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술자리

아침에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 누군가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공천을 받아 시군구의원에 당첨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개 의형제 성공축하 동기들 같이하자 저무개의 식당에서…”라는 아리송한 문자였다.

지하철에서 아무개가 의형제를 맺다니 이것이 무슨 뜻일까 한참을 생각한 끝에 아무개란 놈이 영화 <의형제>를 기획했고 간만에 대박이 터졌다는 것으로 감이 잡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약속이 하나 더 잡혀있었다.

두가지 약속을 떠올리며 메세지를 보낸 자식의 이름을 보았다. 고등학교 동기라곤 하지만 전혀 모르는 놈이다.

동창회라는 곳에 가면 재수없는 놈은 나를 안다고 “아, 아무개야 내 잔 받아라!”하고 잔을 권하지만 놈이 누구인지 전혀 기억할 수 없는 경우다. 하지만 더 재수없는 놈은 학교다닐 때, 제법 지명도가 있다면 있는 나를 전혀 기억 못하는 놈이다. 내 옆에 앉아 있는 놈이 내가 학교다닐 때 도사였으며, 몽따다에 속해 있었다고 언질을 주어도 녀석은 도사는 물론 몽따다라는 조직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그런 놈들은 분명 공부 잘하는 놈들과 지냈을 놈들로 담배도 안피우고, 학교 옆의 라면가게 근처도 얼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연애질이라든가 친구들의 쌈박질에도 도통 관심을 갖지 못하고 남들은 도시락 까먹거나 대가리를 책상 위에 박고 자는 쉬는 시간조차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의 정석에 빨간볼펜으로 줄이나 줄창나게 쳐댈 줄 아는 놈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무개는 고등 3년내내 사부라며 나를 쫓아다녔고, 저무개는 삼년내내 “야 너는 친구가 식당을 열었다는데 콧배기도 보이지 않냐?”며 투덜대곤 했다.

하지만 놈의 식당은 아득한 부천에 있다, 거기에서 술을 한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오려면 새벽이 되는 서울의 동쪽 끝에 나는 살고 있다.

“임마 음식점을 내려면 갈 수 있는데 내야지 부천이 뭐냐 부천이…?”

결국 퇴근시간이 될 때까지 부천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며칠전 약속이 잡혀있던 무교동 모처로 갈 것이냐로 고민하다가 문자를 날린 놈의 석연치 않은 이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부천에 가면 기억할 수조차 없는 놈들이 몰려들어 질퍽댈 것 같다는 생각에 부천까지 갈 생각이 뚝 떨어졌다.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무교동으로 가기로 했다.

술자리는 그만 9시에 끝났고 무교동에서 청계천을 가로질러 4호선 광화문역으로 간다. 청계천의 다리 위에 카메라를 걸쳐놓고 사진을 찍는다.

20100603

This Post Has 13 Comments

  1. 플로라

    조감도처럼 보이는 야경이예요…

    1. 旅인

      카메라를 고정시켜놓고 사진을 찍어보기는 처음입니다. 보는 것보다 더 멋있게 나온 것 같습니다.

  2. 아니… 정말.. 카메라… 자세히 알고 싶어지는군요.
    시그마.. 저게 카메라이름인가요?
    아아, 놀라운 카메라군요.
    -놀라운 카메라가 아니라.. 여인님. 원래 이렇게 사진 잘 찍으시는 분인가요? ㅜ.ㅠ
    사진 좋아요. 🙂

    1. 旅인

      데이지 봉봉님에게는 http://www.sigma-dp1.com/ 에 한번 들러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 곳을 들러보면 이 카메라가 어떤 철학 속에서 만들어진 카메라인가를 직접 느끼실 수 있습니다.

      저는 한장의 사진 때문에 이 카메라를 사게 되었는데, 카메라의 사양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카메라에 필요한 것에 충실한 카메라인 것 같습니다.

