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사보기

1. 천안함

예전 군사정권이라면,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모두 군사기밀로 치부되어 보도조차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안함 사태는 보도가 되어도 그 내용 상 군사기밀과 하등 대차가 없다. 보도되거나 발표된 것으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으니 군사기밀이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혹은 군사당국은 사지선다형이나, 어느 것이 맞을까요라는 문제를 국민들에게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안함은 어떻게 두동강이가 났을까요? 맞는 것을 하나만 골라주세요.

① 내부폭파 ② 기뢰와 충돌 ③ 어뢰피격 ④ 암초와 충돌

사건의 현장을 다녀간 사람들의 표정에는 어쩐지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실종자 가족들의 표정은 극명하게 절실하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거꾸로 뒤집어져 수십미터의 수면 아래로 침몰한 배 안에서도 사람이 69시간 동안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시간까지 그들이 생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살 수 있다는 희망인데, 희망을 포기하게 되는 시간이 얼마만큼 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아래 참고)

이런 일들은 어느 정부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에, 요즘 이렇게 묻는 버릇이 생겼다.

“노무현대통령이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노무현대통령이라면 함미의 사람들은 구출되었을까?”

2. 독도이야기

쪽바리 교과서에 여기는 내 땅이라고 금이 그어졌다면, 평시같으면 전국이 뒤집어질 일이다.

천안함 사태 때문에 서쪽의 백령도를 쳐다보느라고, 국민도 정부도 동쪽의 외로운 섬을 쳐다볼 겨를이 없는 것 같다.

조용하다.

정부에서는 일본대사를 불러 엄중하게 말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엄중한 말씀을 심각하게 듣고 대사관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요미우리 신문의 기사와 독도 관련 소송 및 정부의 대처를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일본의 기획된 의도와 한 점도 흐트러짐 없이 착착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다시 한번 예전에 썼던 포스트를 읽어본다.

<분쟁지역화하고 싶지 않다.>는 이 말은,

이는 지금 방송하고 있는 사극드라마 <동이>의 시대인 숙종 때 안용복 사건을 처리한 조선 조정의 저열함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독도문제 3제 중 2 : 울릉도와 관련한 안용복 사건
독도문제 3제 중 1 : 노무현 대통령의 독도발언에 대한 국민으로서의 생각

3. 일본 역사책을 읽다가…

일본 출장을 갔다가 센다이 공항에서 산 ‘일본사’라는 책을 읽고 있다. 역사책을 읽다보니 왜놈의 역사 속에서 일본이 지금처럼 잘 나갈 구석을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다가 메이지의 왕정복고 이후 폐번치현(廢藩置縣)에 와서 아뿔싸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당시 왜국에는 250명 정도의 다이묘(大名)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칼과 총을 소유한 무장집단을 거느린 자들이며, 영주로 자신의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고, 존귀한 신분과 부를 누리고 있었다.

메이지는 날카롭게 벼린 칼을 차고 있는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 중앙집권을 이룬다. 물론 이를 통해서 토지를 백성에게 무상분배를 한 것은 아니지만,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해서 근대화의 기틀’  1사족 : 메이지유신은 근대화 이전에 중세봉건장원제도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조정치제도로 이행을 의미할 뿐이다. 대정봉환(왕정복고)을 주도한 자들의 이념은 퇴계의 성리학, 이기이원론에 입각한 강력한 군왕체제라고 한다. 당시 우리는 율곡의 이기일원론을 바탕으로 한 노론세력의 끊임없는 왕권에 대한 도전, 그것으로 인하여 더 이상 이씨 조선이라는 군왕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인하여 장원경제 상태에서 농노상태에 결박되어 있던 사람들이 신민으로 성장하며 기존의 상인계급이 형성한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급속한 신흥자본주의 시스템에 합류할 수 있었지만, 우리의 백성들은 탐학한 관리와 지주들로 인하여 점점 도탄에 빠져들고 있었다. 을 마련한다.

