 旅인

      저 시는 음력 1082년 7월16일에 쓰여진 것이니 양력으로 8월18일입니다. 그러니까 입추(8/7일)에는 들어섰지만 말복(8/8일)의 맹위가 채 스러지지 않았고 게다가 중국에서 제일 덥다는 삼대화로 중 하나인 무한과 지근거리인 적벽이니 한낮이면 날이 펄펄 끓었을 것입니다.

      소동파는 친구와 함께 열대야를 식힐 겸 뱃놀이를 간 것 같습니다.

      이제 바람도 시원해졌고, 달이 밝을 때가 되었네요.

      라디오 하니까 이상하게 골동품 생각이 납니다.

  2. 플로라

    물빛의 화가…물빛의 화가…!
    멋져요^^

    1. 旅인

      물빛을 잡아내기란 참 힘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빛의 화가… 말해놓고 나니 좋네요.^^

  3. 위소보루

    소동파의 시를 보다 보면 문득문득 한자 이외의 것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특유의 느낌의 문체가 소림끼칠 때가 있습니다. 뭐 개인적으로 한시나 고대 한어 등등을 그다지 좋아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 표현력을 좋아하거든요.

    예전에 항주에 여행을 갔을 때 서호의 넓음에 감탄을 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대도시인만큼 호수 주변도 많은 사람들로 분주했었습니다. 그 날 일출을 볼 거라고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와 서호 주변의 높은 탑으로 올라가려고 서호를 따라 걷고 있었는데 호수에 비치는 달빛의 고요함에 이와 비슷한 느낌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적벽부 를 보면 그 때 생각이 나곤 합니다 ㅎ

    1. 旅인

      정말 그렇지요? 중국어로도 표현할 수 없고 단지 한문으로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것이 소동파의 시에는 있는 것 같습니다.
      白露橫江 水光接天이라든가 擊空明兮泝流光 등은 풍경은 눈 앞에 주악 그려지는데, 말로 번역을 하려면 잘 안되는 구절입니다.

      소동파가 선불교에 정통한 탓에 다른 시인 묵객에 비하여 뭔지 모르지만 오묘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4. 마가진

    밤으로부터 새벽으로 찬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분명 가을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추석연휴 잘 보내시고 가족 친지분들과 넉넉하고 풍성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旅인

      가을이 폭우에 떠내려갈 것 같은 추석 연휴입니다. 그 쪽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빨리 비가 그치고 즐거운 추석을 보낼 수 있으면 합니다.
      올해 실제 보름달은 추석을 지난 다음날이라고 하네요.
      한가위 잘 보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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