      컬러는 필름카메라에 필적할만한 수준이고, 선예도 면에서는 놀라운 수준입니다.
      그러다 보니 색채를 담아내기 위하여 카메라가 느릴 수 밖에 없고, 선예도를 살리기 위해서는 결국 렌즈가 어두워질 수 밖에 없고(f4), 단렌즈(28mm)를 채택할 수 밖에 없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스냅 카메라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렌즈교환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줌이 안된다는 치명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카메라가 정말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까 카메라가 좋아서 잘 찍히는 것이 첫째이고 이 카메라를 사고 난 후 좀더 신중하게 셔터를 누르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2. 방금 구경하고 왔어요..
      와…. 확 ‘땡기는’ 카메라군요..

      그렇지만.
      시그마의 갤러리보다..
      여인님의 사진들이 백만배 훌륭합니다.
      프레임 안에 ‘질서’가 있어요. 여인님의 사진에는..
      답답한 규율이 느껴지는 질서가 아니라..
      무언가 몽환적인 질서.. 흐트러지지 않았는데도 자유로운 것이 느껴지는.. 그런 질서.
      차분하고 단정하면서도, 열려있는 그런 느낌의 사진들이예요.

      여인님의 사진들을 계속 보고싶어요.

    3. 旅인

      그럼 한번 여기에 가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것 같습니다.
      http://blog.naver.com/teen9/30077625636

      이 포스트의 사진에 반해서 DP1s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블로거는 프로인 것 같은데, 이 블로그를 둘러보면서 느낀 것은 시그마의 사진이 다른 좋은 카메라의 사진에 비하여 충만한 생동감이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3. 위소보루

    청계천은 항상 해질녘까지만 사진을 찍어서 야경을 찍지를 않았는데 사진들이 무척이나 좋습니다. 야경 사진은 좀체 제 빛깔을 내기 힘들어서 찍기 쉽지 않던데 부럽습니다 ㅎ

    1. 旅인

      다리 난간 위에 올려놓고 찍었습니다. 카메라가 맘에 드는 사진을 만들어주네요.^^

  4. 선수

    여인님 소설에서 아무개 스토리를 읽은 기억이 나요. 의형제 재밌나요? 다운받았는데 어찌된일인지 플레이만 하려고 하면 곰플레이어는 닫히고 kmp는 소리가 안나오네요 ㅜㅜ;
    휴~ 요새 이웃님들 서울 사진을 보면 무척 그리워져요~ㅎㅎ
    글구 제 생각에도 위에 링크해주신 곳의 사진을 봤는데 뭐랄까 저는 여인님의 시선이 훨 좋네요 호홋!

    1. 旅인

      의형제 아직 못보았습니다. 이상하게 놈의 영화는 잘 못보겠더라고요. 의형제 보기 이전에 허리우드 키즈의 생애를 한번 더 보아야겠습니다.

      올해 서울의 하늘은 정말 맑고 드넓습니다. 하지만 계절이 꼬여서 봄꽃은 때를 잊었고 여름도 불현듯 찾아오고 그렇습니다.

      거기도 계절이 불순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DP1에서 제공하는 사진보다 http://blog.naver.com/teen9/30077625636
      의 사진은 환상적인 것 같습니다.

  5. 날기억해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 )

    사진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날기억해’ 라고 합니다.
    블로그 유입 URL 을 보다가 못보던 주소가 있어서 이렇게 들어 오게 됐습니다.
    알고보니 DP1 사진으로 링크가 걸려 있었군요.
    글을 읽고는 너무 칭찬을 해주셔서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링크까지 걸어서 사진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_^
    기회가 될때마다 종종 들리겠습니다. : )

    1. 旅인

      안녕하세요. 사진의 문외한인 제가 DP1s를 사게 된 것은 다 ‘날기억해’님의 사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카메라를 잘샀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종종 들러서 사진도 감상하고 어떤 시각으로 사진을 찍는지도 배우고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들러주시다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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