하지만 우리는 해방 이후 무엇을 했던가?

반민특위, 토지개혁 만 잘했더라면 우리의 지금은 어떠했을까?

참고>

대학시절 형은 암벽등반에 미쳐 있었다. 할 일이 없는 날이면 자일을 붙잡아 줄 친구 하나를 대동하고 인수봉으로 가서 하룻밤을 지내곤 했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1981년 11월인가 싶다. 이른 새벽에 형에게 전화가 왔고, 사람들이 조난을 당했다며 자일이 든 배낭을 들쳐매고 형은 인수봉으로 달려갔다.

아침뉴스에 형이 죽은 조난자를 등에 업고 내려오는 모습이 잠깐 보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온 형은 아무 말도 않고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하룻밤 사이에 조난을 당하고 죽어가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나는, 깨어난 형에게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했다.

형의 설명은 대충 이렇다.

조난사고는 대부분은 늦가을 저녁에 발생하기 쉬운데, 암벽은 이 계절에는 빙점 이하로 차갑게 식어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차갑게 식어있는 암벽 위로 습기를 머금은 따스한 구름이 다가오는 경우가 있어. 구름이 암벽에 부딪히는 순간, 수분은 그대로 하얗게 얼어버리지. 한번 그 모습을 본 사람의 경험을 빌자면 암벽 저쪽에서 하얗게 서리가 일어서면서 급속하게 자기 쪽으로 달려온다는거야. 그러면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다급하게 하산을 하게 되지. 그러다보면 자일이 휘말리는 것을 살피지 못하게 되고, 그만 몸이 자일에 엉켜버리고 오도가도 못한 채 암벽 위에서 조난을 당하고 말지.”

그때만 해도 등산장비가 조잡한 것이 많아서 형은 새로 자일을 구했을 경우 근처의 학교로 가서 자일이 어느 정도 꼬이는 가를 보기 위하여 자일의 끝에 매직으로 표시를 한 뒤, 던져보곤 했다. 던진 자일은 5~6미터 길이로 운동장 위에 일자로 떨어졌다. 형은 몇차례 던져보고 표준은 십미터에 두번 이하로 휘말려야 하는데, 이것은 5미터에 한번 반이야. 십미터에 세번 돈다고 계산할 수 있을까?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산이라서 춥긴 하지만 자일에 엉켜 하룻밤을 지냈다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이해가 안돼.”

“내가 이번 조난자를 구조하러 갔다가 한 일이 무엇인줄 알아?”

“뭔데?”

“조명탄을 구하는 것이었어. 인수봉 밑 의정부가는 길 옆에 군부대들이 있잖아? 밤새도록 조명탄을 구걸했어. 그런데 한국의 군대에서 화기반출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지.”

“조명탄은 뭐하게?”

“어둠과 추위 속에서 공포 속으로 서서히 침몰해가는 그들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희망을 터트려주는 것이지. 어둠 속에 펑하고 불빛이 피어나면 그들은 누군가 인수봉 저 밑에 자신들을 구하려고 왔다는 것을 간신히 기억해내는 것이지. 그러나 우리는 결국 조명탄을 구하지 못했어…”

형은 잠시 침묵을 한 뒤,

“조금만 더 있으면 해가 날 시간인데… 그들은 말이야, 외마디 비명을 질렀어. 그 높은 암벽 위인데도 그 소리는 들렸어. 사람들은 그렇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죽어간다는 거야.”

형은 그것을 무슨 포비아라고 했다. 사람은 추위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떨어져 아무 희망도 없이 거대한 어둠 속에 영원히 매달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미치고 죽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형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몇일동안 이불을 뒤집어 쓰고 비실비실 잠을 잤다.

나는 조난당한 시체를 업고 내려올 때의 기분이 어떠했는지 차마 물을 수 없었다.

20100401

답글 남기기